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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戰에 대한 世界史的 재인식(5) - 국가적 自殺만 하지 않는다면

淸山에 2016. 5. 25. 15:40






국가적 自殺만 하지 않는다면

韓國戰에 대한 世界史的 재인식(5)

朴正熙의 예언대로 한국은 이제 '자유의 방파제' 역할을 끝내고 '자유의 파도'가 되어

평양을 쓸어버리는 세계사적 사명을 앞두고 있다.

趙甲濟        
  


  
 이용당한 김일성과 毛澤東


 모택동의 중국도 한국전의 패자(敗者)가 되었다. 엄청난 인명피해로 얻은 것은 국제적 고립이었다. 한국전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대만을 점령한 뒤 미국과 화해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 되면서 서구와 교류,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티토의 유고처럼). 중국은 스탈린과 김일성이 벌인 판에 끼어들었다가 서구와 단절된 뒤 그 뒤 20년간 방황해야 했다. 이 기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인민공사의 대실패로 수천만 명이 죽었다. 1972년, 모택동의 중국은 닉슨의 미국과 화해하게 되는데 이로써 소련의 냉전 패배는 더욱 굳어졌다. 


 한국전의 가장 큰 피해자는 김일성이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킨 다음엔 완전히 스탈린의 노리개가 되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북한이 잿더미가 되었지만 스탈린이 살았을 때는 휴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출혈전(出血戰)을 감수해야 했다. 북한의 오늘은 1950년 6월25일에 예약된 셈이다. 한국전의 진정한 승자는 이승만의 한국과 트루먼의 미국, 그리고 자유진영이었다.  




 누가 勝戰의 영웅인가?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냉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그 역사 속에 영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 등 해외 학자들은 미군 파병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를 외교 전략적으로 보좌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 반격에 성공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 등을 영웅으로 꼽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은 높게 평가되지만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어이없는 오판(誤判)과 문민 대통령에 대한 항명(抗命)과 해임으로 종합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한국은 예외). 한국군 장군으로는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춘천을 3일간 방어하여 敵의 전략을 흩트려버린 김종오(金鐘五) 6사단장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한국전의 흐름을 주도한 두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과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李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좌익들의 선동과 전쟁 중 피해를 본 이들의 반감, 그리고 전쟁의 본질에 대한 학자들의 무지(無知) 등이 결합된 때문이다. 


 한국전은 압도적 군사력을 가진 북한이 세계 2大 육군국인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기습 공격하면서 일어났다. 미국이 군사원조를 제한, 한국군은 북한이 가진 탱크, 전투기도 없고, 병력은 반도 안 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기습 효과까지 가세하였으니 급소를 맞은 국군은 와해되는 게 정상이었다. 1940년 5월, 독일 기갑군단의 기습을 받은 프랑스군은 영국의 도움이 있었지만 6주 만에 항복하였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은 독일군에 못지않았다. 1941년 6월 독일군의 기습을 받은 소련군은 수백 만 명의 포로를 내면서 모스크바까지 후퇴하였다. 스탈린은 충격을 받아 며칠 간 별장에 틀어박혀 전쟁 지도를 포기하였다. 그때도 소련군의 병력이 더 많았다.




 決死抗戰


 한국군과 이승만은 달랐다. 그들은 기습을 받고도 중과부적(衆寡不敵) 상태를 무릅쓰고 총력전에 의한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이어나갔다. 한국군은 후퇴는 했지만 항복하진 않았다. 부대 단위의 항복이 없었다(반면 북진 때 북한군은 조직이 와해되었다). 75세의 李 대통령은 남침 며칠간은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초인적 집중력으로 전쟁 지도를 하였다. 


 그는 6월25일 오전 10시, 남침상황을 보고 받은 직후,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시 경)를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 회동(11:35), 주미대사관에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회동(22:00이후),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군사경력자회의 지시(22:00시 이후)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실에 전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27일엔 주미대사관에 전화(27일, 01:00이후), 맥아더에게 전화(주미대사관 전화 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으로부터 피란 건의 접수(02:00), 경찰의 청량리 敵 전차 진입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의 행적을 보였다.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총력전 태세를 갖추는 등 전쟁 지도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았다.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싸운다”


 이승만은 25일 오전에 경무대를 방문한, 무초 대사에게 “즉 필요하다면 모든 남녀와 어린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전쟁기간 한국은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全국민들이 북한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았던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남정옥 박사)


 기습을 받은 한국군과 이승만 대통령이 1940년의 프랑스군처럼 항전 의지를 포기하고 무너졌더라면 미군이 한국에 오기 전에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트루먼과 함께 세계사를 좋은 방향으로 바꾼 한국전의 두 영웅이다.  


