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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0) 尹潽善 대통령, “올 것이 왔구나”

淸山에 2011. 3. 12. 12:11
 

 

 
 
尹潽善 대통령, “올 것이 왔구나”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40)/ 朴正熙는 대통령의 지지 성명을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으나
윤보선이 적극적으로 이 혁명을 진압할 의사가 없음도 확인했다. 
趙甲濟   

 

 

 
 
 軍 수뇌부 청와대로
 
 5월16일 오전 8시30분부터 육본 2층 상황실에선 박정희 측 장교들 50여 명과 장도영 총장 측 참모들
사이에 합동회의가 열렸다. 박정희는 먼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출동할 때는 유서를 쓰고 손톱까지 깎아 놓았습니다. 참모총장을 비롯한 여러분께서도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출하기 위한 우리들의 뜻을 받아들여 혁명 완수에 다함께 동참합시다.”
 
 장도영 총장은 “이번 행동으로 행정부에 충분한 경고를 주었으니 출동 부대들은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 장교들이 들고 일어났다. 책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 장교들도 있었다. 이미 거기엔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다. 중령이 중장을 윽박지르는 꼴이었다.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계엄령 선포에 대해선 동의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장도영은 “그 문제는 윤보선 대통령과 상의하여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합시다”라고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5·16 혁명실기>).
 
 “혁명 자체가 非法的(비법적)인 수단인데 무슨 합법적인 절차를 밟는다는 말입니까?”
 
 장도영 총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혁명파 장교들이 들고 일어났다.
 
 “처치하자.”
 
 “잡아넣어라.”
 
 6군단 포병단의 대대장 白泰夏(백태하) 중령이 권총을 뽑아들고 장도영의 앞을 막았다.
 
 “나가지 못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즉시 태도를 결정하십시오.”
 
 박정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무질서해 가지고 어떻게 혁명을 하려고 그래!”
 
 박정희가 호위하듯이 장도영을 모시고 총장실로 걸어갔다. 문재준 대령은 “총장이 각하를 납치한다”고
 소리치면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빨리 육본을 포위하라.”

 
 

 

 
 
 
 총장실로 들어간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여보,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무슨 혁명이오?”라고 했다.
이때 박정희를 따라 들어온 이석제 중령이 나섰다. 그는 역사와 법률에 밝은 장교였다.
 
 “각하, 끝내 이 혁명을 반대하신다면 훗날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장군으로 역사적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장면 정부는 조선조의 양반들처럼 주자학에 젖어 공리공론으로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미 혁명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장면 총리는 행방불명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입니다.
혁명군이 혼란을 수습해야 합니다.”
 
 “귀관의 생각처럼 문제가 간단하지 않네. 혁명군은 작전 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자존심을 무시했어.”
 
 장도영은 전혀 납득하지 않았다. 격앙된 이석제는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 둔 권총에 손이 자꾸 가는
것을 참느라고 애를 썼다. 장도영이 계엄령 선포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사이 이날 아침 9시 KBS는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 명의로 된 계엄선포문과 포고문 1호를 방송했다. 포고문을 15호까지 작성하여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김종필이 첫 봉투를 개봉한 것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공공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기 4294년 5월16일 오전 9시 현재로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실시한다. 일체의 옥내외 집회를 금한다. 국외 여행을 금한다. 언론은 사전 검열을 실시한다.
직장 포기와 태업을 금한다. 유언비어 날조, 유포를 금한다. 이상의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극형에 처한다.
 
 계엄사령관 장도영>
 
 이 방송이 나간 뒤 한 30분이 흘렀을까, 박정희가 총장실에서 나오더니 혁명파 장교들에게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서 재가를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김재춘과 유원식을 데리고 지프에 올랐다. 장도영 총장은 각 군 참모총장들과 함께 떠났다.
 
