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연재(46) 5월18일, 朴正熙의 쿠데타가 성공의 문턱을 넘다

淸山에 2011. 3. 23. 12:10

 

 
 
5월18일, 朴正熙의 쿠데타가 성공의 문턱을 넘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46)/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의 체포 압송,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가두 행진, 그리고 장면의 출현과 내각 총사퇴 의결이 이날 하루 동안에 이루어졌다. 

趙甲濟   
 
 

 

 
 
美軍의 대화 제의
 
 
5월18일은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의 문턱을 확실하게 넘은 날이었다.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의 체포 압송,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가두 행진, 그리고 장면의 출현과 내각 총사퇴 의결이 이날 하루 동안에 이루어졌다.
 
 한 줌도 안 되는 쿠데타군을 진압할 기회만 보고 있던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칼자루를 빼앗겨 버린 것이다. 박정희와 매그루더의 대화는 이날부터 탐색 단계로 접어든다. 대화나 협상은 어차피 힘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날부터는 미군 측이 오히려 초조한 모습을 보인다. 이날 아침 金貞烈(김정렬) 전 국방장관은 ‘미군이 쿠데타軍을 진압하려고 한다’는 뒤늦은 정보를 듣고는 매그루더와 사이가
좋은 자신이 한미 간의 難題(난제)를 풀어보려고 나선다.
 
 그는 박정희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던 朴泰俊(박태준·자민련 총재 역임)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매그루더를 만나러 간다고 알린 다음 용산 8군 사령부로 들어갔다. 사령관 매그루더와 부사령관 멜로이 장군이
이례적으로 현관까지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 측이 상당히 다급한 사정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사령관 집무실로 들어가 앉았다.
 
 매그루더는 “박정희는 지금은 내색을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공산주의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낼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말부터 꺼냈다. 김정렬은, 일본 육사 후배인 박정희 소장이 군내 남로당 조직원으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고 있을 때 자신이 나서서 구명 운동을 벌인 과정을 설명해 주면서 안심시키려고 했다.
 
 
 

 

 
 

 김정렬은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만나 보라고 했다. 매그루더는 이미 김정렬에게 “우리는 장도영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직접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인 실력자를 만나보라고 권한 것이다. 김정렬은 자신이 그 요담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매그루더는 “박정희 장군을 만나면 잡아간 이한림 장군을 석방해줄
것을 부탁해 주시오”라고 했다.
 
 김정렬은 박정희를 만나서 매그루더의 뜻을 전했다. 박정희는 매그루더와의 요담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한림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형님, 이한림과 나는 滿軍(만군) 동기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현재로서는 석방을 고려할 수 없습니다.”
 
 당시 매그루더의 정치 담당 보좌관은 짐 하우스먼 중령이었다. 국군 창설에 주요한 역할을 하여 한국군 상층부와 친했던 그는 5월18일 귀한 손님을 맞았다. 박정희 소장이 姜文奉(강문봉) 예비역 중장을 데리고 용산 8군 사령부 안에 있는 그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강문봉은 만주군관학교에서는 박정희의 후배였으나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에 먼저 들어온 덕택에 자유당 시절에 벌써 2군 사령관을 지낼 정도로 빨리 승진했다.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4·19 직후에 출감했었다.
 
 세 사람이 소파에 앉자 박정희는 담배를 피우려고 라이터를 켰으나 기름이 떨어져 불이 붙지 않았다. 하우스먼의 아들 지미가 재빨리 라이터 기름을 갖고 와서 라이터에 부었다. 그러는 사이 박정희는 한때의 상관 강문봉의 무릎을 만지면서 “강 장군 같은 사람이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야 하는 건데…”라고 했다. 박정희는 “혁명위원회에는 하우스먼 당신의 친구들이 많아요. 그러니 이 혁명은 당신의 혁명이오”라고 말했다. 물론 강문봉이 통역했다. 이때 전화가 걸려왔다. 하우스먼이 전화기를 들었다. 혁명위원회의 어느 장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박 장군께서 당신네 집에 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귀하의 댁에 머물 동안 박 장군의 신변 안전을 부탁한다.”
 
