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세가 김종필을 따라 바깥으로 나오니 별을 단 장성들이 여러 명 서 있었다.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나 박정희라고 하오”라고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 바쁜 상황에서도 박정희는 박종세에게
군사혁명의 필연성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을 한 뒤 혁명공약이 적힌 전단을 건네주었다.
박정희 일행은 박종세를 앞세워 2층 主방송실로 올라갔다. 박종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저 혼자서는 방송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거짓말 말어. 썩었구나 이놈도. 너 따윈 죽여 버려야 돼.” 한 공수단 장교가 철거덕 권총을 장전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한웅진 준장이 “자넨 참아”라고 말리고는 “지금 다섯 명이나 되는데도 더 있어야 한단 말이오”라고 했다. 방송기계를 다룰 줄 아는 엔지니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공수단원들에게 이끌려 기술직원들이 나타났다. 이윽고 主조정실에 빨간불, 파란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웅진은 “형님, 직접 방송하십시오”라고 권했다. 한웅진은 간밤 차중에서 “방송이라도 하고 죽읍시다”라고 농담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박정희는 예의 그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행진곡이 울리고 박종세가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今朝未明(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反共(반공)을 國是(국시)의 제1義(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舊惡(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淸新(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各人(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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