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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6> 김종필·오히라 회담 ①

淸山에 2015. 5. 1. 09:03








청구권 8억 달러 당시 우리돈 2160억 지금 물가로 8조,

예산 기준으론 327조
[중앙일보] 입력 2015.05.01 00:4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6> 김종필·오히라 회담 ①
  
 


1965년의 대일(對日) 청구권자금 8억 달러는 당시 환율(달러당 270원) 기준으로 2160억원에 해당한다. 몇 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현재 가치를 따져봤다.


 국내 물가상승률을 기준으로 하면 이 돈은 현재의 7조7900억원과 맞먹는다. 2014년 소비자물가지수(109.04)가 65년(3.022)의 36배(원화 기준)로 뛰었기 때문이다. 올 1분기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영업이익을 합친 금액(7조5700억원)과 비슷하다.


한국이 아닌 미국의 물가상승률로 따지면 이보다 조금 줄어든 6조4000억원(59억6600만 달러)으로 계산된다. 50년간 미국 소비자물가지수가 7.46배(달러화 기준) 정도 늘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표는 정부 예산이다. 청구권자금이 정부의 재정 투자 형태로 쓰였다는 점에서 정부 규모를 잣대로 삼을 수 있다. 65년의 8억 달러는 그해 정부 예산(2473억원)의 87%에 해당했다. 2015년 정부예산은 50년 전의 1520배인 376조원이고, 이를 기준으로 하면 청구권자금 가치는 327조원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지표로 삼으면 가치는 더 불어나 386조원이 된다. 65년 고작 8312억원이던 명목 GDP가 그동안 1787배(2014년 1485조원)로 늘었기 때문이다.


 6조4000억~7조7900억원과 327조~386조원. 지표별 수치의 간극이 크다. 동국대 김낙년(도쿄대 경제학 박사) 교수는 “한국 경제의 몸집이 워낙 커져서 물가를 기준으로 하면 8억 달러의 가치가 과소평가되고, 정부 예산과 경제 규모로 하면 과대평가된다”며 “실제 가치는 그 중간쯤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청구권자금의 액수 자체보다는 이것이 한국 경제의 성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애란 기자


 





JP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두견새 함께 울려보자" …

일본 고사 꺼내자 오히라는 속내를 털어놨다
[중앙일보] 입력 2015.05.01 00:45 / 수정 2015.05.01 00:5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6> 김종필·오히라 회담 ①
당시 일본 외환보유액 14억 달러
박정희, JP에게 ‘8억 달러’ 지침
“종합제철·기계공장 만들어 보자”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JP·36·왼쪽) 중앙정보 부장이 일본 외무성에서 오히라 마사요시(52)외상과

회담하고 있다.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된 회담에서 3000만 달러로 시작한 청구권 협상 금액이 ‘6억 달러+알파’까지 올라갔다. JP는 일본 전국시대의 고사를 인용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어떻게든 두견새를 울려 보자”고 설득했다. 오히라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박정희-이케다 정상회의(1961년 11월 12일)로 한·일 회담이 힘을 받긴 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실제적인 문제에서 진척이 없었다. 회담 의제는 ‘한·일 기본관계’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대일 재산청구권’ ‘어업 및 선박 문제’ ‘문화재 반환’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제일 난항이었던 게 청구권 자금이었다.

 1962년 10월 나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들르기로 했다. 그 전에 박 의장과 나는 최고회의 의장실로 민주당 시절 5차 한·일 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던 유진오 박사를 초빙했다. “일본이 우리한테 정말 얼마나 줄 수 있다고 보시는가”라는 박 의장의 질문에 유 박사는 “일본 사람들한테 들었지만 3000만 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유 박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액수는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 박사가 돌아간 뒤 박 의장은 “어떤 사람은 일본이 우리를 36년간 지배했으니 1년에 1억씩 36억 달러를 내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최소 10억 달러는 받아내야 한다고 한다. 으음~ 8억… 8억. 김 부장, 8억 달러 어때. 국민들은 불만이겠지만 그걸로 종합제철소도 짓고 종합기계공장도 만들고 해보자고”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내놓은 8억 달러는 박 의장이 내게 준 인디케이션(지침)이었다.


