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JP가 항의 방문한 요미우리신문사의 와타나베 쓰네오 사장 겸 주필. [중앙포토] 잠시 뒤 글을 쓴 당사자를 포함해 편집국장과 논설위원들이 모였다. 그들이 오자마자 나는 일본어로 막 야단쳤다. “당신들, 지나사변(중일전쟁·1937~45년)이 일어났을 때 몇 살이냐. 그 당시에 일본 군대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복장을 아느냐. 헌팅 모자 쓰고 쓰메에리(깃이 목을 둘러 바싹 여미게 지은 양복) 하얀 것 입고, 그 위에 윗도리 걸치고, 아래는 단코바지(아래는 좁고 허벅지 부분은 넓은 승마복 같은 바지) 입고, 게토루(각반) 찬 놈도 있고, 지카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 신) 신고, 뒷주머니에 허연 수건 꽂고…. 이런 놈들이 돌아다니면서 ‘전부 군대 나가는 바람에 생산수단이 없어 사람들이 모자란다. 그래서 여자들이 생산기관에 가서 일하면 돈 벌고 그 돈을 어머니·아버지에게 보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이렇게 속였다. 이 장면들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모집한 여성들을 일부는 생산기관에 배치했겠지만 대부분은 즉각 강제로 중국으로 보내가지고 위안부 노릇을 시켰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 꾸며낸 일(뎃치아게루)이라고?”
이건 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 있는 나의 중·고교 시절, 고향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일제시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누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나의 호통에 와타나베 회장은 물론 논설위원 중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그들은 위안부를 ‘가난해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라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친김에 일본 언론사들을 한 바퀴 돌았다. 이튿날은 아사히신문을 찾아 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 상태를 자세히 알렸고, 그 다음 날은 산케이를 찾아 보도 태도에 항의했다.
그간 일본의 전중(戰中)세대,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해 왔다. 일본 아사히 신문 종군기자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 쓴 『제국육군의 최후』(1960·문예춘추사)라는 책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했다.
이 책에 따르면 손재주가 좀 있어 보이는 여자는 공장으로 데려갔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는 중국 대륙으로 끌고 가 군대 위안부로 만들었다. 일본 군대가 만주로 가면 위안부도 만주로, 월남으로 가면 월남으로 데려갔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각 섬으로 흩어졌다. 용산에 진주하던 일본군 20사단은 수송선을 타고 뉴기니로 향했는데, 미국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배 절반이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그때 배에 함께 탔던 종군위안부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토의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아마도 누군가가 위안부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위안부 얘기를 꺼내기 힘들었던 우리 사회 분위기는 70년대도 비슷했다. 내가 국무총리를 하던 시절이다. 1971년 5월~72년 3월까지 10개월 동안 기존 한·일 협정의 청구권과 별도로 일제시대 민간인 피해자 보상을 위해 ‘대일(對日) 민간 청구권 신고’ 창구를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총 14만여 건, 액수로는 약 40억원의 신고가 접수됐다. 그런데 위안부 피해가 신고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신고의 70%는 은행 예금이었고 그 외에 국채·생명보험·우편저금·회사채·전쟁사망자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그분들이 자신을 드러내 일본 군국주의의 폐해를 고발하고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가치를 호소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희생과 헌신이 아닐 수 없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오자와 이치로(73)=일본의 보수개혁 정치인. 현재 13선 중의원 의원이며 생활당 공동대표. 자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 민주당 대표 등을 지냈다. 자유민주당을 탈당해 신생당 실권자였던 1993년, 일본신당 등 7개 소수연립여당을 성립시켜 비자민당 출신 최초로 호소카와 모리히토 총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1955년 체제’로 불리던 자민당 독주체제가 38년 만에 무너지고 일본 정계에 혁신의 바람이 일어났다. 이때 그가 쓴 저서가 『일본개조계획』으로 정치개혁과 국제사회에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국가론을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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