 현석호 국방장관은 이때 서울시청 시장실 비서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공수단은 새벽에 현석호 장관과 韓通淑(한통숙) 체신부 장관을 붙들어 지금의 프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체육회 건물 앞에 세워 두게 했었다. 장도영 총장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 박치옥 공수단장에게 “시청 안으로 모셔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장도영 총장은 청와대로 올라가면서 박치옥 단장을 다시 찾아왔다.

 
 

 

 
 
 
 <장도영 총장은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러 가야겠는데 현석호 장관을 모시고 갈 수
없겠소. 일이 끝나면 다시 보내드리겠소”라며 부탁조로 이야기했다. 혁명의 성공은 장 총장의 위세를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다. 이런 것이 혁명이기도 하다. 미안한 심정이었던 나는 선선히 응했다>
(박치옥 手記)
 
 박치옥은 수개월 전 장도영을 찾아가서 부탁을 해서 공수단장에 임명된 경우이다. 오전 10시30분쯤 청와대에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그리고 박정희 소장이 모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새벽에 장도영의 급보를 받고 일어나선 장면 총리를 찾았으나 연락이 닿질 않았다. 내각책임제하에서 국군통수권은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에게
있었으나 실제로 일상적인 지휘는 장관─총장을 통해서 총리가 하고 있었다.
 
 그 국무총리가 달아나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전혀 준비 없이 국군통수권을 행사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두 달 전에도 장면 총리에게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해서라도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권했던 그로서는 ‘일은 자기들이 벌여놓고 수습은 내가 하게 생겼다’는
심정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접견실과 붙은 대기실에 들어갈 때까지 권총을 차고 있었다. 비서가 “권총을 풀고 들어가시지요”라고 하니 박정희는 흠칫 했다.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던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박정희가 순간적으로 권총과 떨어지는 데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아직 혁명의 성공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그가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차가운 총구였던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나와 접견실로 들어가 줄을 서 있던 군 수뇌부 인사들로부터 경례를 받았다.
그때 윤 대통령의 입에서 무심코 새나온 말이 “올 것이 왔구나”였다. 윤보선은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그 뜻이 ‘온다던 것이 왔구나’였다고 해명했다. 혁명을 지지한다는 말이 아니고
‘달갑지 않은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구나’ 하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尹潽善 대통령
 
 5월16일 청와대 접견실에서 윤보선 대통령에게 맨 먼저 보고를 한 사람은 장도영 총장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그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간밤에 보고 드린 대로 서울 근교에 주둔하는 부대와 일부 전방 부대가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습니다.”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각하, 저희들은 각하를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몸으로서 오직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 일념에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국방부, 육본과 방송국을 위시해서 서울 전역이 지금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와 있고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결행을 지지해 주시고 계엄을 추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보선은 初對面(초대면)의 박정희를 ‘말투가 차분하고 가라앉아 있었다’고 나중에 평했다.
박정희의 말을 듣고도 한참 침묵을 지키던 윤보선은 입을 뗐다.
 
 “그대들이 만일 애국하기 위해서 혁명을 했다면 애국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소. 나로서는 아직 그대들의 충성을 액면 그대로 이해할 수 없소.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물론 우리 정치하는 사람에게 크다고
보지만 이왕 계엄이 선포되었다고 하니 그대들의 말이 곧 법이요, 생사가 그대들 말 한마디로 결정될
것이 명백하오. 진정 애국에서 나온 거사라면 절대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계엄을 이미 선포하였다니 내가 추인할 수는 없소.”
 
 박정희는 거듭 계엄의 추인을 요청했으나 대통령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도영의 기억에 따르면, 이때 현석호 국방장관이 ‘윤보선 대통령의 발언은 군의 불법 행동에 대한 단호한 반대 표시로는 불충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윤 대통령은 ‘이런 사태를 초래한 현 정부의 책임’을 들어서
반격하더라는 것이다. 장도영, 박정희 일행은 접견실에서 나왔다.
 