 



 미국 방문길에 들른 일본에서 나는 이케다 총리,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 등을 만나 정지작업을 했다. 본격 협상은 미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벌어졌다. 상대방은 오히라 외상. 나보다 열여섯 살 연상이다. 일본 언론들은 그의 별명을 둔우(鈍牛·둔한 소)라고 했다. 굼떠보이지만 확실하며 힘이 세다는 뜻이었다. 실제 오히라는 그랬다. 늘 뜸을 들였다. 무슨 말을 꺼내면 “음, 음, 아, 아…” 거리면서 즉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비상한 사람이었다. 천천히 꺼내는 말을 받아 적으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됐다.



 62년 11월 12일 저녁, 그의 사무실에서 나는 오히라와 마주 앉았다. 처음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귀국이 청구권 자금으로 우리에게 지불할 금액을 얼마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오히라는 둔우라는 별명의 소유자답게 멈칫멈칫하더니 “3000만 달러”라고 자르듯 말했다. “그러면 3000만 달러는 어디서 나온 기준이냐”고 밀어붙이자 오히라는 “외무대신인 내가 생각한 내용이다”고 맞받았다. 내가 “총리와도 상의한 이야기냐”고 다시 묻자 “아, 총리하고는 얘기했다. 그런데 총리는 3000만 달러도 많다고 하더라”고 눙쳤다.


 이런 식의 대화가 평행선처럼 이어졌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왔다갔다 했다. 창 밖은 벌써 캄캄해졌다. “오히라 외상, 벌써 세 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커피 한 잔조차 내줄 생각이 없는 거요. 이 나라는 이렇게 인색한가요”라며 압박했다. 그러자 오히라는 ‘참, 그렇군…’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사무실 옆으로 난 문을 열어 커피를 가져오게 했다. 잠깐 열린 문 밖을 보니 기자들이 30명쯤 가득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금액의 다과(多寡)가 결국 문제다. 얼마를 줄 수 있는지 당신의 본심을 이야기해 보시라”고 했다. 오히라는 끙끙거리더니 “50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이래서는 아무런 접점이 나올 수가 없다. 나는 과거사 문제를 꺼냈다. “당신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할 때 수탈한 것이 적지 않다. 우리는 전쟁까지 겪었는데, 그 원인 또한 당신들의 잘못 때문 아니냐. 5000만 달러라니. 그 정도 가지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오히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나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고 뒤로 뺐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전국시대(1491~1565년)의 고사(古事)를 꺼내 들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당신네 전국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세 사람의 성격을 잘 안다. 이들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300년 동안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이어지지 않았느냐.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세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느냐.”



 내 입에서 일본 사람들이 잘 아는 고사가 나오니까 오히라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내 이야기에 빨려 들어왔다. “오다 노부나가는 ‘호토토기스(ほととぎす·杜鵑·두견새), 울지 않거든 죽여버려라’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거든 울려 보자’고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했다. 당신과 지금 내가 마주 앉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울지 않는다고 새를 죽여야 하겠느냐, 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겠느냐. 우리는 어떻게든 새를 울게 만드는 도요토미 방식을 택해야 하는 입장 아니냐. 그런데 그렇게 가볍게 5000만 달러라고만 하니 이게 말이 되느냐.”


 오히라의 작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놀란 표정이었다. 주고 받는 말을 메모하던 그는 종이하고 연필을 딱 내려놓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다 들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나서부터 일본말을 배웠다. 일본에서 발간한 책을 읽어 당신네 나라 역사를 안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끙~” 하면서 생각에 잠기더니 “음~ 사실은 우리가 달리 생각하는 안이 있다. 무상 2억 달러, 유상협력기금 형식의 3억 달러, 그래서 전부 5억 달러다”고 털어놨다. 오히라가 처음 꺼내 보인 속내였다.


