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서구화-유목문화의 패배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 일행은 독일의 오토만 투르크 전문가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독일과 지금 터키와의 관계는 오토만 시절까지 거슬러 오른다고 했다. 오토만 투르크는 西歐의 先進 문물을, 주로 독일을 모델로 하여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때는 동맹국 사이였기에 터키 사람들의 취업도 용이했었다는 것이다. 독일에는 약 200만 명의 터키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3D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新나치세력들은 이들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는 등 인종차별을 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이 송금하는 외화는 터키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터키에서는 마르크貨가 달러貨보다도 더 위력이 있다. 독일에 대한 터키의 의존은 왜 몽골-투르크 세력권이 서구(西歐)세력에 지고 말았느냐 하는 話頭를 제공한다.
17세기부터 총이 전쟁에서 일반화되면서 말과 활이란 유목민족의 主力 무기가 그 우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은 草原의 野性만 가지고는 존립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러시아는 18세기에 먼저 피터 大帝에 의한 서구지향 개혁 정책에 성공하여 그 바탕에서 팽창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南進정책은 흑해에서 투르크와 충돌하게 되었다. 18세기부터는 투르크 제국의 주적(主敵)이 합스부르크 王家에서 러시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유럽의 중심도 바뀌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을 때 주전장은 중부 유럽과 지중해였다. 15세기부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같은 해양국가가 지리상의 대발견들을 통해서 신대륙의 식민지 개척에 나서면서 유럽의 중심은 西유럽과 대서양쪽으로 이동하였다. 베니스, 투르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같은 지중해권 국가는 2류권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세계사의 무대가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투르크는 역대 유목민족 국가 중에는 가장 발달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와 法治의 전통을 확립하여 세계 제국 역사상 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수명(600년)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이 장수의 비결 중에서 눈여겨 볼 만한 것은 개방성과 관용성이다. 오토만 투르크의 사전에는 「종교차별」이 없었다. 유럽에서 학살당하고 핍박당한 유태인들 중 상당수가 투르크로 피난 와서 요직에 등용되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터키는 거의 군사적 동맹관계라고 할 정도로 친밀한데 거기에는 그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개방과 관용과 경쟁
몽골-투르크의 개방과 관용은 이 종족 집단이 어떻게 그토록 장기간 군사적, 정치적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공한다. 개방과 관용과 경쟁의 전통은 조직의 경직과 노화(老化)를 방지한다. 영원한 젊음은 경쟁이 가져다주는 긴장과 안간힘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로마의 유럽 제패는 1000년간 계속되었으나 몽골-투르크族의 유라시아 제패는 1700년쯤 계속되었다. 로마의 성공에 대한 연구는 수도 없이 많지만 몽골-투르크의 성공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서구 학자들이 그들의 성공비결을 야만적 군사력에만 돌렸기 때문이다. 1700년간 압도적인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몽골-투르크의 사회적, 경제적, 종족적 특질이 궁금한 것이다. 이번 기사는 그런 숙제에 대한 답장이기도 하다.
18세기부터 오토만-투르크 황제들 중에서 오토만 투르크를 서구식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말 황제 셀림 3세는 프랑스 대혁명을 관찰하고는 프랑스式 군사제도 특히 포병제도를 도입하여 군대를 개혁하는 한편, 이것을 시작으로 하여 관료제도 및 국정 전반을 뜯어고치겠다고 「신질서」라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 뒤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슬람 국가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일 뿐 아니라 개혁가들이 생명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조성한다. 근위부대인 예니세리와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술탄(황제 겸 이슬람교회 수장)을 反이슬람 분자로 몰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셀림 3세는 유폐되었다가 나중에 살해되었다. 투르크의 황제는 이슬람의 교황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이슬람교도들의 눈에는 술탄의 서구적 개혁이 기독교도에 대한 항복이자 이슬람에 대한 배신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유라시아 유목민족 제국의 정통을 이어받은 투르크의 서구지향은 기원 前後부터 계속된 몽골-투르크族의 농경-정착민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포기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유목민족은 기본적으로 동물(말과 사람)의 육체력에 의존하였던 군사력을 기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오토만 투르크는 1차세계대전 때는 과거의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 및 독일 편에 서서 싸우다가 패전과 동시에 제국이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나타난 영웅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의 지도하에 신생 터키는 확실하게 서구화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이슬람과 정치를 분리함으로써 종교가 국가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군대를 서구적 근대화의 보루로 삼은 점이다. 터키는 이슬람권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한 나라로 꼽혀왔으나 올해(1966년) 들어서 심상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즉, 이슬람 근본주의 당인 복지당이 선거에서 1등을 차지하여 제3당인 보수노선의 정도당과 손잡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복지당 출신의 수상은 이란, 리비아를 방문하고 脫유럽, 親이슬람 정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선포된 이후 처음으로 이슬람의 반동이 시작된 것이다. 터키는 그러나 이란이나 알제리는 될 수 없는 구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케말 파샤의 서구적 근대화 사상을 수호하도록 헌법에 의해 그 역할이 규정되고 있는 60만 군대가 건재하고 이 조직은 아직 이슬람 근본주의로부터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두 번 그랬던 것처럼 사회와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 군대가 나서서 정리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집권세력도 그들의 한계를 알고 있다. 터키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득세한 한 이유로는 西유럽으로부터의 냉대를 꼽는 이들이 많다. 냉전시대에는 소련을 견제한다는 전략적 위치로 해서 西歐로부터 많은 원조도 받고 일찌감치 NATO에도 가입했으나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그런 원조도 중단되고 오히려 인권 문제 같은 것으로 해서 서구로부터 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600년간 이슬람 세계의 宗主國이었던 터키의 향방은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라빈 수상의 암살 이후 평화정착 노력이 유대 원리주의자들의 반동으로 암초에 부딪치면서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뭉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데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학생군 탈레반이 득세하고 있는 등 이슬람圈 전체가 서구 문화에 대한 대치국면을 그리고 있다. 동서 이념 대결 시대에는 이념갈등에 의하여 덮여졌던 종교, 문화적 갈등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