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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7> 김종필·오히라 회담 ②

淸山에 2015. 5. 6.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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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력자 고노 “독도, 미해결의 해결 상태로 둬야”
[중앙일보] 입력 2015.05.04 01:30 / 수정 2015.05.04 02:0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7> 김종필·오히라 회담 ②
JP “정일권, 그 얘기 국내 전한 게 독도밀약설로 부풀려져”
정일권과 동행했던 JP형 종락씨
불태웠다는‘밀약 문서’원래 없어
오히라와 독도 대화, 채 10분 안돼
일본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용의”
  

 


1965년 12월 17일 박정희(앉은 사람)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대체 이 서류 몇 개를 가져오는 데 몇 년이 걸린 건가”라고 말했다.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담은 이승만 정부인 51년에 시작돼 14년간 진행됐다. 7차 회담까지 1500여 회 회의가 있었다. 왼쪽부터 정일권국무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 대사, 조상호 의전비서관. [중앙포토]






‘김종필-오히라 회담’은 대일 청구권(對日請求權) 자금의 규모와 조건을 정하기 위한 만남이었다. 우리 둘은 양국 정상에 틀림없이 보고하기 위해 합의안을 종이에 썼다. 나중에 언론은 이것을 ‘김종필-오히라 메모’라고 불렀다. 메모는 오히라 외상의 집무실에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A4 용지를 두 번 접은 64절지 정도)의 메모 용지 1장에 자금의 규모만 간결하게 적은 것이다. 나는 그 조그만 종이에 ‘無償 3억弗, 有償(대외협력기금에서) 2억弗, 수출입은행에서 1억弗+α’라는 내용을 손수 썼다. 오히라 외상도 똑같은 메모지에 동일한 내용을 일본말로 적었다. 우리는 서로 각자가 쓴 메모 내용을 비교,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11월 13일 귀국해 바로 박정희 의장에게 메모지를 보며 회담 결과를 보고했더니 박 의장은 “잘했어. 수고했어”라며 만족해했다. 최근 살펴보니 엉뚱한 기록물(사진 참조)이 내가 쓴 메모인 것처럼 둔갑해 세상에 알려졌다. 2005년 정부가 공개한 ‘김-오히라 메모’는 2장짜리에 한글 없이 영문과 일본어로 된 문서인데 그건 내가 작성했던 메모가 아니다. 어떤 연유로 이 기록물이 ‘김-오히라 메모’로 공개됐는지 나는 의아할 따름이다.


 다시 오히라 회담 얘기로 돌아가자. 일본에서 받아오기로 한 ‘6억 달러+알파’를 어떤 명목으로 할 것인가도 쟁점이었다.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나는 잘못한 일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의 성격을 뜻하는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히라는 ‘경제협력 자금’이란 말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이 문제는 상대가 있는 외교 게임이어서 어느 일방의 뜻대로만 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합의가 되든 일본에선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부를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국회에 가서 보고할 때 청구권이라고 얘기할 거다. 당신이 당신 나라 국회에서 경제협력이라고 부르는 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고 얘기했다. 2년 반 뒤인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협정에서 청구권에 관한 문서의 이름은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정리됐다. 양측의 이해가 함께 반영된 명칭인 셈이다.





 둘이 청구권 메모를 작성하고 회담을 막 끝내려는데 오히라가 뜬금없이 독도(獨島) 얘기를 꺼냈다. 그는 내게 “독도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자꾸 문제가 된다면 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문제는 오늘 회담의 의제가 아니지 않으냐”고 말을 잘랐다. 그가 같은 말을 반복하길래 “마음대로 해라. 우리는 결코 국제사법재판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관련 당사국이 응소(應訴·소송에 응함)하지 않으면 재판을 진행할 수 없게 돼 있다. 나는 “당신들이 무슨 소리를 떠들고 난리를 쳐도 독도는 우리가 실효(實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한테는 줄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고 회담은 마무리됐다. 이게 독도에 대해 나와 오히라가 나눈 대화의 전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네 시간의 회담 중 독도에 대해 우리가 나눈 얘기는 맨 마지막 10분도 채 안 됐다. 이걸 두고 나중에 ‘김종필이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에 방해가 되면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돌아다녔다. 박정희 대통령을 배반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JP가 한·일 회담 때 독도를 폭파하려 했다’는 거짓말이 그 예다.