 이승만이 서둘러 서울을 떠난 점은 그가 포로가 되면 한국군의 저항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후퇴하는 군과 민간인들이 도강(渡江)하기 전에 한강 다리를 폭파한 것은 군의 실책이었지 대통령이 책임질 수 없는, 전쟁에선 흔히 있는 실수일 뿐이다. 
 



“종말에선 선이 악을 이긴다”
 
 한국전에서 한미군이 버틴 덕분에 국제적으론 대만이 살고, 일본은 경제부흥, 서독은 재무장, 미국 측에 서게 되었으며, NATO가 강화되고, 미국은 국방비를 세 배로 늘리고 자유진영을 결속시켜 대소(對蘇) 포위망을 완성, 40년 뒤 소련을 무너뜨렸다. 


 한국 안에서도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반공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고, 국군이 막강해지면서 장교단이 근대화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고, 대기업이 일어났으며, 자본가 기업인 과학자 기술자가 역사의 중심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김일성의 남침이 없었더라면 박정희(朴正熙)는 불만 많은 민간인으로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박정희를 경제발전의 지도자로 불러들인 것이 김일성이었다. 그 박정희가 체제경쟁에서 김일성을 코너로 몰았으니 이 또한 악에 대한 신비한 응징이 아닌가?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 전 국방장관은 미군 파병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이상(理想)을 지키기 위하여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트루먼은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하였다. 트루먼의 파병 결정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문적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근본에 깔려 있었던 것은 그의 선한 마음일 것이다. 깡패가 힘없는 아이(국민국가로 탄생한 지 2년)를 두들겨 팰 때 힘 센 사람이 깡패를 막고 나선 행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은 善과 惡의 대결이었고, 결국 善이 이겼다(한반도에선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15일 건국 선포일 연설의 첫 마디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민주주의가 더디지만 종말에 가서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고 말하였다. 한국은 비열한 기습 남침에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서 이긴 것이다. 악한들이 작당할 때 착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동맹을 맺은 것이다.      

 



 국가적 자살만 하지 않는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19일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귀국(貴國)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 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면서 <본인은 우리의 대의(大義)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정당성(right)과 강력함(might)이 우리 편이란 사실을 잘 압니다>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국전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고, <이 전쟁은 남북한 대결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절대 다수 한민족(韓民族)의 대결이다>고 정의하였다.  


 한국전 관련 외교 문서를 읽다가 보면 공산진영 지도자들은 술수만 논하는데 자유진영 지도자들은 대의(大義)를 항상 따지는 것이 대조적이다.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전을 놓고 넓게 들여다보면 김정은의 멸망은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대세(大勢)임을 실감하게 된다. 단, 조건이 있다. 한국인들이 풍요에 취하여 국가적 자살을 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反대한민국적 계급투쟁론으로 써진 한국사 교과서에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넘어가 조국·국군·이승만을 저주하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총선 직후 언론사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통일이 됐을 때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올바른 통일이 되어야지,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 배우면 정통성이 오히려 북한에 있기 때문에 북한을 위한 북한에 의한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예를 들면 대한민국은 정부수립이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북한은 국가수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정통성이 어디에 있느냐 이거죠. 6·25전쟁도 북한이 남한을 이렇게 침범한 것인데, 남북이 같이 책임이 있다, 이런 식으로. 북한이 분단된 후에도 수많은 도발을 하고 최근까지도 천안함에다가 연평도 거기다가 많은 우리 국민들이 희생을 당하고 고통을 많이 당했는데 그건 다 애써서 축소를 해 놨어요.”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시면서 크는 나무다”라고 했다. 한국전에서 흘린 애국자의 피는 충분하고도 남아 세계의 자유와 평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북한 독재자의 피다. 


 한국은 소련·중국·북한이 합작한 침략에 맞서 미국과 손잡고 자유세계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전후(戰後)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으로써 후발(後發) 국가들이 따라하는 모범 사례를 남겼다. 이 두 가지 문명 건설의 금자탑은 한국인이 세계인으로부터 영원히 찬사를 받아야 할 성취이다. 문제는 위대한 유산을 남긴 영웅들이 고향에서 핍박 받고, 국민들은 자랑스러운 일을 해놓고도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예언대로 한국은 이제 '자유의 방파제' 역할을 끝내고 '자유의 파도'가 되어 평양을 쓸어버리는 세계사적 사명을 앞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