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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5) 李翰林 1군 사령관 체포 작전

淸山에 2011. 3. 18. 14:17
 

 

 
 
李翰林 1군 사령관 체포 작전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45)/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가는 쿠데타軍의 입장에서는
권력의 공유와 分占을 허용할 수 없었다.
趙甲濟  
 
 

 

 
 
李翰林 압송
 
 5월18일 현재 박정희의 쿠데타를 무효화할 수 있는 유일한 武力(무력)은 이한림 사령관이 지휘하는 야전군
(1군)이었다. 서울로 진입한 3600명의 쿠데타軍을 진압하는 데는 야전군 1개 사단만 동원하면 충분했다.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한 1군 사령관으로서는 적법한 진압 명령만 내려오면 작전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런 진압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세 사람, 즉 장면 총리─윤보선 대통령─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의
주저와 포기였다.
 
 17일 오후 이한림은 박정희에게 ‘나는 쿠데타를 묵인한다. 그러니 너도 1군에 간섭하지 말라’고 전달했지만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가는 측의 입장에서는 권력의 공유와 分占(분점)을 허용할 수 없었다. 1군이 독립된 권력으로서 존재하는 한 쿠데타軍은 미군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항상 진압의 위협을 느껴야 할 처지였다.
 
 1군 사령부 안에서 숨을 죽이고 사태를 관찰하고 있던 혁명 주체 세력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더 다급했다. 작전처 曺昌大(조창대) 중령을 비롯한 李鐘根(이종근·국회의원 역임), 沈怡燮(심이섭), 朴容琪(박용기) 중령은 육사 8기 동기생으로서 다른 다섯 명의 장교들을 포섭해둔 상태였다. 실병력을 지휘하지 않는 참모 장교들이라 결정적 병력 동원을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한림 사령관을 무력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5·16 혁명 방송이 나가자 1군 사령부의 장교들 분위기는 대체로 ‘혁명 지지’ 쪽이었다. 정보처 소속 박용기 중령은 16일 오전 嚴秉吉(엄병길·감사위원 역임) 중령을 데리고 헌병부장 朴泰元(박태원·치안국장, 삼성건설 사장 역임) 대령을 찾아갔다. 박 대령은 “혁명에 협조하겠다”고 즉석에서 승락했다. 1군 사령부와 사령관의
안전을 책임진 지휘관의 포섭에 성공함으로써 이한림 체포 작전은 반쯤 성공한 셈이었다.
 
 
 

 

 
 

 조창대, 박용기 중령 등은 이한림의 전화를 감청한 요지를 계속해서 보고받고 있었다. 이한림의 회고록 기록과는 달리 박용기의 기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16일 오전 10시쯤 처음으로 이한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 이한림은 박정희에게 “넌 빨갱이가 아닌가. 즉시 동원한 부대를 원대 복귀시켜라”고 소리쳤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후 3시쯤 박정희는 다시 이한림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때도 이한림은 박정희의 협조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하고는 “나의 승인 없이는 절대로 혁명이 성공할 수 없으니 부대를 원대 복귀시켜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1군 부사령관 尹春根(윤춘근) 소장, 정보처장 李召東(이소동) 준장은 쿠데타를 진압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17일에 들어서니 이한림 사령관이 육사 교장일 때 배출시킨 정규 육사 출신 대위들을 중심으로 하여 1개 중대 병력을 편성, 사령부 경비에 투입할 것이라는 첩보가 주체 장교들에게 들어왔다. 조창대, 박용기 중령은 사령관 주변의 방어가 굳혀지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게 되었다.
 
 오후 6시 이들 혁명파 장교들은 육본으로 전화를 걸어 1군과의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던 오치성 대령에게 ‘이한림 체포 작전’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한다. 오치성은 박정희 소장과 협의한 뒤 ‘좋다’는 통보를 했다. 조창대, 박용기 중령 등은 18일 새벽에 덮치기로 했다. 그 전에 손을 써야 할 부분이 있었다. 이들은 우선 사령관의 관사를 경비하고 있는 헌병들을 철수시켜 줄 것을 박태원 헌병부장에게 요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혁명파에 합류한 심리전 참모 許順五(허순오·전기안전공사 사장 역임) 대령으로부터는 1개 중대를 지원받아 관사의 외곽을 포위하기로 했다. 이한림을 체포한 뒤 서울로 데리고 갈 지프도 준비하고 운전은
혁명파인 엄병길 중령이 맡기로 했다.
 
 
 

 

 
 
 
 18일 새벽 6시 조창대·박용기 중령과 안찬희·김수만 대위는 사령관 관사로 갔다. 경비헌병들이 연락을 받지 못했는지 통과시켜 주지 않는 것이었다. 박태원 헌병부장에게 연락을 하니 박 대령이 달려왔다. 무사히 통과한 혁명파 장교들은 사령관실에 붙은 부속실로 들어갔다. 전속부관은 朴俊炳(박준병·자민련 사무총장 역임) 대위였다. 박 대위에게 사령관실로 안내하게 했다. 그때 이한림은 참모장 黃憲親(황헌친) 소장, 군수참모 朴元根(박원근) 준장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었다. 박 대위가 나가고 문을 닫자 박용기 일행은
허리춤 속에 찔러 넣은 권총을 빼들었다.
 
