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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4) 美軍 방첩대 “서울 시민 60%가 쿠데타 지지”

淸山에 2011. 3. 17. 17:36

 

 
 
美軍 방첩대 “서울 시민 60%가 쿠데타 지지”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44)/ 美軍이 朴正熙의 좌익 경력에 대해 의심하자 이석제는 결백 증명을
위해 전국의 軍수사기관, 헌병, 경찰, 검찰에 ‘좌익 사상범 체포’ 명령을 내렸다.
趙甲濟   

 
 

 

 
 
 李翰林의 고민
 
 5월17일 아침,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조치를 취한다.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과 5명의 군단장 앞으로 친서를 보낸 것이다. 이 친서는 장도영 총장이 윤 대통령에게, “국군끼리의 유혈 사태를 걱정하시는 각하의 충정을 일선 부대장들은 모르고 있으니 직접 편지를
써주십시오”란 부탁을 하여 기초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당시 비서관들의 증언).
 
 17일 오후 윤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金楠(김남), 金準河(김준하), 尹承求(윤승구), 洪奎善(홍규선) 비서관은 여의도 비행장에서 육본비행대의 L─19 경비행기를 타고 일선으로 향했다. 김남, 김준하 비서관은 원주의 1군 비행장에 내렸다. 미리 연락을 받고 나온 이한림 중장에게 편지를 전했다.
 
 윤보선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한림 중장은 두 비서관에게 “혁명군 지휘자들의 정체를 알기나 하시오”라고 따지더라고 한다. 이 사령관은 또 “우리가 출동하면 유혈 사태 없이 일이 수습될 것이다”고 장담하더란 것이다.
이한림이 받아 읽은 윤 대통령의 친서 요지는 이러했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군의 不統一(불통일)로 對共(대공) 역량을 감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귀하는 무엇보다도
공산군의 남침 대비에 만전을 기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20년 친구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軍을 일거에 진압할 결심을 하고 있던 이한림 1군
사령관은 사실상의 진압 금지 명령이 담긴 대통령의 친서를 확인한 직후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의 방문을
받았다. 매그루더는 경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를
용납할 수 없다. 민주당 정부를 회복시키기 위한 진압 행동에 찬동한다”고 말했다.
 
 이한림은 그러나 ‘국무총리로부터 어떤 지시도 없는데다가 대통령의 친서 내용으로 보아 매그루더에게 확실한 내 의지를 표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매그루더에게 ‘잘 알았다’는 정도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돌아간 뒤 이한림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는 상황을 분석해 보았다.
 
 <이미 육본과 합참은 쿠데타軍과 공동 근무를 하고 있다. 崔慶祿(최경록) 2군 사령관도 李周一(이주일) 참모장과 박정희 부사령관이 혁명을 지휘하고 있는 마당에 내놓고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휘하의 1군에서도 6군단 포병단─朴林恒(박임항)의 5군단─채명신의 5사단─박춘식의 12사단은 쿠데타軍 편으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1군의 예비인 1군단을 동원하여 진압 작전을 벌이면 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이 好機(호기)를 포착하여 남침한다면 내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이 있다. 유엔군도 내란 중의 대한민국을 도울 처지가 못 될 것이다. 설사 진압에 성공하여 정권을 되찾아 민주당 정부에 돌려준다고 한들 파벌 싸움에 날이 새고 진 그들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진압에 성공한다면 또 다른 군정은 불가피할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군사 정권을 수립한다는 얘기인데 이는 내 철학과 맞지 않는다. 작전 지휘권을 가진
미 8군 사령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윤보선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는 길밖에 없다>
 
 이한림은 이날 저녁 국기 하강식에서 사령부 장병들 앞에서 이런 요지의 연설을 했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합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여러 장병들에게 알립니다>
 
 

 

 
 

 이한림이 훈시를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오는데 쿠데타軍의 요원인 윤태일 준장이 본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 장군 왜 왔소?”
 
 “혁명위원회로부터 제9사단장으로 보임받아 신고하러 왔습니다.”
 
 “신고는 무슨 신고야, 돌아가시오. 돌아가거든 박정희에게 말하시오.
 나는 박정희를 죽일 수 없다고. 대신에 내가 죽겠다고 전하시오.”
 
 이한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인데, 윤태일이 <5·16 혁명실기>에 남긴 증언은 다소 다르다. 윤태일이 혁명에 협조해 달라는 박정희의 부탁을 전하자 이한림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장면 정부 타도는 시기적으로 너무 빨랐다. 가장 방대한 병력을 가진 1군 사령관과 사전에 혁명을
의논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1군 병력은 군사 행동에 동원하지 않겠다.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의 반대도
있고 하니 9사단장 취임은 인정할 수 없다>
 
 비행기편으로 귀경한 윤태일이 박정희에게 사정을 보고하니 박정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윤 장군은 오늘
중으로 9사단에 부임하여 병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윤태일은 밤 10시 다시 양평을 향해 떠났다. 자정을 넘겨 18일 새벽에야 9사단 본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9사단이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는데 도착해 보니 분위기가 영 달랐다. 박영준 사단장
이하 참모들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윤태일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고
18일 오후 그는 박정희로부터 소환을 당해 육본으로 돌아갔다. 
 

 
 

 

 
 

  윤태일을 문전박대하여 보낸 직후 이한림은 박정희를 전화로 불렀다고 한다. 이한림은 ‘지나간 생도 시절
다정하게 지냈던 감정이 마음 한편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엉겁결에
“가족은 다 무사한가”라는 말이 나오더란 것이다.
 
 “무사하다.”
 
 “가족들 조심하라고 그래.”
 
 “알았어.”
 
 이 순간엔 다시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운 감정’으로 변했다고 한다.
 
 “네 쿠데타 나는 묵인한다.”
 