김종락


  진실과 역사는 한때 왜곡되고 뒤집히는 것 같아도 결국 제자리를 찾게 마련이다. 회담에서 내가 오히라한테 한 독도 얘기는 ‘어떤 경우에도 독도를 당신들에게 내줄 수 없다’고 강조한 비유였다. 오히라 외상은 마지못해 독도 얘기를 꺼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와의 회담 내용을 국회에 나가서 보고하고 추궁받아야 할 처지였다. 국회 출석 때 자기가 독도 문제를 제기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오히라가 이 문제를 회담 막바지에 던졌다고 나는 추측했다. 내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응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는 일본은 국제법에 조예가 깊고 그 재판소에 일본인 판사가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65년 정일권 국무총리가 한·일 회담 최종 타결 전에 나의 셋째 형 김종락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독도 문제를 ‘미해결의 해결’ 상태로 두자는 합의 문서를 교환했다”는 이른바 ‘독도 밀약설’도 헛소문이다. 당시 일본 자민당 8개 사단(파벌)의 계파 지도자였던 고노 이치로(河野一郞)는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실력자였다. 그는 대담하고 배짱이 있는 정치인이었다. 우리에게 ‘고노 담화’(※정리자 주=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제국 육군이 위안부를 강제 모집·운영했다는 사실을 93년 일본 정부가 인정한 담화문)로 유명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의 아버지다. 고노 이치로는 독도에 대해 “그 문제는 시끄럽게 굴 사안이 아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니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말을 정일권 총리가 듣고 와서 국내에 전한 것이다. 정 총리의 얘기가 퍼져가는 과정에서 밀약, 합의서명 같은 허튼소리로 부풀려진 것이다. 정일권 총리는 종락 형님과 함께 일본에 들렀을 때 독도 문제를 합의하지 않았다. 형 김종락은 민간인으로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단지 일본에서 대학을 마친 형의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 정 총리가 “함께 가자”고 해서 동행했던 것뿐이었다. 종락 형님이 ‘밀약 문서’를 갖고 있다가 80년대 신군부의 압수수색을 우려해 태워버렸다는 말이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그 부분도 내가 정밀하게 잘 알고 있는데 형님은 그런 문서를 가진 적이 없었다.



최근까지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알려진 한·일 회담 외교문서. 2005년 외교부가 공개했다.

두 사람이 1962년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이 들어 있긴 하지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작성한 메모가 아니다.

[중앙포토]


  실제 독도에 관한 당시 일본의 분위기가 그랬다. 고노 이치로의 인식에서 드러나는 내용 그대로다. 시끄럽게 떠들어봤자 한국이 독도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독도 문제는 더 이상 크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그 시대 일본 정치인들의 분위기였다. 이를 고노는 ‘미해결의 해결’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일본식 해법’인 셈이다. 결국 한국이 독도를 실질 지배하고 있는 점을 인정하자는 현실적 인식이었다. 그 인식은 합리적이다. 당시 일본의 정계를 좌우하는 실력자들은 적어도 그렇게 여겼다. 독도가 무슨 큰 문제로 떠오른 적이 없었다. 내가 정치의 현역으로 일본을 오갈 때 일본 정치인들이 독도 문제를 제기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이 문제를 들쑤시고 나오는 전후 세대 정치인들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2005년 한·일 수교 40주년을 기념하는 도쿄 연설에서 “일본 지도자들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는 게 최선이고 지금처럼 미해결로 놓아두는 것이 차선”이라고 강조했다.