 “사령관님, 서울로 모시겠습니다.”
 
 “박정희가 나를 데려오라고 했어?”
 
 잠시 생각에 잠긴 이한림은 박 대위를 부르더니 “서울 가야겠다. 차를 준비시켜”라고 명령했다. 박용기 중령은 이때 헌병 중위로 위장하고 있었다. 이한림 사령관을 호송하는 차는 두 대였다. 차 앞에서 박용기 중령이 이한림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자 이한림은 화를 내며 “降將(항장)도 무기는 빼앗지 않는다. 너희들은 내 부하가 아니냐”고 소리쳤다.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중재에 나선 박원근 준장이 “제게 주십시오”라며 끼어들어
권총의 실탄을 제거한 뒤 사령관에게 빈 총을 돌려주었다.
 
 선두의 스리쿼터엔 완전 무장한 1개 분대의 헌병이 타고 이한림은 자신의 지프에 탔다. 운전은 엄병길 중령, 이한림은 운전석 옆자리, 뒤에는 감시역으로 안찬희 대위가 탔다. 이때 박준병 전속 부관도 동승했다. 두 대가 공관 문을 나설 때 1군 사령관 수석고문관인 자부란스키 준장이 탄 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스리쿼터에 타고
있던 호송책임자 박용기가 차를 세우게 하고 고문관과 사령관이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주었다.
 
 원래 호송 루트는 원주─횡성─양평─양수리 쪽이었으나 양평에 주둔한 9사단이 이한림 중장 편이란 첩보가 있어 원주─여주─이천─천호동─육본으로 변경했다. 이천을 지날 때 L─19 경비행기가 상공에 나타나 호송차를 따랐다. 이원엽 육군 항공대장으로부터 ‘이한림 장군을 호송하니 경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한
육본 비행대장 金元浩(김원호) 중령이 조종하는 비행기였다.
 
 
 

 

 
 

 이한림 중장을 태운 지프와 호송차는 오전 11시30분쯤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전속 부관 박 대위는 내리도록 했다. 박용기가 보니 덕수궁에는 공수부대원들이 많이 집합해 있는데 박정희 소장도 눈에 띄었다.
박 소장은 박용기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수고했다’는 뜻을 보냈다. 덕수궁 중화전 앞뜰에
지프가 섰다. 박용기는 이한림을 공수부대원에게 인계했다.
 
 이한림은 “전속 부관을 좀 만나게 해다오”라고 부탁했다. 이한림은 박준병 부관에게 “가족에게 걱정 말라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이한림 중장을 인수받자 아주 살벌하게 대했다. 젊은 대위가 다짜고짜
 이한림의 볼에다가 권총을 찔러 대놓고는 이한림의 빈 권총과 혁대를 빼앗았다.
 
대위는 “저 계단으로 올라가라!”고 반말로 명령했다. 이한림은 중화전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지금부터 사형을 집행하겠으니 똑바로 자세를 취하시오.”
 
 대위는 소리치더니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는 사격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한림은 자신을 향한
총구를 바라보면서 당당하게 죽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張勉, 수녀원서 나오다

 이한림 1군 사령관은 덕수궁 중화전 계단에 자신을 세워 놓고 권총을 겨누고 있는 공수단 대위를 향해서
덕수궁이 쩡쩡 울릴 정도로 고함을 쳤다.
 
 “야─ 이 개자식들아. 역사의 무서움을 모르는 무식한 놈들아─ 쏴라!”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던 대위는 노리쇠를 당겼다가 놓으면서 실탄을 장전하더니 다시 조준을 했다.
이한림은 기다리는 총탄이 안 날아오자 다시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야─ 이 새끼들아─, 탐욕의 개자식들아─ 빨리 쏴라!”
 
 대위는 동요하는 빛을 보이더니 계단을 올라왔다.
 
 “왜 안 쏘는 거야, 이 시시한 놈들아!”
 
 대위는 풀이 꺾인 표정을 짓더니 이한림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하라고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더니 중화전의 문을 열고는 “들어가십시오”라고 공손하게 대했다. 천주교 신자인 이한림은 안으로 들어가 나무의자에 앉자마자 묵주를 꺼내 기도를 드렸다. 그는 속으로 ‘박정희, 김종필 집단은
야만인 중에서도 야만인들의 집단이구나’ 하는 증오심을 억누르려고 애썼다(회고록).
 