 “고맙다.”
 
 “나는 야전군의 일을 맡아 할 테니 그리 알아라. 너는 서울 쪽을 맡아하고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아라.”
 
 “그래 알았어.”
 
 박정희의 목소리는 썩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美軍 방첩대의 여론 조사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느냐, 아니면 매그루더의 미 8군과 이한림의 1군에 의해서 진압되느냐. 한국의 운명이 이처럼 기로에 서 있던 5월17일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에게 電文(전문)을 보낸다.
 
 <군사 쿠데타 배후 세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는 듯하다. 미 8군의 방첩대(CIC)가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을 상대로 조사해 본 바 열 명에 네 명꼴로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고, 두 명꼴로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네 명꼴로 반대하고 있었다. 장도영 총장은 이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의기소침한 상태라 행동을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윤보선 대통령과 白樂濬(백낙준)
참의원 의장은 진압군을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쿠데타의 기본 목적은 장면 정부의 제거 또는 내각제를 없애 버리자는 것으로 보인다. 反美(반미) 또는 親共(친공) 성향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번 쿠데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인데 그는 이승만 정부하에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데 협력했다. 그 이후로는 반공주의자란 평판을 얻었다. 쿠데타 세력 안에서 반미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장교들은 없는 것 같다.
 
 이한림 사령관의 충고에 따라서, 또 1군을 내 지휘권 안에 묶어둠으로써 모든 중립적인 부대들이 반란군 편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는 합헌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한다고 방송해 왔다. 나는 반란군의 지휘부에 대해서 본대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이는 반란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해병대는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나 6군단 포병단은 원위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 장도영은 계엄사령관의
직책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서울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한림 1군 사령관은 4개 사단을 출동 준비 태세로 대기시켜 놓고 있다. 이 부대들을 서울로 끌고 들어오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한림은 장면 총리가 명령하면 반란군을 진압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아마도 내 명령에도 복종할 것이다. 나는 장면 총리가 간밤에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오늘 아침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측근들과도 접촉해 보았는데 그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발 우리한테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무 응답도 없다.
 
 만약 장면 총리가 1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한다면 나는 그의 지시를 지지할 것이다. 그가
그런 지시를 내릴 때까지는 1군을 진압 목적을 위하여 내 편으로 묶어둘 작정이다. 나는 언제까지 1군을
우리 편으로 묶어둘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장면이 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그가 정권을
회복할 확률은 낮아진다.
 
 하나의 가능한 방법은 대통령, 참의원 의장, 국방장관, 육군 참모총장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내가 이한림에게 명령하여 1군으로써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한다 해도, 그리하여 정권이
회복된다 하더라도 그 정부를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태, 그리고 이미 국민들의 지지가 없어진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내 임무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 내부의 공산 세력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도 나의 한 임무이다. 그런데 쿠데타 세력은 前(전)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으나 공산당이 조종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나는 내 권한만을 이용하여 1군을 동원, 쿠데타軍을
진압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제기하는 바이다>
 
 매그루더의 이 전문은 많은 진실을 전해 주고 있다. 서울 시민 다수, 즉 약 60%가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1군을 붙들어 두는 것은 있을지도 모를 장면의 출현과 진압 명령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 장면의 진압 지시만 떨어지면 매그루더도 1군에 작전을 명령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는 그 자신의 권한만으로 진압을 시작하기엔 너무 무리가 따른다는 판단 등이다. 장면 총리의 은신이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 이 전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편 혁명군의 두뇌 역할을 맡은 金鍾泌(김종필)은 미리 준비했던 포고령을 차례로 발표하여 군사 정권의 힘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포고령 제5호는 ‘금융 기관의 인출은 1회에 10만 환 이하, 월간 50만 환까지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6호는 ‘물가를 16일 현재선으로 동결하고 매점매석 행위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했다. 7호는 ‘외국인의 재산 및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이었고, 8호는 ‘금융 동결령 가운데 군사비는 제외한다’는 것, 9호는 ‘통행금지 시간을 완화하여 17일부터는 밤 10시부터 다음날 5시까지로 한다’는 것,
10호는 ‘혁명완수상 필요하면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고 군사재판소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11호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지시였다.
 
 <법원과 검찰에 재직하는 공무원은 구태를 일소하고 혁명 정신에 입각하여 새롭고 正氣(정기)찬 사법 운영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모든 민형사 사건은 지체 없이 정상적인 법체제 아래에서 신속 공정히 처리하라.
대법원장과 법무부 장관은 위의 사항에 관한 實情(실정) 기강을 본관에게 제시하라>
 
 혁명군 본부가 된 육본 상황실에서 司法(사법) 기능을 통제하고 있던 이는 장교 시절 고시준비를 하여 법률에 밝은 이석제 중령이었다. 그는 미국 정보기관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적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석제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이런 상황에서 폭로되고 이용당하면 쿠데타는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석제는 이 미묘한 문제로 누구하고 상의도 할 수 없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닌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석제는 자신의 결심으로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의심 많은 미국 측에
보여줄 결백 증명을 생각하다가 ‘전국에 있는 좌익 사상범들을 체포하자’는 발상에 도달했다.
 
 그는 전국의 군 수사기관 헌병, 그리고 경찰, 검찰에 비상을 걸었다. ‘좌익 사상범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전국에 검거선풍이 불었다. 장면 정부 시절에 표면에 등장했던 좌익 세력뿐 아니라 혁신 정당 관련자들, 교원노조 관련자들, 전 보도 연맹원들(전향한 공산주의자 모임), 노조 지도자들 등 약 4000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었다. 진짜 좌익과 억울한 사람들이 뒤섞였다. 역사가 크게 굽이치는 상황에서는
개인은 힘없이 격류에 휘말려드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