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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를 처음 발견한 자들은 조선의 심마니였다.

淸山에 2016. 6. 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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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를 처음 발견한 자들은 조선의 심마니였다.
 

 
허우범역사 기행 전문가E-mail : appolo21@hanmail.net

1961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국문과와 동 교육대학원 석..

  입력 : 2014.05.25 18:11 | 수정 : 2014.05.26 14:24  


  

"광개토대왕비 건립 1600주년 역사관 확립 계기 마련해야" <안서1>


'광개토대왕비'를 처음 발견한 자들은 조선의 심마니였다.

 

가욕관을 빠져나와 다시 서쪽으로 향한 감신공로(甘新公路)를 탄다. 길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른다. 먼지 때문인가? 하늘이 온통 뿌옇다. 하늘과 땅의 색이 거의 같아 지평선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된다. 아지랑이 춤추는 도로에서 순간 몽롱함을 느낀다. 내가 탄 자동차가 마치 한 장의 화지 위에 붓이 되어 흘러감을 느낀다. 어디로 가는가? 길은 맞는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좌종당

얼마를 달렸을까. 눈을 뜨니 울창한 버드나무가 보인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뗀 사이에 버드나무 가로수가 나타나다니, 마치 사막 속에서 무릉도원을 만난 느낌이다. 이 버드나무는 일명 좌공류(左公柳)라고 부르는데,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 좌종당(左宗棠)이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주천공원의 우물에 있던 커다란 버드나무도 좌공류였다. 당시 좌공류는 삼천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나며 훼손되어 지금은 가욕관에서 신강성에 이르는 길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다.

 
하서주랑에서 볼 수 있는 좌공류

하서주랑에서 볼 수 있는 좌공류 하서주랑에서 볼 수 있는 좌공류


좌종당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사람이다. 그는 나무심기를 좋아했는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금의 신강으로 향할 때, 이곳 하서주랑을 지나게 되었고 군사들에게 명령해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나무를 심고 나면 그뿐,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다. 귀찮고 이득 없는 일을 굳이 나서서 할 일이 무엇인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좌종당이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펴보니 당나귀가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좌종당은 즉시 당나귀를 잡아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고루 앞에서 목을 잘라버렸다. 그러고 나서 선포하였다.


“만약 또다시 나무를 상하게 하는 당나귀가 있다면 주인까지도 똑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그 후로는 버드나무를 훼손하지 않아 오늘의 멋진 풍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좌종당과 동향 친구인 양창준(楊昌浚)은 좌종당의 업적을 찬양하는 헌시(左公柳)를 지었다.


장군은 변경에서 돌아올 기약 없고大將籌边尙未还
고향의 식구들만 천산에 가득하네湖湘子弟滿天山.
새로 심은 버드나무 삼천리 길이新栽楊柳三千里
봄바람에 이끌고 옥문관에 이르네引得春風度玉關.


좌종당, ‘광개토대왕비’ 세상에 알리다

좌종당은 청나라 정치가이지만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인 1770년,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고, 정조 때인 1782년에 석학 이만운(李萬運)이 9년에 걸쳐 보완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지었다. 이곳에 보면 광개토대왕의 비문 발견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좌종당 초상

좌종당 초상 좌종당 초상


“성경성(盛京省) 회인현(懷仁縣) 통구(通溝) 등지는 바로 서간도의 경내이다. 그 땅이 압록강 오른쪽 언덕을 베고 있는데, 구련성(九連城)과의 거리가 150리다. 지금부터 300년 전에 한 비(碑)가 산골짜기 가운데서 발견되었는데, 고종 19년(1882년)에 청나라 성경장군(盛京將軍) 좌종당(左宗棠)이 비로소 사람을 사서 발굴하니, 바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문(碑文)이었다. 비의 높이가 1장(丈) 8척이고, 남북 양쪽 면은 5척 6, 7촌, 동서는 4척 4, 5촌인데, 4면에 글자를 새겼다. 남쪽 면은 11행, 서쪽 면은 10행, 북쪽 면은 13행, 동쪽 면은 9행인데, 줄마다 41자(字)로 합계 43행 1,759자이다. 그 글이 심히 간결하면서도 고아(古雅)하여 동국 사기(史記)의 빠진 글을 보충하였는데, 황초령정계비문(黃草嶺定界碑文)과 함께 이 비의 전문을 수록하여 참고자료로 삼고자 한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개국하면서 자신들의 발상지를 신성시하여 만주 지역에 출입을 금지했다. 그 와중에 조선의 심마니들이 그곳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견하였지만, 그것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석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좌종당 덕분이다. 그 뒤 1907년에 프랑스의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가 직접 만주를 탐방한 뒤 이 비석을 탁본해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길림성 집안시에서 동북으로 3.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비문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여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훈적(勳籍)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른다. 이 비를 중심으로 동북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장군총이 있고, 서남쪽 200미터 지점에 태왕릉이 있다. 장군총, 광개토왕비, 태왕릉이 서남쪽으로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태왕릉의 묘에서 명문(銘文)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본다면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릉이 확실하다.