 세 시간 동안 막힌 얘기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오히라의 ‘속내’가 드러낸 금액은 5억 달러. 어느 정도 타결선에 가까워진 셈이었다. 나는 “무상을 3억 달러로 하고, 유상을 2억 달러로 하자. 민간 베이스에서 1억 달러 플러스 알파를 내게 하자”고 제안했다. 오히라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생각했던 ‘5억 달러’라는 카드를 먼저 꺼내 보인 뒤라 대세를 돌이키기는 힘들었다. 결국 내가 제안한 ‘3억(무상)+2억(유상)+1억 플러스 알파(민간)’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 패전국으로 전후 복구가 진행되고 있어 재정이 어려울 때였다. 지불금의 명목을 청구권으로 하느냐 경제협력 자금으로 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나중에 협의하기로 했다. 합의 내용을 틀림없이 서로 박정희 의장과 이케다 총리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히라 외상의 전용 메모지에 합의 내용을 각각 쓰고 서로 대조해 보았다. 마지막 쟁점은 돈을 어떤 방식으로 지불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타결했지만 자금 규모의 합의에 비하면 부수적인 일이었다. 그 내용을 적은 게 바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였다. 메모의 내용은 ‘①무상 3억 달러 ②유상(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 ③수출입은행에서 1억 달러+α를 제공한다’였다.


 오히라는 메모를 작성한 뒤 “내가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해도 결국 의회에 가서 보고해야 한다. 당신 입장에선 다다익선(多多益善)이겠지만 나는 이거 잘못하면 쫓겨난다. 그런데 당신의 ‘두견새 울리기’ 얘기를 듣고서 생각을 고쳤어. 내가 졌어”라고 해 함께 크게 웃었다. 나는 “나도 돌아가면 우리 국민들한테 매국노나 제2의 이완용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나는 혁명 때 한 번 죽은 몸이라는 심정으로 이 일에 부딪치고 있소”라고 말했다. 김-오히라 메모의 6억 달러+알파는 65년 양국 외무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 달러로 조정됐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1억3000만 달러)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에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종합제철소인 포철은 입지 선정과 제철기술 도입 등에 내가 나섰다. 동해안을 돌아다니며 항구 건설이 용이한 포항을 제철소 부지로 선택했고,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이 공장 설립과 기술 도입을 도와주도록 했다. 포철은 한국이 세계 5위의 자동차, 세계 2위의 조선 생산국이 되게 하는 결정적인 철강 자재 공급원이 됐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청구권 자금을 나라 세우는 밑천으로 삼겠다는 혁명정부의 구상이 성공해 보람을 느낀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일본에서 15세기 말부터 100년 동안 약 300명의 군웅이 할거했던 시절을 말한다. 무로마치(室町·지금의 교토) 막부(幕府) 시대 말기 쇼군(將軍)의 권력과 권위가 떨어지면서 다이묘(大名·지방 영주)들이 독립하고, 전란(戰亂)이 일본 전역으로 확대됐다. 이 시절 쇼군은 한 사람도 교토에서 편안한 일생을 마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세가 불안했다. 구질서와 구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것이 탄생되는 시기였다. 전국시대의 3대 인물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꼽힌다. 오다가 전국시대 100여 년의 혼란을 종식하는 통일의 가닥을 잡은 사람이라면, 도요토미는 그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하고 일본 통일을 이룩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세력을 물리치고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돼 264년 동안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를 열었다.



● 인물 소사전 유진오(兪鎭午·1906~87)=경성제국대학(서울대) 법학과 졸업 뒤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법대 교수를 지냈다.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을 맡아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13년간 고려대 총장(1952~65년)을 지냈고 5·16 직후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66년 야당 민중당의 대통령 후보로 스카우트된다. 이후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1967~70년)를 역임했다. 호는 현민(玄民).

JP 육성증언 영상(26) “제 3의 이완용이라도 좋다. 두고 봐라”



-김종필 전 총리=3+2+1+알파. 그래서 8억 (달러)까지 받아오면. 어디 나라 경제 좀 일으킬 수 있겠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대로 했어. 그랬는데 나더러 매국노라 그러더라. 제 2의 이완용이라고. ‘제 3의 이완용이라도 좋고, 매국노도 좋다. 두고 봐라.’ 내 속으로 그랬어. 내가 나라 팔아먹으려고 가나. 그때 흔히 잘 한 소리가. 일본 돈 들어오면 매판 자본이 돼서 나라가 팔려가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그걸 대항하는 소리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대학생한테도 내가 나중에 강의할 때. ‘이봐. 매판자본이건, 무슨 자본이건, 외자가 들어오기까지가 어렵지. 들어온 다음에는 내 거야. 가져갈텨? 뭘 걱정하느냐’고. 그러니까 박수 치더라. 학생들이.

한애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