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은 韓國戰의 死傷者 중 한 사람 韓國戰에 대한 世界史的 재인식(4)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은 敗者, 트루먼과 이승만이 勝者 趙甲濟 한국전 덕분에 덤으로 살게 된 대만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미군 파병 결정과 한국군의 용전(勇戰)으로 살아나고 재건된 나라는 한국, 일본, 서독뿐이 아니었다. 독립국가로서는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던 대만이 덤으로 살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 시간 1950년 6월25일 밤의 대책회의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이 건의한, ‘7함대를 대만 해협에 보내 무력 충돌을 방지한다’는 지침을 승인하였다. 7함대를 중국과 대만 사이 해협에 보내는 표면상의 이유는 중국과 대만의 무력 충돌 방지였지만 사실은 대만 보호였다. 1949년 중국 본토를 장악한 중국공산당 정권은 1950년에 들어와서 대만 정복을 위하여 대안(對岸)에 상륙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봄에는 해남도를 점령하였다. 미국은 1950년 7월에 중공군이 상륙작전을 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대만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풍전등화(風前燈火) 상태였다.
북한 공산군이 남침한 것을 계기로 삼아 애치슨은 간단하게,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대만을 살린 것이다. 만약 한국전이 일어나지 않고 대만이 그해 중국에 점령당하였더라면 세계의 전략 지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대만을 중국이 차지하였더라면 중동~말래카 해협~남중국해~동중국해로 연결되는 석유 수송로를, 대만에 기지를 둔 중국의 해군력이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미국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막강한 미 7함대가 대만 해협에 배치되니 모택동(毛澤東)은 대만 상륙작전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상륙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아 두었던 병력을 만주로 보내 한반도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 병력이 그해 가을 한국전에 개입하는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북한군에 맞서 한국이 버티는 과정에서 대만이 살았고, 대만이 살았으므로 중공군의 불법 개입을 맞게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대만은 그 뒤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GDP(구매력 기준)가 세계 21등,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3600달러로 세계 17위이고 30만의 상비군(예비군 360만)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모택동은 한반도로 중공군을 들여보내던 1950년 10월 티베트도 침공하였다. 티베트는 미국이 개입하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모(毛)는 대만을 잃은 앙심으로 티베트에 더욱 집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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