“원하옵건대 대왕의 무덤은 산 같이 안전하고 구릉같이 굳건하소서.(願大王之墓安如山! 固如丘!)”


중국, 광개토대왕비에 개 배치한 채 동북공정 진행


광개토대왕비는 왕의 2주기인 414년 9월 29일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끝내고 이 비를 유리 상자 속에 밀봉해 놓았다. 동북공정이 한창인 때 집안을 방문한 적이 떠오른다. 자신들의 역사왜곡작업을 남이 볼까 두려워한 나머지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사방 곳곳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도 모자라 비석 양옆에는 군용견인 커다란 셰퍼드로 지키게 했다. 사나운 개가 인기척이 나면 곧장 짖어대며 달려오는데 목줄을 매단 길이가 족히 20~30m는 됨직한 긴 줄이었다. 비석 앞에서 사진도 찍을 수 없게 만들려는 속셈인데 그 수법이 참으로 한심하였다. 태양의 자손으로 고대 동북아시아에 또 다른 문명을 건설했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에 한낱 미물인 개를 매어두고 지키게 하다니. 자국에 유리하면 타국의 역사쯤은 언제든 왜곡해 버리는 중국의 전략을 우리는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지안에 있는 광개토왕비

지안에 있는 광개토왕비 지안에 있는 광개토왕비


광개토대왕비는 6m가 넘는 사각기둥 형태의 암석으로 되어 있는데, 약 1800자에 달하는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체 또한 독특하다. 네모 반듯한 예서(隸書)를 사용했는데, 그 서체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급격한 파임이나 흘림도 없다. 단아하면서도 예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도 닿아 있다.


서체의 창조는 문자의 창조에 버금가는 것이다. 국력과 문화가 선진적이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문에 새겨진 독특한 서체는 당시 고구려의 선진적인 문명에서 발생한 문화적 자긍심이다. 비문의 서체를 자세히 보노라면 구수하고 질박한 남성미가 물씬 풍긴다. 가히 고구려인의 늠름하고 여유로운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광개토대왕체(廣開土大王體)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추사체 이전에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광개토대왕체에 대하여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이런 서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광개토왕비 탁본

광개토왕비 탁본 광개토왕비 탁본


광개토대왕비 1600주년해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의식 부재를 탓하다

2012년 10월 18일과 19일, 동북아역사재단은 광개토대왕 서거 160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광개토왕비의 재조명’이었다. 신문사마다 이 내용을 보도하여 관심을 끌었는데 나는 보도된 사진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행사장 현수막에는 학술회의 주제를 한자로 표기했는데 그 서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안진경체였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자랑해야 할 독특한 서체로 작성된 비문을 논하는 자리에 생뚱맞은 중국 서체로 현수막을 만든 것은 업무태만인가 아니면 사려 없는 단순함인가.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는 결코 사소한 일로 볼 수 없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적 지원으로 탄생한 재단이다. 그런 재단이 어찌 독특한 광개토대왕비체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역사의식의 부재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이런 역사의식으로 어떻게 고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결과에 어떻게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겠는가.

 
지안에서 발견된 제2 고구려비

지안에서 발견된 제2 고구려비 지안에서 발견된 제2 고구려비


2012년 7월 29일, 지린성 집안시 마선향(麻線鄕) 마선촌의 마선하 강변에서 제2의 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 마선하는 압록강의 지류인데 이곳에서 돌을 캐던 농민이 우연히 땅속에 박힌 비석을 찾아내어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비석이 발견된 곳을 기점으로 동남쪽으로 450여m 지점에 천추묘(千秋墓)가 있고, 서남쪽으로 1100여m 지점에 서대묘(西大墓)가 있다.


이 비석은 173cm의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는데 비문의 글자 수는 광개토대왕비의 8분의 1 정도다.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역대 왕들의 능묘에 비석을 세우고 안전하게 지키라는 당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현재 집안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중국 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동북공정을 노리고 만든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중국이 떳떳하다면 비석을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사의 유적은 관련 국가들과의 공동연구를 기본으로 그 내용을 밝히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된 지 1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비와 함께 기존의 광개토대왕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국제학술회의가 또 열릴 것이다. 당부하건대 2014년의 학술회의는 사소한 준비과정에서도 놓침이 없이 완벽한 행사가 되기를 기원한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고대 한·중·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이것을 완벽하게 해석함으로써 우리 고대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