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12월 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8·15 계획’을 보고했다. 나는 “민정이양에 대비해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그걸 어떻게 벌써 만드느냐”고 반문했다. 박 의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를 설득했다. “벌써가 아니라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비난이 들어올 게 뻔한데, 각하께서는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최고위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박 의장은 “그래, 해봐”라고 승낙했다.
사전 창당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62년 1월 말 종로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빌딩에 ‘동양화학주식회사’라는 간판으로 사무실을 냈다. 정보부 이영근 차장과 강성원 행정관을 중심으로 각계의 신진 엘리트들을 발굴·포섭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초기 영입 기준은 ‘새 술은 새 부대에’였다. 정치에 가담한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는 참신한 새 인물을 위주로 찾았다.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우리나라가 일어서서 걸을 수 있도록 끌고 나가려면 진보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다. 예춘호 부산 동아대 강사, 황성모 서울대 교수, 서인석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 등이 우리의 ‘재건동지회(再建同志會)’에 참여했다. 윤주영 조선일보 편집국장도 뒤에 합류했다. 시·도지부 책임자로는 서울 김홍식, 부산 예춘호, 경기 이영호, 강원 이우영, 충북 정태성, 충남 정인권, 전북 박노준, 전남 최정기, 경북 김호칠, 경남 박규상, 제주 이승택 등 주로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활동했다.
그때는 부탁하기가 무섭게 우리 뜻에 찬동하고, 함께 일하겠다고 했다. 아마도 ‘이 세력과 한번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싹수가 보였던 모양이다. 나라를 제대로 일으켜세우고 싶다는 욕망들이 잠재돼 있다 기댈 곳이 생기자 대한민국 인물들이 다 모였다. 나는 속으로 ‘이 나라가 될 나라로구나’라고 느꼈다. 선발된 창당요원들은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62년 4월부터 종로구 낙원동의 요정 춘추장에 교육장을 차리고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윤천주 고려대 교수와 김성희 서울대 교수 등이 5·16 혁명이념과 근대화를 지향하는 정당론, 조직론 등을 강의했다.
나는 처음부터 박정희 의장에게 창당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소상히 보고했다. 하지만 박 의장은 내심 우리의 작업을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하는 거냐, 누가 하는 거냐, 의문만 제기했다. 내가 “지금 모여서 논의하고 있으니 사기를 올려주는 의미로 같이 한 번 가시지요. 가서 아무 말씀 안 하셔도 좋습니다”라고 여러 번 권했지만 가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민정이양이 되더라도 상관없도록 창당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작업이 거의 다 돼가던 62년 8월 하순, 박 의장에게 가서 보시라고 다시 권했다. 그날 저녁 사무당원들이 모여 일하던 춘추장에 박 의장이 처음 방문했다. 윤천주, 김성희 교수가 당 규약 작성과 운영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것을 직접 보자 박 의장도 신뢰가 가는 듯했다. “어, 이런 것도 만들었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잘 보십시오. 이 세력을 올라타고서 계속 국가 재건을 하셔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박 의장은 “잘들 해보라”면서 작업팀을 격려해 줬다. 창당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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