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32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광개토대왕비'를 처음 발견한 자들은 조선의 심마니였다. 허우범역사 기행 전문가E-mail : appolo21@hanmail.net 1961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국문과와 동 교육대학원 석.. 입력 : 2014.05.25 18:11 | 수정 : 2014.05.26 14:24
"광개토대왕비 건립 1600주년 역사관 확립 계기 마련해야" <안서1>
가욕관을 빠져나와 다시 서쪽으로 향한 감신공로(甘新公路)를 탄다. 길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른다. 먼지 때문인가? 하늘이 온통 뿌옇다. 하늘과 땅의 색이 거의 같아 지평선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된다. 아지랑이 춤추는 도로에서 순간 몽롱함을 느낀다. 내가 탄 자동차가 마치 한 장의 화지 위에 붓이 되어 흘러감을 느낀다. 어디로 가는가? 길은 맞는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좌종당 얼마를 달렸을까. 눈을 뜨니 울창한 버드나무가 보인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뗀 사이에 버드나무 가로수가 나타나다니, 마치 사막 속에서 무릉도원을 만난 느낌이다. 이 버드나무는 일명 좌공류(左公柳)라고 부르는데,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 좌종당(左宗棠)이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주천공원의 우물에 있던 커다란 버드나무도 좌공류였다. 당시 좌공류는 삼천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나며 훼손되어 지금은 가욕관에서 신강성에 이르는 길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다.
하서주랑에서 볼 수 있는 좌공류 하서주랑에서 볼 수 있는 좌공류 좌종당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사람이다. 그는 나무심기를 좋아했는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금의 신강으로 향할 때, 이곳 하서주랑을 지나게 되었고 군사들에게 명령해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나무를 심고 나면 그뿐,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다. 귀찮고 이득 없는 일을 굳이 나서서 할 일이 무엇인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좌종당이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펴보니 당나귀가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좌종당은 즉시 당나귀를 잡아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고루 앞에서 목을 잘라버렸다. 그러고 나서 선포하였다.
“만약 또다시 나무를 상하게 하는 당나귀가 있다면 주인까지도 똑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그 후로는 버드나무를 훼손하지 않아 오늘의 멋진 풍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좌종당과 동향 친구인 양창준(楊昌浚)은 좌종당의 업적을 찬양하는 헌시(左公柳)를 지었다.
장군은 변경에서 돌아올 기약 없고大將籌边尙未还 고향의 식구들만 천산에 가득하네湖湘子弟滿天山. 새로 심은 버드나무 삼천리 길이新栽楊柳三千里 봄바람에 이끌고 옥문관에 이르네引得春風度玉關.
좌종당, ‘광개토대왕비’ 세상에 알리다 좌종당은 청나라 정치가이지만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인 1770년,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고, 정조 때인 1782년에 석학 이만운(李萬運)이 9년에 걸쳐 보완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지었다. 이곳에 보면 광개토대왕의 비문 발견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좌종당 초상 좌종당 초상 “성경성(盛京省) 회인현(懷仁縣) 통구(通溝) 등지는 바로 서간도의 경내이다. 그 땅이 압록강 오른쪽 언덕을 베고 있는데, 구련성(九連城)과의 거리가 150리다. 지금부터 300년 전에 한 비(碑)가 산골짜기 가운데서 발견되었는데, 고종 19년(1882년)에 청나라 성경장군(盛京將軍) 좌종당(左宗棠)이 비로소 사람을 사서 발굴하니, 바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문(碑文)이었다. 비의 높이가 1장(丈) 8척이고, 남북 양쪽 면은 5척 6, 7촌, 동서는 4척 4, 5촌인데, 4면에 글자를 새겼다. 남쪽 면은 11행, 서쪽 면은 10행, 북쪽 면은 13행, 동쪽 면은 9행인데, 줄마다 41자(字)로 합계 43행 1,759자이다. 그 글이 심히 간결하면서도 고아(古雅)하여 동국 사기(史記)의 빠진 글을 보충하였는데, 황초령정계비문(黃草嶺定界碑文)과 함께 이 비의 전문을 수록하여 참고자료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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