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협정 조인 다음날 박정희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잡아야” …최근 한·일 관계 악화 지켜본 JP “대일 외교, 냉철하고 일관돼야” [중앙일보] 입력 2015.05.11 01:55 / 수정 2015.05.11 02:5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0> 수교 50년 한·일 관계 미래는
1962년 11월 13일 김종필 중정부장(JP·왼쪽)이 서울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 있다. JP는 전날 도쿄에서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 대일 청구권 자금규모(6억 달러+α)를 합의하고 이튿날 귀국, 바로 박 의장을 찾아가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은 JP의 청구권 자금 타결을 계기로 속도가 빨라졌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설]
한·일 회담에 임하는 내 마음은 1961년 혁명 때 목숨을 걸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게는 제2의 혁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게 혁명의 기획자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할 일이었다. 10년간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게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과업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자금 밑천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 중공(中共)은 잠자는 거인에서 ‘포효하는 사자’로 깨어나고 있었다. 중공의 국제무대 등장으로 인한 우리의 외교적 고립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예방해야 했다. 내가 한·일 회담에 뛰어들게 된 배경에는 이런 국제 정세적 변화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후 4년을 회상해 보니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담, 오히라 외상과 대일 청구권 협상, 최종 타결을 위한 막후 조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반대시위, 대학 캠퍼스 순회 토론, 6·3 비상계엄 선포, 구름처럼 떠돌던 2차 외유 장면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갔다.
65년 6월 23일 오후 8시. 도쿄에서 한·일 수교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라디오와 TV로 ‘한·일 국교 정상화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소공동, 지금의 조선호텔 주차장 자리에 있던 공화당 당사에서 박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박 대통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낭독한 담화는 우여곡절 끝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결론 내는 증좌(證左)였다.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우리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필요하면 원수와도 손을 잡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다. 반일(反日)보다 어려운 게 용일(用日)이란 얘기는 나와 박 대통령이 종종 나눴던 대화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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