 5월18일 오전 이한림이 덕수궁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던 그 시간대에 육사 생도들이 청량리에서 종로를 따라 행진하고 있었다. 그 전에 생도대장 김익권 준장은 육본으로 전화를 걸어 연금된 강영훈 교장과 통화를 했던 것이다. 김 준장이 “빨리 결심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강 교장은 “알아서 하시오”라고 했다. 마음속으로는
혁명을 지지하고 있던 김 준장은 “알겠습니다. 집행하겠습니다”라고 했다.
 
 18일 아침 김익권 준장은 예복 차림의 생도들을 트럭에 태워 청량리로 데리고 나왔다. 그곳에서 하차한 생도들이 시청을 향해서 행진에 들어가자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를 쳤다. 정규 육사 1기인 이상훈(국방장관 역임), 전두환 대위도 이 대열을 따라갔다. 이상훈은 걸어가면서 시민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했다. 한 사람이 박수를 치면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산되었다. 혁명을 지지해서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화려한 예복을 입은 생도들의 씩씩한 행진이 멋지게 보여서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쨌든 육사 생도들의 시내 행진은
민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텔레비전 방송이 없던 시절이라 이 시가 행진의 시청각적
효과는 더욱 극적이었다.
 
 박정희는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을 찾아가 “지금 육사 생도들이 행진하여 오고 있으니 각하께서 격려 훈시를 해주셔야겠습니다”라고 했다. 장도영은 “나는 전혀 모르는 행진이고 혁명은 당신이 주도했으니 당신의 생각대로 훈시하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미 각하께서 중책을 맡으셨으니 꼭 훈시를 해주셔야겠습니다”라고 간청했다. 장도영은 그래서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사관 생도들에게 훈시를
해야 했다’는 것이다. 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단상에 오른 장도영은 이런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번 우리 군의 행동은 애국애족의 일념에서 취한 것이다. 이 혁명은 저 1919년의 삼일운동 때로부터
거족적으로 끊임없이 우리 민족이 투쟁해 온 민족민주주의 혁명 과정의 일환이다>
 
 이런 연설을 하고 나니 장도영은 저절로 ‘이 군사 행동이 진정으로 그런 결실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장도영의 연설에 이어 4학년(18기)인 鄭在文(정재문) 연대장 생도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4·19 이후에 등장한 정치 브로커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이 땅을 도색해 놓았는가. 저 길가에 뛰노는 삼척동자에게 물어보라. 자유당과 무슨 차이가 있었더냐고. 권력에 굶주린 민주당은… 한없이 무기력한 민주당은… 치안에 한없이 무력한 저들은 붉은 간첩들을 마구 수입해 놓았다. 국민의 군대는 이런 식의 민주주의
그 자체를 더 이상 연명시킬 수 없다는 엄숙한 결의로써 고개를 들고야 말았다>
 
  훈시를 마친 뒤 지프를 타고 육본으로 돌아오는 장도영 의장에게 덕수궁 앞의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장도영은 비로소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국민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육본에 돌아온 장도영이 집무실로 들어서니 낯이 익은 도널드 위터커가 기다리고 있었다. 위터커는 미군 정보장교 출신인데 장면 총리의 정치고문으로 있었다. 위터커는 마침내 장면 총리의 거처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갔다.
 
 
 

 

 
 

 장면은 자신의 수기에서 18일의 사임을 결심한 것은 ‘17일경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미국 대사관에선 ‘윤 대통령이 그렇게 나오는 한 자기들은 별
도리가 없다’는 태도였다는 것이다.
 
 [카르멜 수녀원 심마리아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17일 오후 경향신문 사장 韓昌愚(한창우)도 카르멜 수녀원을 찾아왔다고 한다. 심 수녀는 “박사님이 안 계신다”고 잡아뗐으나 韓 사장은 “운전기사한테서 다 들었으니
꼭 만나 뵙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심 수녀는 장면 총리의 허락을 받아
한창우를 안내했다.]
 
 장도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수녀원에서 만난 장면 총리가 ‘극히 냉랭하게 나를 대하기는 했으나 언성을 높여 질책이나 욕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장도영은 상황을 보고하고 “이제는 나오셔서 잘 수습을 해주셔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장면은 침통한 얼굴로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알았어”라고 하더란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심 수녀의 증언은 다르다.
 
 “저는 장 박사님이 그토록 大怒(대로)하신 것을 전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장도영 씨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꾸짖으시는데 곁에 서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왜 쿠데타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허위 보고를 했느냐고
꾸지람을 하시며 도대체 이 나라와 겨레를 어떤 지경에 빠뜨리고 싶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 수녀는 수도원을 나서던 장면의 뒷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람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분은 聖人(성인)의 대열에 끼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 그런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도영은 장면 총리를 데리고 중앙청으로 갔다. 이곳에서 장면 총리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은 제2공화국의
마지막 閣議(각의)를 주재했다. 선포된 비상계엄령의 추인과 내각 총사퇴를 의결한 장면 총리는 의결서를
가지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서 청와대로 올라갔다.
 
 장도영은 육본으로 돌아와서는 집무실 부속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는 ‘내가 어쩌다가 이다지도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단 말인가’ 하고 괴로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