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연재(43) 張勉 정부의 비극

淸山에 2011. 3. 17. 10:35

 

 
 
張勉 정부의 비극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43)/ 쿠데타를 허용했다는 무능성에 덧붙여 민주 합헌 정권이란
이 정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지지 세력이 없었다
趙甲濟   
 
 

 

 
 
 
 全斗煥 대위의 등장
 
 5월16일 육본에서 열린 혁명군─육본 합동회의에서 강영훈 육사 교장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나도 한마디 해도 됩니까”라고 했다. 장도영은 발언을 허용했다.
 
 “군의 한 간부로서 두 가지 당부를 하겠습니다. 첫째,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은 우리 국군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총리도, 국회도, 내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때 군 통수 계통이 무너져선 안 됩니다. 장도영 참모총장을 모시고 혁명을 한다니 다행입니다. 통수 계통이 무너지면 김일성이만 좋아합니다. 둘째로는 절대로
국군끼리 총격전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총 쏘고 대포 쏘면 우린 자멸입니다.”
 
 강영훈 중장은 그때까지도 6군단 포병단이 대포를 끌고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그런 호소를 했다. 姜 장군의 말이 끝나자 장내에서 박수가 터졌다. 꼭 혁명지지 발언을 한 것처럼 되었다.
 
 장도영 총장은 일어나더니 “이거, 나 대통령 각하를 다시 만나고 와야겠어”란 말을 남기고 바깥으로 휑하니 나가 버렸다. 장도영은 다시 청와대로 올라가서 윤보선을 만났다. 윤보선의 기억에 따르면
장도영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더란 것이다.
 
 “대통령 각하,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참모총장인 제가 계엄사령관을 맡아야 한다고 그 자리를 수락하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그래도 장 총장이 적격이라고 생각하오. 일단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락하고 봅시다. 군사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계엄사령관직을 맡게 되면 사후 수습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니
우선 다급한 불길부터 잡자면 장 총장이 맡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여겨지오.”
 
 
 
 

 

 
 

 장도영은 즉시 육본으로 돌아와서 혁명군 장교들 앞에서 자신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의 직책을 수락한다고 선언했다. 장교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강영훈 중장은 육사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박정희를
만난 김에 “사관 생도들은 정치에 개입시키지 말아주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육사로 돌아오니 김익권 준장이 건의했다.
 
 “생도들에게는 실탄은 없지만 총과 대검이 있습니다. 생도들이 들고 일어나 소란을 피울지 모르니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김 준장은 강 교장의 허락을 받아 총검을 회수하여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16일 오후 육본 정보참모부 북한과 소속 李相薰(이상훈·국방장관 역임) 대위는 亞洲課(아주과) 소속의 육사 11기 동기생 李東南(이동남) 대위와 함께 김종필을 찾아갔다. 이동남 대위는 육사 11기 동기회장이기도 했다. 김종필은 두 대위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육사에 가서 교장을 설득하여 생도들을 데리고 나와 혁명 지지 시위를 해주었으면 좋겠어.”
 
 5월17일 아침 육본의 이상훈·이동남 대위, 공수단의 11기 손운익 대위, 그리고 육사 12기 김광현 대위는 육본에서 만났다. 이들은 하루 전 김종필로부터 지시를 받은 대로 생도들을 설득하려고 육사를 향해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全斗煥(전두환) 대위가 나타났다. 서울대학교 학군단에 근무하던 全 대위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혁명이 났다는데 궁금해서 왔다. 우리가 뭘 해야 되는 것 아냐. 우리 뜻도 밝혀야 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더 늘어 다섯 대위가 태릉 육사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우연한 것 같은 전두환 대위의 등장과 육사行(행)은 그 19년 뒤 그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채우면서 집권하게 되는 인연의 출발점이 된다. 전두환 대위는 그때도 정치에 관심이 높고 친구도 많은데다가 활달하여 적성에
맞는 역할을 찾은 셈이었다. 이 다섯 대위는 육사에 도착하자 우선 교수부에서 교수 요원으로
근무하는 11기 동기생들을 찾아갔다. 11기 출신만 약 스무 명이 서울대학교에서
위탁 교육을 이수한 뒤에 교수 요원으로 있었다.
 
