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대리대사가 5월16일 오전 윤보선과 요담한 내용을 미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도 ‘윤 대통령은 국회의
내외를 망라한 거국 내각을 조직함으로써 이 쿠데타를 수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尹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는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김도연·윤보선은 같은 구파 출신인데 이들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해서 묵인하는 태도를 취한 이면엔 거국내각에 대한 기대 심리도 작용하지 않았나 추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야당은 군사혁명을 반대하지 않고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장면 정부의 비극은 쿠데타를 허용했다는 무능성에 덧붙여 민주 합헌 정권이란 이 정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지지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통령도, 야당도, 군인들도, 그리고 학생·시민들도 이 ‘국민의 정부’를 위해서 나서지 않았다. 법적인 정통성은 있었지만 도덕적인 정통성을 상실한 것이 장면 정부였던 것이다. 이때 청와대나 육본과는 지척의 거리에 있던 혜화동 로터리 부근 카르멜 수녀원 부속 건물 방에서 장면 총리 내외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장면 총리가 수도원에서 이한림 1군 사령관이나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진압을 명령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때 장면 총리의 시중을 들었던 심마리아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 총리가 바깥과 통화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고 한다. “그 분은 쿠데타軍과 자신의 명령으로 출동한 부대가 충돌하면 유혈 사태는 물론이고 북한괴뢰의 남침까지 야기시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신 것 같았습니다. 곁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저희들이 좁은 소견으로 ‘어서 군 부대에 연락을 하시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고개를 저으면서 괴로워하시더군요. 그분은 얼굴을 감싸며 여러 번 나직하게 천주님을 불러 보곤 했습니다. 곁에서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면 결연한 표정으로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절대로 서로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돼요’ 하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장면 총리는 장도영 총장을 지칭하면서 “그 사람이 그럴 수가…”라고 중얼거리고는 벽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도 했다. 수도원으로는 여러 군데서 장 총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카르멜 수녀원에선 “여기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면서 부인했다. 17일 아침 심마리아 수녀가 조반상을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장면 총리는 부석부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더라고 한다. 장 총리는 “괜히 저희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군요”라고 인사를 했다.
식탁 위에는 전날 저녁 음식이 그대로 있었다. 물 주전자만이 비워져 있었다. 심마리아 수녀의 눈에는
하룻밤 사이에 총리가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5월17일은 박정희에게 혼돈과 불안의 날이었다. 미군이 이한림의 1군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을 포위하는 작전을 곧 실시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미 1군단장 라이언 중장─강영훈 육사교장─그의 처남인 金雄洙(김웅수) 6군단장의 잦은 접촉, 8사단장 鄭剛(정강)의 출동 준비, 양평에 주둔하여 서울로 쉽게 들어올 수 있는 9사단장 朴榮俊(박영준) 준장에 대한 의심이 소수 병력으로 일대 모험을 감행하여 신경과민일 수밖에
없는 혁명군을 자극하였다. 박정희는 서울시경에 본부를 둔 서울지구 방어군사령부에 대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이와 함께 서울에 가장 가깝게 포진해 있던 1군 산하의 親(친)혁명군인 蔡命新(채명신)의 5사단을 포천에서 서울로 불러들이기로 하는 한편, 춘천 근교의 12사단장 朴春植(박춘식) 준장에게는 춘천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아울러 尹泰日(윤태일) 준장을 9사단장으로 임명하여 박영준을 교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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