 
 

 

 
 

 하우스먼은 버럭 화를 냈다. 전화기를 놓고 돌아서니 박정희가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라이터를 켰는데 불길이 확 치솟았다. 지미가 라이터 기름을 너무 많이 부어 라이터 외부로 흘러나온 기름에까지
불이 붙은 것이다. 세 사람은 함께 웃었다. 박정희는 어렵게 입을 뗐다.
 
 “나는 여순반란사건 토벌작전에 참여하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 체포되었는데 사실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하우스먼은 여기서 박정희의 말을 막았다고 한다. ‘한국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어 있는 분으로 하여금 스스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하여 말하도록 한다는 것, 더구나 그런 말을 무릎을 맞대고 듣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하우스먼의 딸이 내어온 얼음 조각이 담긴 콜라에 입도 갖다 대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얼음이 녹아 콜라가 멀겋게 되도록 내버려두고 있던 박정희는 “하우스먼 씨,
나를 위해 워싱턴에 좀 갔다 오지 않겠소”라고 했다. 하우스먼은 방으로 들어가 미국행
비행기표를 갖고 오더니 박정희에게 보여 주었다.
 
 바로 다음날 하우스먼은 아내와 함께 휴가 겸 출장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덤덤하게 “고맙소”라고 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하우스먼은 미 합참의장 렘니처를 獨對(독대)하여 박정희 장군에 대한 설명,
그리고 군사 정권의 성격에 대한 분석과 예견을 털어놓았다.
 
 5월18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 사태에 대한 요약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서 CIA는 ‘박정희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 언급했다.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때 복직되었고 그 뒤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재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CIA는 쿠데타가 성공한 요인으로서 ‘어떤 저항도 존재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무관심했으며 장면 총리의 저항 포기, 장도영의 이중 행동, 윤보선 대통령의 타협적 태도와 이에 기인한 합헌적인 정권이양,
이에 따른 군사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꼽았다.
 
 이 보고서는 또 ‘만약 군사 정부가 일찍 민간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면 이승만 정부에 참여했던 극우 세력이 복귀하는 결과를 빚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군사 정부는 경제 문제에 대한 계획이 없고 경제 전문가도 없기 때문에 前(전) 정권의 관료들을 계속 등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18일 미 국무부 보울즈 차관은 “한국의 정변은 反美(반미) 정권의 등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은 신정권을 승인할 것이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5월19일) 매그루더 사령관은 정보장교 몰 대위를 김종필 중령에게 보내 ‘한번 만나자’는 통보를 해왔다. 미군 대장이 한국군 중령을 대화상대로 지명한 것은
5·16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달라진 한미 간의 역학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大將과 中領의 담판
 
 5·16 군사혁명 이후 최초의 의미 있는 한미 간 대화는 5월19일 오전에 미 8군 사령관실에서 있었다. 5월16일자로 중령에 복귀한 김종필은 사복 차림으로 간다는 조건을 붙여 이 요담에 동의했다. 매그루더는 멜로이
부사령관을 배석시켰다. 통역을 두고 진행된 이날의 요담은 군인들의 대화답게 직설적으로 진행
되었다고 한다. 김종필 전 총리의 기억에 따르면 매그루더와의 대화는 대강 이러했다고 한다.
 
 매그루더는 손님을 앉혀 놓고는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怒氣(노기)를 띠고 말했다.
 
 매그루더: “귀하들은 우리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마이어 협정 (1950년 7월에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긴 대전협정)을 위반했다. 귀하는 지금 돌아가서 보스에게 전하라. 16일 이전 상태로 부대를
돌리면 불문에 부치겠지만 불응하면 그대로 둘 수 없다.”
 
 김종필: “사령관이 대전협정을 고집한다면 좋다, 우리 요구도 들어주어야 한다. 혁명을 인정하라.”
 
 매그루더: “그것은 둘째 문제다. 귀하들은 나의 권한을 무시했고 작전 지휘권을 문란케 했다.”
 
 김종필: “그러니까 혁명 아닌가. 혁명할 때 미리 찾아가서 ‘지금부터 부대를 출동시키겠습니다’ 하고
신고하고 하는 데도 있나.”
 
 매그루더: “마이어 협정을 위반하고 나의 군 지휘권을 침해한 사실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쿠데타軍은
즉시 원대 복귀하라.”
 