 
 

 

 
 

 이한림 중장은 4·19 때까지 3년 3개월 동안 육사 교장으로 있으면서 이 학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4년제 정규 육사 출신들은 이한림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상훈 대위가 보니 교수 요원들은 이미 이한림
1군 사령관에게 연락을 취하고 사람을 보내어 이 시기에 어떻게 행동하면 좋은지
지침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
 
 이상훈, 전두환 일행은 이런 동기생들을 설득했다. 동기생들 중 “박정희 장군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지”
하면서 혁명에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한림 장군으로부터 메시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동기생들도 있었다. 입담이 좋은 전두환 대위는
이런 동기생들에게 혁명을 지지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장교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돌려놓은 다음 이상훈, 전두환, 손운익, 이동남 대위 네 명은 강영훈 교장을
찾아갔다. 늦은 밤인데 姜 교장은 교장실에 머물고 있었다. 교장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린 이들은
‘생도들을 혁명 지지 시위에 내보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이들은 ‘혁명군’이란
완장을 차고 있었다. 강영훈 교장은 화를 냈다고 한다.
 
 “내가 왜 박정희 장군과 혁명위원회 지시를 받아야 하는가. 나는 참모총장 지시가 없는 한 그렇게 못 해.”
 
 강영훈 중장은 그 자리에서 차를 부르더니 경호차를 붙여 가지고 육본으로 떠났다. 강영훈은 ‘박 장군과 장 총장에게 생도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외부에서 장교들이 들어와서 이렇게 선동하고 다니니 다시 이야기를 해두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이상훈 대위는 육본으로 전화를 걸어 김종필에게
“강영훈 교장이 거기로 갔다”고 알렸다. 김종필은 “알았어. 너희들은 오늘밤 그곳에 머물고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생도들을 데리고 나와야 돼”라고 지시했다.
 
 
 

 

 
 

 강영훈 교장이 육본에 도착하여 총장실로 가니 장도영과 박정희가 앉아 있었다. 강영훈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때 한 장교가 들어오더니 박정희 소장을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박정희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해 있었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강영훈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강 장군한테 들은 이야기와 지금 다른 장교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영 다릅니다.”
 
 그러더니 휙 나가 버렸다. 뒤이어 5개 대대병력으로 육본을 점령했던 문재준 6군단 포병단장이 들어왔다.
文 대령은 “지금 분위기가 이상하니 학교로 돌아가시지요”라면서 정중히 姜 장군을 모시고 나갔다. 두 사람이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는데 무장한 세 공수단 대위가 달려오더니 문재준의 권총을 빼앗고 반항하는
그에게 사정없이 발길질을 가해 꿇어앉혔다.
 
어리둥절한 강영훈 교장 앞에 박창암 대령이 나타났다.
朴 대령은 “이리로 오십시오”라고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박창암은
“개인적으로는 강 장군을 존경하지만 공무수행상 어쩔 수 없습니다”라면서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강영훈은 연금된 것이다.
 
 수녀원의 張勉
 
 5월16일 김종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포고령 문안들을 하나씩 뽑아내 KBS를 통해서 잇달아 발표하고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 겸 계엄사령관 장도영 중장 이름으로 된 것들이었다.
포고령 4호는 그 내용이 무시무시했다.
 
 <(1)군사혁명위원회는 5월16일 상오 7시 장면 정부로부터 모든 정권을 인수했다.
(2)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회를 16일 하오 8시를 기하여 해산한다. 단, 사무처 직원은 존속한다.
(3)일체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정치 활동을 엄금한다. (4)현 국무위원과 정무위원을 전원 체포한다.
(5)국가기구의 일체 기능은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이를 정상적으로 집행한다.
(6)모든 기관과 시설의 운영은 정상화하고 여하한 폭력행위도 이를 엄금한다>
 
 
 

 

 
 

 16일 밤 윤보선 대통령은 장도영 총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對民(대민) 방송을 녹음한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나라는 지금 중대한 시국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막는 힘에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장 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중대한 사태를 성의 있게, 합법적으로 처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국무회의에 출석하는 국무위원의
신변은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방송이 KBS를 통해서 나가자 은신 중이던 朱耀翰(주요한) 부흥부 장관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맨 먼저 전화를 걸어 왔다고 한다.
 
 “사태 수습을 위하여 청와대로 오라면 가겠으나 신변의 안전을 무엇으로 보장하시겠습니까.”
 