 독도에 대해선 내가 미국을 방문할 때 나눴던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오히라와 회담 전에 미 국무부와 CIA의 초청을 받아 워싱턴에 갔다. 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인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1919~96)에게 한국에 공여할 최신 전투기를 시험해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번디는 나와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의 무관으로 나와 있던 김두만 장군을 반덴버그(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 카운티) 공군기지로 안내했다. 나는 반덴버그에서 몇 종류의 전투기에 올라타 마하 1.8의 속도로 6만 피트 상공까지 날아갔다. 수직으로 급상승해 6만 피트 높이에 올라가 보니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렜다. 어려서 읽은 천자문(天字文)의 첫 어절 천지현황(天地玄黃·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이 저절로 생각났다. 워싱턴에서 반덴버그를 오가면서 친해진 맥조지 번디와 정담을 나누는 중에 독도가 화제로 올랐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독도를 폭파하면 폭파했지, 일본에 넘길 수 없다. 그들이 전쟁을 해서 빼앗을 생각이면 우리도 전쟁으로 맞서겠다”고 말하자 번디는 내 기개(氣槪)를 알겠다는 듯 마구 웃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정일권(丁一權·1917~94)=만주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육군참모총장과 연합참모본부 총장을 거쳐 57년 예편했다. 63년 외무부 장관을 거쳐 64년 국무총리에 임명돼 70년까지 최장수 총리를 지냈다. 8, 9, 10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됐고 국회의장(73~79년)을 지냈다.


● 고노 이치로(1898~1965)=1960년대 자민당의 실력가.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32년 중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독도는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므로 ‘미해결의 합의’ 상태로 두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농림·건설·국무·경제기획청·행정관리청 장관, 자민당 총무 회장 등을 지냈고 한·일 회담 막후교섭에 나섰다. 64년 이케다 총리가 병으로 물러나게 되자 후임 총재(총리) 후보에 올랐지만 사토 에이사쿠에게 밀렸다. 93년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의 아버지다.


 




청구권만큼 난제였던 어업협상, 막판에 타결
[중앙일보] 입력 2015.05.06 01:35 / 수정 2015.05.06 02:19
‘김 - 오히라 회담’ 후 협정체결까지
이동원 장관, 김동조 대표 마무리
 


이동원(左), 김동조(右)


‘김-오히라 메모’(1962년 11월 12일)로 대일 청구권(請求權) 문제를 해소한 한·일회담은 7차 회담(64년 12월 3일 개시)에서 마무리된다. 마무리 회담의 주인공은 이동원 외무장관과 김동조 수석대표. 51년 10월부터 14년간 단속적으로 진행되던 한·일수교회담은 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협정 조인식으로 끝을 맺는다. 협정안이 우리 국회를 통과해 박정희 대통령이 비준서에 서명한 시점은 65년 12월 7일이다.


 7차 회담의 의제는 한·일 기본 관계와 재일(在日) 한인 법적 지위, 어업협상, 문화재 반환 등이었다. 특히 어업 문제에서 한국 측은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했던 평화선(독도 포함, 기점에서 평균 97㎞) 내 대부분을 관할수역으로 주장했지만 일본은 12해리(약 22㎞)까지를 전관수역으로 하자고 맞섰다. 한국에선 정치권과 대학생 등의 이른바 굴욕외교 반대 시위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기도 했다(6·3사태).


 7차 회담 시작 때 일본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가 이끄는 신내각이 등장하고, 한국 측 수석대표도 김동조 주일대사로 바뀌어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기본 관계 분야에서 한·일 양국은 1910년 병합과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협정의 효력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void)임을 확인했다. 한국 측의 ‘원천 무효’와 일본 측의 ‘51년부터 무효’라는 입장이 외교적 수사로 절충된 것이다. 또 한·일협정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와 관련, ‘유엔의 결의문에 의해 한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한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합법성을 일본한테 인정받은 셈이고, 일본은 유엔의 영향력 바깥에 있는 북한과 별도의 수교협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됐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방한한 일본 시나 외상과 담판하면서 도출한 것이다.


한·일 어민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논란이 컸던 어업협정은 ‘양국이 각각 자국의 연안에서 12해리까지의 수역을 어업전관(專管)수역으로서 설정할 권리를 인정한다’고 합의했다. 어업전관수역 바깥엔 공동규제수역을 완충지대를 두기로 했다. 김동조 수석대표가 협상 대표들을 명망가에서 관료 출신으로 대폭 교체해 효율적으로 협상을 벌인 결과로 평가됐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