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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의 氣와 理, 또는 野性과 知性

淸山에 2016. 5. 31.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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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의 氣와 理, 또는 野性과 知性

몽골 草原 역사 紀行(14)야성을 주로 하여 고구려(高句麗)같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지성을 주로 하여 조선(朝鮮)과 같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반반씩 섞어 신라(新羅)같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

趙甲濟   
      

  
기자는 몇 년 전부터 이상한 체험을 하고 있다. 해외취재를 끝내고 돌아올 때는 거의 국적선 여객기를 타게 된다. 옛날에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벌써 집에 다 온 것 같아 마음이 편했는데 요즈음 불안한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 신문을 펼치기가 겁이 나는 것이다. 십중팔구 거기에는 누가 구속되었느니 누가 돈을 먹었느니 누가 무슨 폭로를 했느니 하는, 외국에서는 잠시 잊었던 겁주는 기사가 실려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인간의 나쁜 본능을 선동하고 악취미를 조장하는 것 같은 기사를 대하면 귀국행 비행기가 좀 늦게라도 이륙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놀랍게도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신문의 1면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비롯하여 주로 사(士)자 계급에 속하는 엘리트들이다. 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지면을 만드는 데 합작한다면 한번 나간 한국 기업과 자본은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기 싫은 조국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몽골-투르크族 가운데 한국인은 가장 먼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종족일 것이다.


부족국가 형태를 가장 먼저 정리하고 관료제도와 상비군과 권력승계 규범을 가진 고대국가를 건설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많은 몽골-투르크族이 17세기까지도 부족국가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4세기경에 벌써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된 한국은 제일 먼저 유목민족이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한 축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한자, 불교, 유교같은 아시아의 고급문화를 서기 4세기경부터 받아들였으니 한국은 유목 민족이 지금까지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권력 승계의 제도화라는 문제를 일찍 정리한 셈이 된다.




은근과 끈기, 신바람


몽골-투르크 문화권에서 한국과 일본 민족처럼 성공적으로 농경화한 민족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유목민족은 말에서 내리고 草原을 떠나고 양떼를 멀리한 즉시 지식과 인구수에서 압도적인 농경민족에 흡수당해 버리는 것이 공식처럼 되어 있었다. 한국인의 이런 성공적인 變身과 적응은 무엇에 연유하는가에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제도와 양식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문화와 정치와 권력을 담는 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댐이 없으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흘려보내고 마는 것처럼 제도가 없으면 지도자나 세력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국가도 권력도 정치도 바람처럼 날아가 버린다. 모래와 자갈이 제도화되면 콘크리트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인이 피, 머리, 심장 속에 지니고 있는 역사적 경험의 축적은 몽골族으로서의 폭발력과 파괴력, 그리고 순발력이며 농경-유교-산업-민주 문화권으로서의 질서와 도덕 규범, 그리고 지속성인 것이다. 신바람과 끈기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다같이 한국인의 특성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요사이 한국인의 특징이 한때 은근과 끈기였다는 데 의아해한다. 만사를 빨리빨리 조급하게 처리하기로 유명한 한국인이 언제 은근한 적이 있었느냐는 얘기이다. 지금 한국인의 민족성은 신바람이 되었다. 신바람의 연원은 한국인의 종족적 특징인 몽골族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광복과 해방 이후 한국이 해양문화권으로 편입된 이후 유교의 영향이 약화되면서 끈기와 은근은 쇠퇴하고 유교에 눌려 있던 야성의 몽골적 기질이 분출해 나오면서 신바람 같은 야성이 겉으로 나왔다. 19세기의 한국인에게 한국인의 민족성이 신바람이라고 말하면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 실록(實錄)을 만들었던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는 안으로 들어간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야성과 지성, 氣와 理