 김종필: “그러면 우리더러 혁명을 포기하란 말인가. 영원히 반란군 상태로 있으란 말인가.”
 
 매그루더: “여러 말 말고 원대 복귀시켜!”
 
 김종필(일어서면서): “이런 분위기에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회담을 더 계속할 이유가 없다.”

 
 
 

 

 
 

 김종필이 방을 나가려고 하니까 멜로이 부사령관이 말렸다. 그는 “미스터 킴, 우리는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
않았소”라고 하더란 것이다. 김종필은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매그루더 사령관께서 저렇게 화가 나 계시니 내가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일개 중령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에는 ‘80 노인도 열 살짜리 손자한테서 배울 것이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말씀하시라고 해주시오.”
 
 매그루더는 김종필과 비로소 대좌했다. 그는 “왜 혁명이 필요했소”라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대장과 중령 사이의 대화가 풀리기 시작했다. 첫날 대화는 상대방의 입장을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김종필은 돌아와서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다음날인 5월20일 매그루더는 다시 김종필과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이날 회담에서 한미 간의 타협점이 모색되었다. 김종필은 혁명군을 원대 복귀시키는 조건으로 서울을 反혁명 세력으로부터 방어할 수도방위사령부를 신설하고 이를 혁명위원회 직속으로 둘 것을 제안했다.
 
 김정렬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자신의 주선에 의한 매그루더─박정희 회담도 5월23일에 열렸다고 한다. 박정희는 李壽榮(이수영) 외무차관을 통역으로 데리고 매그루더를 찾아가 세 시간 이상 회담했다고 한다. 돌아온 박정희는 아주 밝은 표정이었고 “우리는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길게 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5월25일 세 번째 매그루더─김종필 회담에서 한미 간의 갈등을 마무리할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날의 회담기록은 남아 있다. 매그루더 대장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이 요담엔 미군 측에선 매그루더, 멜로이 부사령관, 미 8군 정보참모 콘 대령, 통역관 韓相國(한상국) 중령, 레이놀즈 소령, 존 애치(통역관),
정보장교 몰 대위가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대화록이 중요한 것은 5·16 전후의 사정을 보여 주는 당시의 유일한 공식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만들어진 기록이 미화, 왜곡, 축소의 혐의를 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자료는 한미 간의 공동 기록에 의하여 보존되었기 때문에 정확성이 보증되고 있다. 이 회담에서 5·16 혁명의 기획자 김종필 중령이 길게 설명하는
혁명의 과정과 동기도 그런 점에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김종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진정한 목적을 매그루더 장군에게 충분히 설명드리지 못하여 오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현직에서 강제 전역당할 때도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거사계획이 탄로날
것이란 판단에 도달하였습니다.
 
 먼저 우리가 벌인 정군운동의 배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귀하는 한국군의 고급 장성들과 매우 친밀하였습니다만 이들은 하급 장교들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한 분들이었습니다. 둘째, 4월 혁명 이후 육군에서는 군부를 숙정해야 한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것이 공산화와 쿠데타를 막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군 내부에는 상호 반목하는 많은 파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급 장교들은 고급 장성들의 부패상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어느 중장은 280만 환을 축재했고 부하 장교의 부인과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 하급 장교들이 상관들을 존경할 수 있었겠습니까.
 
 1960년 3월15일 선거에서 고급 장교들은 부정선거를 위해서 2억 환의 자금을 받아 선거에 쓰지도 않고 착복했습니다. 우리 군은 표면적으로는 臨戰(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 이면은 부패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북한군 하급 장교들은 사병들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사기를 높이고 정신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급 장교들의 이런 솔선수범은 하사관들의 생활 태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아무리 장비가 좋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단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군대는 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급
장성들의 집과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였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불평분자로 몰았습니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박정희 소장에 대해서 오해를 갖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습니다. 박정희 장군을 배후 조종자로 지목했으니까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급 장교들이 박정희 소장을 좋아한 이유는 그의 정직, 청렴성, 그리고 이해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혁명에는 250명의 장교와 3,500명의 사병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의 일념은 나라를 구하고 부패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부정축재를 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방관해온 정치인들입니다.
 
 우리는 혁명 이후 정부를 민간인들에게 이양할 것이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목적이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우리와 매그루더 사령관 사이에는 깊은
오해가 있습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