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로버트는 서가로 가더니 자신이 쓴 책 『내부의 적(The Enemy Within)』 한 권을 가지고 왔다. 내 이름의 영어 스펠링을 묻더니 책에 서명을 해서 내게 줬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신이 한 말을 다 이해했고 형(케네디 대통령)에게도 보고하겠다. 지금 쿠바사태가 위급해 형은 거기에 대처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잘못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3차 대전을 하더라도 소련을 눌러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할 각오를 하고 있다.”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박이 미군의 해상봉쇄선 바로 앞에 멈춰 서서 대치하던 바로 그때였다. 우리의 면담은 예정된 15분을 훌쩍 넘겨 45분간 이어졌다. 나보다 한 살 위인 로버트 케네디는 명석한 인물로 케네디 행정부의 실력자였다. 형 케네디 대통령도 중요한 일은 모두 상의할 정도였다. 로버트는 64년에 한국에 왔을 때도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와 첫 만남에서 ‘아, 그냥 적당히 할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이후 로버트 케네디와 나는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18일간 방미를 계기로 나에 대한 미국 지도층의 인식이 조금씩 고쳐졌다. 5·16 직후부터 미국에선 나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인물’로 보고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미국으로선 혁명을 주도한 내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다크 호스’였다. 내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마자 민주당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꾸몄던 미 CIA 요원 크래퍼(가명)와 장면 총리의 정치고문이었던 위태커를 붙잡아 미국으로 추방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 내가 그들의 눈에는 반미주의자나 급진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로 보였을 것이다. 미국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미국에 해(害)가 될 수도 있다고 나를 판단한 듯했다. 일개 중령 출신이 뒤에서 혁명정부를 움직이고 있는데 도대체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미국 측의 대표적인 반JP 인사가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였다. 그는 줄곧 나를 감시하고 견제했다. 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버거 대사와의 갈등이 고조됐다. 미국 대사관에서 잉여농산물 공급을 중단하려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보릿고개를 앞두고 양곡 원조가 갑자기 중단된다면 큰일이었다. 나는 한밤중에 버거 대사를 찾아갔다.
“미국대사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이럴 수 있느냐. 원조를 위해 선박으로 실어다 갖다 놓고 왜 밀가루를 풀지 않느냐”고 소리 지르며 따졌다. 그렇다고 미국 측이 나를 제거하기 위해 정면으로 압력을 가하거나 항의해온 일은 없었다. 버거 대사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나를 제거하라고 설득했다는데, 내가 알기로 그런 일은 없었다. 박 의장이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나에게 바로 전했을 것이다. 버거 대사는 외교관이지 모사꾼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 71년 10월 국무총리 시절, 나는 월남을 방문했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파병돼 한창 싸우고 있던 때였다. 그곳에서 주월 미국 부대사로 있던 버거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버거는 내게 “그땐 내가 한국 사정을 잘 몰라 당신을 의심했다. 마음으로부터 사과하겠다”고 했다. 그는 “지금 보니까 당신이 수고를 많이 했다. 월남에 파병해서 미국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 국력을 키우지 않았느냐. 계속 소신껏 해 달라”고 덧붙였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을 뿐 결국 그도 나를 이해하게 됐다.
● 인물 소사전 로버트 F 케네디(1925~68)=존 F 케네디(JFK) 대통령의 동생으로 미국 진보적 지식인의 우상이었다. 하버드대 출신 변호사로 상원위원회 법률고문을 지냈다. 1961년 1월 케네디 행정부 출범과 함께 36세 나이로 법무장관에 임명됐다. JFK 암살 뒤인 64년 11월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올랐지만 68년 형처럼 총격을 받아 암살됐다. 가톨릭 신자로서 11명의 자녀를 뒀다. 워싱턴 근교 알링턴 국립묘지의 JFK 옆에 묻혔다. 애칭은 바비(Bobby), 이니셜은 RFK. 정리=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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