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의 귀국 지시가 떨어졌다. 한·일 회담 반대 데모가 극심하니 일단 들어오라는 얘기였다. 보고를 들으니 김포공항에 학생 수천 명이 나와 데모를 할 거라고 했다. 그때 난 결사 각오를 다졌다. 서울로 전화를 걸어 “김포 비행장에 앰뷸런스하고 마이크를 준비해 놔라. 내가 공항에서 마이크 붙잡고 학생들을 설득하겠다. 내게 위해(危害)를 가하면 그냥 당하고 말겠다. 그러면 나를 앰뷸런스에 싣고 병원에 가라”고 했다.
이튿날 오전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내린 김포 비행장엔 어떻게 된 일인지 조용했다. 데모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때 나의 귀국성명 요지는 이랬다. “많은 우국(憂國) 학생들이 과거에 우리가 받은 모든 수치를 상기하고 궐기한 충정에 깊이 감명하고 있다. 나는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기회 있는 대로 만나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생각이다….” 주위에서는 내가 대학 캠퍼스에 가면 계란은 물론 돌멩이도 맞을 수 있다고 말렸다. 하지만 나는 그때 ‘계란을 던지면 맞자. 돌멩이를 던지면 맞자. 그래도 내가 가서 설득해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 넉 달 전인 63년 11월에도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들에게 5·16 혁명의 정당성과 한·일 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었다.
1963년 6월 3일 서울 시내에 1만500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 박정희 대통령 하야 등을 요구하는 한·일 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박대통령은 결국 이날 오후 8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중앙포토]
64년 4월 9일 당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서울대 사범대학에 갔다. 내 모교인 사범대 학생회가 주최한 대토론회에 참석했다. 강당에 모인 3000여 명의 학생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를 생각해 봐라. 서쪽에는 중공(中共)이, 북쪽에는 소련이 막아서 대륙으로는 갈 데가 없다. 그들은 막강한 국력을 갖고 있는 공산국가다. 그쪽으론 우리가 나아갈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대륙의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신세가 아니냐. 남쪽은 3000㎞ 이상의 섬들이 늘어서 있다. 일본 제도(諸島)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일본을 디딤돌로 해서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지중해로 나아가야 한다. 일본이 밉더라도 우리가 살길을 열어나가려면 국교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돈을 빨리 가져다가 경제개발의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 이게 안 된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 쓸모없는 맹장 신세로 끝나고 만다. ”
또 “청구권에 대해 의혹을 고의로 자아내는 분들이 있다. 외교는 타협이다. 타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누구인들 이 나라의 생(生)을 얻고 피를 이어받고 민족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 푼이라도 정정당당하게 받으려고 노력하면 했지 양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일본 지도자들과 만나 저자세(低姿勢)를 취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설득했다.
나의 얘기에 적대적이었던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누그러졌다. 학생들은 옳다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후로도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숙명여대 등을 다 돌아다니며 학생들과 대화하고 설득했다. 숙명여대는 아내가 다녔던 학교다. 내 연설에 박수뿐 아니라 “형부가 왔다”며 몰려들어 내 옷을 잡아당겨 단추가 떨어져 나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학생들은 다음날이면 또 거리로 나가 “한·일 회담으로 나라 팔아먹는 놈 내쫓아라”며 시위를 했다. 혹자는 이런 시위가 정부의 대일 협상에 도움을 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그 당시 반대하며 거리를 누비던 학생들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나를 만나면 “조국 근대화의 전략과 열정을 알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여러분의 애국심과 정의감을 알고 있었다”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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