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의 병기창이 된 일본 1947년에 맥아더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작전명은 롤업(Roll-up). 태평양 전쟁 때 태평양 전선에 버려진 무기 및 장비들을 회수하여 수리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이 나자 이 무기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무기 및 장비들을 수리하는 일감이 일본 회사에 넘어갔다. 한국전 초기 넉 달 동안 일본 회사 등은 48만 9000정의 소화기(小火器), 1418문의 대포, 3만 4316개의 통제장비, 743대의 전투 차량, 1만 5000대의 일반 차량을 출고시켰다. 전쟁에는 군수분야에 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런 일을 주로 일본 인력에 맡겼다. 그들을 사용할 수 없었더라면 미군은 약 20만~25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속 기뢰제거 기술자 등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해운 철도 기술자들도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이 시작되자 일본주둔 군수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한 구매 액수는, 1950년에 1억 8400만 달러, 1952년엔 8억 2400만 달러, 1953년엔 8억 6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연간 수출액은 10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은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다른 연합군을 위한 무기 및 장비뿐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구호물자도 일본에서 구매하였다. 이런 자금은 미국 정부와 원조기관에서 나왔다. 특별자금으로 구매된 물자의 액수는 1950~55년 사이 17억 달러에 달하였다(편집자 注: 군수사령부가 구매한 액수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지는 불명).
토요타 자동차 회사를 예로 든다. 이 회사는 1950년 6월엔 304대의 트럭을 생산하였다. 한국전이 터지고 군수용 주문이 쇄도하여 1951년 3월이 되자 매달 1500대씩 만들었다. 토요타의 가미야 소타로 사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미군의 주문은 우리 회사의 구세주였다. 기쁘기도 했지만 죄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다른 나라의 전쟁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미군의 특별자금 구매액의 약 10%는 일본이 생산하는 무기, 탄약, 장비를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일본 무기 산업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극동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었던 약 1000개의 군수제조업체를 폐쇄시켰는데, 한국전이 일어나자 생산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1950년 8월 미국 합참은 ‘만약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군수산업 능력을 미국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였다.
전쟁물자 생산 이외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으로 온 유엔군 소속의 군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돈을 썼다. 이들이 개인적 목적으로 쓴 돈은 하루 평균 100만 달러에 이르기도 하였다. 요코스카 항 주변에선 일본 매춘부가 1500명으로 늘었다.
한국전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제조업 생산량은 전전(戰前, 1934~36)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조업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1950년 말엔 전전(戰前)의 94%, 1951년엔 128%, 1953년엔 171%로 향상되었다. 제조업 종사자들의 임금 지수도 1950년 59.5(1960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 1951년에 65.6, 1952년에 73.5, 1953년에 77.4로 급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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