 “장도영 계엄사령관을 통해서 직접 확약을 받았으니 그리 알고 협력해 주시오.”
 
 “우리는 그 정도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장도영에게 직접 신변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방송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당수는 장면과 총리 경합을 벌였다가 떨어지자 分黨(분당)했던 민주당 구파 출신 金度演(김도연)이었다.
그의 회고록 《나의 인생 백서》에는 이런 요지의 기록이 있다.
 
 <그날(5월16일) 밤 10시 반경 윤보선 대통령의 방송을 듣고 나는 우리 신민당의 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부심하다가 17일 오후 당의 주요 간부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熟議(숙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장면 정권은 하루바삐 사태 수습을 위하여 국민 앞에 나와서 사과하고 물러날 것이며 군사혁명위원회에
 대하여 거국 내각을 조직하자고 제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린 대리대사가 5월16일 오전 윤보선과 요담한 내용을 미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도 ‘윤 대통령은 국회의
내외를 망라한 거국 내각을 조직함으로써 이 쿠데타를 수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尹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는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김도연·윤보선은 같은 구파 출신인데 이들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해서 묵인하는 태도를 취한 이면엔 거국내각에 대한 기대 심리도 작용하지 않았나 추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야당은 군사혁명을 반대하지 않고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장면 정부의 비극은 쿠데타를 허용했다는 무능성에 덧붙여 민주 합헌 정권이란 이 정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지지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통령도, 야당도, 군인들도, 그리고 학생·시민들도 이 ‘국민의 정부’를 위해서 나서지 않았다. 법적인 정통성은 있었지만 도덕적인 정통성을 상실한 것이 장면 정부였던 것이다.
 
 이때 청와대나 육본과는 지척의 거리에 있던 혜화동 로터리 부근 카르멜 수녀원 부속 건물 방에서 장면 총리 내외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장면 총리가 수도원에서 이한림 1군 사령관이나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진압을 명령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때 장면 총리의 시중을 들었던 심마리아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 총리가 바깥과 통화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고 한다.
 
 “그 분은 쿠데타軍과 자신의 명령으로 출동한 부대가 충돌하면 유혈 사태는 물론이고 북한괴뢰의 남침까지 야기시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신 것 같았습니다. 곁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저희들이 좁은 소견으로 ‘어서 군 부대에 연락을 하시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고개를 저으면서 괴로워하시더군요. 그분은 얼굴을 감싸며 여러 번 나직하게 천주님을 불러 보곤 했습니다. 곁에서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면 결연한 표정으로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절대로 서로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돼요’ 하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장면 총리는 장도영 총장을 지칭하면서 “그 사람이 그럴 수가…”라고 중얼거리고는 벽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도 했다. 수도원으로는 여러 군데서 장 총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카르멜 수녀원에선 “여기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면서 부인했다.
 
 17일 아침 심마리아 수녀가 조반상을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장면 총리는 부석부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더라고 한다. 장 총리는 “괜히 저희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군요”라고 인사를 했다.
 
식탁 위에는 전날 저녁 음식이 그대로 있었다. 물 주전자만이 비워져 있었다. 심마리아 수녀의 눈에는
하룻밤 사이에 총리가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5월17일은 박정희에게 혼돈과 불안의 날이었다. 미군이 이한림의 1군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을 포위하는 작전을 곧 실시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미 1군단장 라이언 중장─강영훈 육사교장─그의 처남인 金雄洙(김웅수) 6군단장의 잦은 접촉, 8사단장 鄭剛(정강)의 출동 준비, 양평에 주둔하여 서울로 쉽게 들어올 수 있는 9사단장 朴榮俊(박영준) 준장에 대한 의심이 소수 병력으로 일대 모험을 감행하여 신경과민일 수밖에
없는 혁명군을 자극하였다.
 
 박정희는 서울시경에 본부를 둔 서울지구 방어군사령부에 대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이와 함께 서울에 가장 가깝게 포진해 있던 1군 산하의 親(친)혁명군인 蔡命新(채명신)의 5사단을 포천에서 서울로 불러들이기로 하는 한편, 춘천 근교의 12사단장 朴春植(박춘식) 준장에게는 춘천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아울러 尹泰日(윤태일) 준장을 9사단장으로 임명하여 박영준을 교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