 

 

 
 
 
 잠시 후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이 돌아와서 다시 윤 대통령을 만났다. 박정희는 다시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고, 유원식은 “저희들은 이 혁명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박정희는 “이번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윤보선은 화가 났다.
 
 “내 신조로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는 데 반대하오. 그리고 당신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대들을 지지하여 책임을 질 수 있겠소. 내가 당장 지지 성명을 낸다면 국민들은 내가 혁명군과 내통했다고 생각하든지 위협을 받아서 성명을 낸 것이라고 추단할 것이니 나로서는 이 일을 방조할 수 없소.”
 
 윤보선은 이어서 “나는 당신네들이 서울을 점령한 이상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소. 나는 곧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극구 만류했다.
 
 “대통령께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계속 집무하시면서 사태를 원활히 수습해 주십시오.”
 
 “여하튼 쿠데타가 난 이상 나는 대통령에 더 머물고 싶지 않으니 당신들에게 통고하는 것이오.”
 
 박정희는 대통령의 지지 성명을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으나 윤보선이 적극적으로 이 혁명을 진압할 의사가
없음도 확인했다. 청와대를 나온 박정희는 김재춘의 지프에 오르자 유원식 대령에게 한마디 하더란 것이다.
 
 “자네는 왜 앞서서 함부로 말하고 그래.”
 
 김재춘은 접견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정희는 접견실로 들어가기 전에 현석호 국방장관이 장도영 총장과 함께 나타난 것을 보고는 김재춘에게
이런 귀엣말을 했던 것이다.
 
 “왜 현석호를 풀어주었나. 박치옥이한테 전화해 봐.”
 
 김재춘이 바깥에 남아서 박치옥 대령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박 장군이 화났어. 왜 연금된 현석호 장관을 풀어주었나.”
 
 “참모총장이 와서 데려간다는데 어떻게 막나. 너 이상한 소리 하는구나.”
 
 
 
 

 

 
 

 육본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박정희는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김재춘에게 들려 주었다. 윤보선 대통령이 혁명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이야기하더란 것이다. 박정희는 청와대로 올라올 때보다 훨씬 자신 있는
 태도였다. 이날 오전 박정희는 시청 앞에 나타나 시민들과 언론에 처음으로 노출되었다.
 
 유명해진 사진, 즉 양쪽에 박종규 소령, 車智澈(차지철) 대위, 李洛善(이낙선) 소령을 데리고 서 있는 박정희의 모습은 이때 조선일보 사진부 鄭範泰(정범태) 기자가 찍은 것이다. 정범태는 “박정희는 차갑고 무뚝뚝했다. ‘저런 사람이니까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결연한 모습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날 박정희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다. 李正熙(이정희)는 당시 스물네 살의 대학 청강생이었다. 종로5가에 살고 있던 그는 혁명 방송을 듣고 흥분을 감출 수 없어 무작정 시청 앞으로 뛰어갔다. 박정희의 모습을 보고 그는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북 경주에 살고 있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저와 이름이 같아서 그때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전투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어요. 바지에 줄이 칼날처럼 섰는데 무릎 부분에서만 풀어져 있었습니다.
작업복과 군화가 오래된 것이어서 ‘장군이 뭐 저런 옷을 입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지휘봉을 손에 잡고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입을 꽉 다물고 한마디 말도 없이 바위처럼 서 있더군요. 저는 일부러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검은 안경을 낀 박정희의 눈 흰자위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갑자기 안도가 되는
거예요. ‘이제 됐다, 이제 사회가 안정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왔습니다.”
 
 오전 11시쯤 박정희 일행이 청와대를 떠난 직후 이번에는 마셜 그린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매그루더 주한
 미군 사령관이 윤보선 대통령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미국 정부에 이 사태를 보고했고 확실한 훈령을 받은
것은 없으나 합헌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것과 혁명군의 원대 복귀를 종용하는 성명을 막 발표하고
오는 길이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