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생각한 제2안이란 출동한 부대로써 일정한 지역을 점거하고는 정부와 담판한다는 것이었다. 한웅진은 “박 장군은 총격전이 오고가는 상황에서 난간을 잡고 물끄러미 강물을 내려다보더니 일본말로 ‘주사위는 던져졌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한웅진은 “형님, 그때 강물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가족들 얼굴이 강물에 떠오르더군”이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 순간 박정희의 결연한 태도가 흔들리는 장교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는 증언은 많다. 예기치 않은 저항을 받은 혁명군 장교들 모두가 박정희를 주시하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 주는 행동을 보였다. 결정적 순간의 이런 결정적 행동이 그 뒤 18년간 단 한 번도 정면도전을 받지 않은 그의 지도력과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張勉 총리의 수도원行 한강 인도교를 저지하던 트럭 바리케이드가 최종적으로 뚫린 것은 5월16일 오전 4시15분경이었다. 카빈으로만 무장한 헌병 50명을 지휘하고 있던 김석률 대위는 서울방첩대에 위치하고 있던 장도영 총장에게 수시로 보고를 올렸다. 장도영은 ‘가능한 한 渡江(도강)을 저지할 것이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한강의 북쪽 언덕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김 대위는 한강인도교 북단, 즉 용산 쪽의 저지선에서 철수한 뒤 장도영에게
“해병대에 이어 공수단도 다리를 건너 육본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장도영은 이때 비로소 張勉(장면) 총리와 尹潽善(윤보선)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피신을 권한다. 장면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맨 처음 장도영의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2시쯤이었다. 장면은 반도호텔 809호실을 숙소로 쓰고 있었다. 옆방인 808호실은 경호실이었다. 경호대장 趙仁元(조인원) 경감이 총리를 깨워 장도영의 전화를 바꾸어 주었다. ‘30사단에서 장난을 치려는 것을 막아 놓았고 해병대와 공수부대를 한강에서 저지시키고 있다’는 요지의 보고였다고 한다. 장도영은 “아무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한 주일 전에 내가 말한 그것 아닌가.” “아니, 별것 아닙니다. 염려 마시고 제게 맡겨두십시오.” “염려 말라는 말만 하지 말고 내게 와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해. 매그루더 사령관에게도 보고했나?” “예, 했습니다.” “그래, 좀 왔다 가게.” “예,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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