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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韓國戰의 死傷者 중 한 사람

淸山에 2016. 5. 23. 16:41






스탈린은 韓國戰의 死傷者 중 한 사람

韓國戰에 대한 世界史的 재인식(4)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은 敗者, 트루먼과 이승만이 勝者

趙甲濟  
 


   한국전 덕분에 덤으로 살게 된 대만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미군 파병 결정과 한국군의 용전(勇戰)으로 살아나고 재건된 나라는 한국, 일본, 서독뿐이 아니었다. 독립국가로서는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던 대만이 덤으로 살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 시간 1950년 6월25일 밤의 대책회의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이 건의한, ‘7함대를 대만 해협에 보내 무력 충돌을 방지한다’는 지침을 승인하였다. 7함대를 중국과 대만 사이 해협에 보내는 표면상의 이유는 중국과 대만의 무력 충돌 방지였지만 사실은 대만 보호였다. 


 1949년 중국 본토를 장악한 중국공산당 정권은 1950년에 들어와서 대만 정복을 위하여 대안(對岸)에 상륙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봄에는 해남도를 점령하였다. 미국은 1950년 7월에 중공군이 상륙작전을 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대만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풍전등화(風前燈火) 상태였다.


 북한 공산군이 남침한 것을 계기로 삼아 애치슨은 간단하게,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대만을 살린 것이다. 만약 한국전이 일어나지 않고 대만이 그해 중국에 점령당하였더라면 세계의 전략 지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대만을 중국이 차지하였더라면 중동~말래카 해협~남중국해~동중국해로 연결되는 석유 수송로를, 대만에 기지를 둔 중국의 해군력이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미국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막강한 미 7함대가 대만 해협에 배치되니 모택동(毛澤東)은 대만 상륙작전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상륙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아 두었던 병력을 만주로 보내 한반도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 병력이 그해 가을 한국전에 개입하는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북한군에 맞서 한국이 버티는 과정에서 대만이 살았고, 대만이 살았으므로 중공군의 불법 개입을 맞게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대만은 그 뒤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GDP(구매력 기준)가 세계 21등,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3600달러로 세계 17위이고 30만의 상비군(예비군 360만)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모택동은 한반도로 중공군을 들여보내던 1950년 10월 티베트도 침공하였다. 티베트는 미국이 개입하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모(毛)는 대만을 잃은 앙심으로 티베트에 더욱 집착하였을 것이다. 

 



  아데나워, 한국전을 이용하다


 한국전쟁으로 미군 병력이 한반도에 집중되면서 유럽은 막강한 소련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독일의 재무장을 두려워하던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도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이용한 이가 아데나워였다. 


 그해 8월17일 아데나워는 서독지역을 점령 관리하고 있던 연합국(美英佛)의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들에게 서유럽의 방어력 강화를 요청함과 동시에 서독의 경찰력으로서 15만 명의 방위대 창설을 신청하였다. 그 8월29일엔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미영불 외무장관 회담에 즈음하여 두 장의 각서를 작성, 제출하였다. 요지는 국제적인 서유럽군이 창설된다면 서독은 군대를 제공할 용의가 있으며 그런 공헌의 대가(代價)로서 서독에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도 서독의 재무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1950년 뉴욕에서 열린 미영불 외무장관 회담에서 딘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서독의 재무장과 NATO 가입을 요구하였다. 서독의 재무장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프랑스의 르네 팔레방 외무장관은 이에 ‘통일유럽기구에 속한 구주연합군 창설’을 제안하였다. 서독군의 독자성을 제약하고 유럽 공동체의 관리를 받도록 하겠다는 계산이었다. 1950년 12월 브뤼셀에서 열린 NATO 이사회는 ‘스보포드 타협안’을 채택, 유럽연합군 창설을 계속 검토하는 한편으로 NATO를 군사동맹체로 강화하고, 서독의 재무장을 지체 없이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서독에선 재무장에 반대하는 여론과 운동이 격화되어 아데나워의 지지율은 한때 24%까지 떨어졌다. 지방선거에서 집권 기독교민주당은 잇따라 패배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당당하게 맞섰다.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미국의 부모들에게 자식들을 희생시켜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주권회복을 위하여서도 재무장을 불가피하다.” 


 아데나워는 국방부 설립을 위한 준비 기구를 발족시키고 노동조합의 협조를 얻는 한편 주권(主權)회복을 위한 연합군과의 협상을 진행시켜 반대론을 눌렀다. 1952년 5월 본에서 ‘서방 측 3개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의 관계에 대한 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서독은 주권을 회복,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NATO의 일원으로서 냉전 시대 서방세계 방어의 한 기둥이 된다.  
 



   스탈린은 한국전의 死傷者 중 한 사람

 한국전은 스탈린이 김일성을 앞세우고 모택동을 연대보증인으로 세워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한반도 공산화라기보다는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만들어놓고 유럽에서 공세적으로 나오면서 뻣뻣한 모택동의 중국을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1950년 8월27일 체코 대통령 고트발트에게 보내는 구두 메시지에서 스탈린은 놀라운 고백을 하는데,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 불참, 유엔군 파병을 막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안보리의 다수결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중국군이 개입, <미국 정부가 극동(極東)에 계속해서 묶여 있>도록 하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게 되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득(得)이 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의도대로 한국전에 중공군이 개입, 미군과 혈전을 벌이게 되면서 중국은 무기를 공급하는 소련에 종속되어갔다. 스탈린은 유럽을 일시적으로 위협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서독 재무장과 NATO의 강화로 대응하는 바람에 역(逆)포위되고 말았다.   


 미국과 러시아의 두 전문가가 같이 쓴 《크렘린의 냉전 내막》(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콘스탄틴 플레샤코프 共著)은 한국전이 소련의 쇠망과 스탈린의 우울한 말년(末年)을 불러왔다고 분석하였다.


<한국전은 그 1세기 전에 있었던 크리미아 전쟁과 비슷한 영향을 러시아에 끼쳤다. 니콜라스 1세가 전쟁을 시작하기 전 러시아는 유럽이 우러러 보는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제국은 자국(自國)의 영토인 크리미아에서 기술적으로 앞선 프랑스, 영국, 터키 연합군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니콜라스 1세는 패배를 시인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가 급사(急死)한 뒤(자살이란 설이 있다), 후계자가 전쟁을 끝냈다. 스탈린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부터 한국전을 거치면서 소련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자국(自國)의 문 앞에서 전쟁이 예상 외의 교착에 빠진 것이다. 그는 ‘다모클레스의 칼’이 그의 머리 위에 매달린 가운데서 미국의 우위(優位)를 경계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야 하였다. 그 또한 한국전쟁의 사상자(死傷者) 중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