한국의 지금은 야성의 시대이지 지성의 시대는 아니다. 몽골적 야성과 유교적 지성이 민족성의 2대 기조(基調)라는 시각은 한국인에게 하나의 화두를 제공한다. 야성과 지성을 어떤 비율로 섞을 것인가 하는 궁합의 문제가 그것이다. 야성을 주로 하여 고구려(高句麗)같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지성을 주로 하여 조선(朝鮮)과 같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반반씩 섞어 신라(新羅)같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한국인의 민족성을 규정하는 2대 기본 반찬을 어떻게 섞을 것인가 하는 것은 시대정신이 결정할 것이고 시대정신은 그 시대의 엘리트가 대중의 힘과 세계의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느야 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계가 된다고 하겠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형효(金炯孝) 교수는 몽골=야성을 氣로, 동사로, 유교=지성을 理로, 명사로 상징한 적이 있다. 한 국가나 인간을 움직이는 요소로서 힘, 정열, 추진력, 군사력, 경제력, 상무정신, 오기, 개척정신, 모험정신, 단결심, 종교적 응집력 같은 것은 몽골=야성=氣에 해당하며 논리, 이성, 법률, 제도, 과학, 학문, 분석력 같은 것은 유교=이성=理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점보기에 비유한다면 동체와 엔진과 연료는 氣에, 조종실의 각종 항법장치와 자동조종장치 및 나침반은 理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슴과 근육은 氣이고 머리는 이성인 것이다. 한국인의 한 단점은 이 2大 요소를 배합하는 기술이 서툴다는 데 있다. 균형감각이 부족한지 극단적 배합을 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 주자학(朱子學)을 도입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을 중국보다도 더 교조화해 버리니 과부 개가(改嫁)금지 같은 위선적인 도덕률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신바람은 무질서로, 도덕률의 통제를 받지 않는 천박한 힘으로 전락한다. 동사만 쓰는 대화는 활기에 넘치겠지만 살벌할 것이고 명사만 쓰는 대화는 각박할 것이다. 동사는 명사의 통제를 받고 명사는 동사를 엔진으로 삼을 때 언어에 질서가 생기는 것처럼 氣와 理를 균형 있게 섞어야 몸이나 나라가 편해진다. 이것은 중용(中庸)의 문제이다. 중용은 기하학적인 중간이 아니다. 어중간한 타협도 아니다. 中正이다.


주체성과 균형감각에 입각하여 중심을 잡고 서는 것이다. 자신의 주체적 판단을 기준으로 삼고서 그 상황이 요구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용이다. 朴正熙가 좋은 예이다. 그는 국가근대화를 목표로 세워놓고서 동원이 가능한 자원을 自由自在로 활용한 사람이다. 일본의 국가주의, 유교의 실용적 측면, 미국의 조직경영, 사회주의의 통제 기술까지도 참고로 하고 빌어와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국가 근대화에 도움이 된다면 악마하고도 거래를 할 사람이었다. 자신의 敵으로부터도 배울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존심의 소유자라는 이야기이다. 




유교적 실용주의의 재발견


한국 민족성을 형성하는 수직 단층 구조에 있어서 표층(表層)인 朱子學的 질서를 깨부수고 그 밑에서 잠자고 있던 몽골的 야성을 깨워서 불러낸 사람은 유교적 문화권에서 자란 朴正熙였다. 그는 이조적(李朝的), 명분론적, 주자학적, 위선적, 문약한, 사대적 한국의 정치이념을 前근대적 요소로 규정했다. 이런 수구(守舊) 세력을 정리하는 것이 국가 근대화라고 정의하면서 한민당 계열의 地主 명망가 출신 정치인들을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 모든 혁명은 사회적 신분 계층의 변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朴正熙는 李朝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의식이 한국인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바탕에서 이것을 상공농사(商工農士)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실천했다. 당시의 경제관료들은 공업이 상업, 즉 무역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으나 朴正熙는 『아무리 물건을 만들어도 팔지 못하면 무엇하냐』면서 무역이 가장 중요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 소신을 수출 드라이브로 구현했다.


농경사회의 이념, 질서, 문화를 반영하는 선비(士)와 농업을 낮추어 보는 대신, 또 정착사회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공업보다도 유목, 해양문화와 더 親和力이 강한 무역을 강조한 것은 朴正熙의 진정한 혁명성을 상징한다. 유교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자신도 실천할 수 없는 도덕률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을 무기로 삼아 남을 괴롭히는 관념적이고 위선적인 유교, 중용을 바탕으로 하여 근면·겸손·성실·실천을 중요시하는 실용적 유교. 前者가 근대화의 저해요인이었다면 後者는 동아시아 근대화의 실천 이념으로서 지금 세계 정치 사상계의 큰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실용적 유교가 서구화와는 다른 길로서의 근대화 방법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근대화는 시장경제, 개인주의,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종래의 서구적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가족중심, 정부 개입 경제, 권위주의 방식의 근대화가 서구학자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골칫거리를 제공한 사람 중에 첫 손가락에 꼽히는 지도자가 朴正熙, 이광요(李光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