決死抗戰
한국군과 이승만은 달랐다. 그들은 기습을 받고도 중과부적(衆寡不敵) 상태를 무릅쓰고 총력전에 의한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이어나갔다. 한국군은 후퇴는 했지만 항복하진 않았다. 부대 단위의 항복이 없었다(반면 북진 때 북한군은 조직이 와해되었다). 75세의 李 대통령은 남침 며칠간은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초인적 집중력으로 전쟁 지도를 하였다. 그는 6월25일 오전 10시, 남침상황을 보고 받은 직후,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시 경)를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 회동(11:35), 주미대사관에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회동(22:00이후),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군사경력자회의 지시(22:00시 이후)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실에 전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27일엔 주미대사관에 전화(27일, 01:00이후), 맥아더에게 전화(주미대사관 전화 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으로부터 피란 건의 접수(02:00), 경찰의 청량리 敵 전차 진입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의 행적을 보였다.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총력전 태세를 갖추는 등 전쟁 지도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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