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전국시대(1491~1565년)의 고사(古事)를 꺼내 들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당신네 전국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세 사람의 성격을 잘 안다. 이들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300년 동안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이어지지 않았느냐.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세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느냐.”
내 입에서 일본 사람들이 잘 아는 고사가 나오니까 오히라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내 이야기에 빨려 들어왔다. “오다 노부나가는 ‘호토토기스(ほととぎす·杜鵑·두견새), 울지 않거든 죽여버려라’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거든 울려 보자’고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했다. 당신과 지금 내가 마주 앉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울지 않는다고 새를 죽여야 하겠느냐, 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겠느냐. 우리는 어떻게든 새를 울게 만드는 도요토미 방식을 택해야 하는 입장 아니냐. 그런데 그렇게 가볍게 5000만 달러라고만 하니 이게 말이 되느냐.”
오히라의 작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놀란 표정이었다. 주고 받는 말을 메모하던 그는 종이하고 연필을 딱 내려놓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다 들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나서부터 일본말을 배웠다. 일본에서 발간한 책을 읽어 당신네 나라 역사를 안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끙~” 하면서 생각에 잠기더니 “음~ 사실은 우리가 달리 생각하는 안이 있다. 무상 2억 달러, 유상협력기금 형식의 3억 달러, 그래서 전부 5억 달러다”고 털어놨다. 오히라가 처음 꺼내 보인 속내였다.
세 시간 동안 막힌 얘기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오히라의 ‘속내’가 드러낸 금액은 5억 달러. 어느 정도 타결선에 가까워진 셈이었다. 나는 “무상을 3억 달러로 하고, 유상을 2억 달러로 하자. 민간 베이스에서 1억 달러 플러스 알파를 내게 하자”고 제안했다. 오히라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생각했던 ‘5억 달러’라는 카드를 먼저 꺼내 보인 뒤라 대세를 돌이키기는 힘들었다. 결국 내가 제안한 ‘3억(무상)+2억(유상)+1억 플러스 알파(민간)’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 패전국으로 전후 복구가 진행되고 있어 재정이 어려울 때였다. 지불금의 명목을 청구권으로 하느냐 경제협력 자금으로 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나중에 협의하기로 했다. 합의 내용을 틀림없이 서로 박정희 의장과 이케다 총리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히라 외상의 전용 메모지에 합의 내용을 각각 쓰고 서로 대조해 보았다. 마지막 쟁점은 돈을 어떤 방식으로 지불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타결했지만 자금 규모의 합의에 비하면 부수적인 일이었다. 그 내용을 적은 게 바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였다. 메모의 내용은 ‘①무상 3억 달러 ②유상(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 ③수출입은행에서 1억 달러+α를 제공한다’였다.
오히라는 메모를 작성한 뒤 “내가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해도 결국 의회에 가서 보고해야 한다. 당신 입장에선 다다익선(多多益善)이겠지만 나는 이거 잘못하면 쫓겨난다. 그런데 당신의 ‘두견새 울리기’ 얘기를 듣고서 생각을 고쳤어. 내가 졌어”라고 해 함께 크게 웃었다. 나는 “나도 돌아가면 우리 국민들한테 매국노나 제2의 이완용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나는 혁명 때 한 번 죽은 몸이라는 심정으로 이 일에 부딪치고 있소”라고 말했다. 김-오히라 메모의 6억 달러+알파는 65년 양국 외무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 달러로 조정됐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1억3000만 달러)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에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종합제철소인 포철은 입지 선정과 제철기술 도입 등에 내가 나섰다. 동해안을 돌아다니며 항구 건설이 용이한 포항을 제철소 부지로 선택했고,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이 공장 설립과 기술 도입을 도와주도록 했다. 포철은 한국이 세계 5위의 자동차, 세계 2위의 조선 생산국이 되게 하는 결정적인 철강 자재 공급원이 됐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청구권 자금을 나라 세우는 밑천으로 삼겠다는 혁명정부의 구상이 성공해 보람을 느낀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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