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월 1일 최고회의가 금지했던 정당활동을 허용했다. 창당 작업에 참여한 윤천주·김성희 교수가 한목소리로 정 선생을 우리 당에 모시자고 했다. “아주 고지식하고 연만(年晩)하셔서 세상 물정을 다 아시는 그런 분이 당의 리더가 되면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정 선생은 함께 정치를 하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한 뒤였다. 공화당 발기인이었던 의학박사 김성진·윤일선씨가 정 선생의 북아현동 집으로 찾아가 설득했는데, 참신하고 양심적인 새 인물을 모아 신당을 만든다는 우리의 계획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듯했다. 아마도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 선생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참신한 내일에 대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일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월 12일 그가 김동환 전 주미공사의 안내로 태평로 삼영빌딩 3층에 있던 가칭 재건당 창당 준비 사무실에 왔다.
그 자리에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기도 전에 정 선생과 나는 의기투합했다. 67세와 37세라는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린 서로 잘 통했다. 우리는 “세상이 이래가지고 되겠느냐”며 정치에 대해 한참 토론했다. 정 선생은 나를 보고 “이런 사람이 혁명세력에 있었느냐”며 반가워했다. 그는 “혁명을 잘했다. 그런데 처리를 잘해야지, 뒤처리를 잘못하면 역적이 된다”고 충고했다. 그는 이어 “내가 미력을 보태겠다. 같이 하자”고 했다. 그때 내가 정 선생에게 건넨 말이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한 분 남은 선비가 바로 선생님이십니다”였다. 그 말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정치인 정구영은 아무 개인적인 욕심 없이 대나무처럼 곧은 분이었다. 나를 이해하고 귀여워해주신 분이기도 했다. 나중에 상세히 얘기하겠지만 3선 개헌 때도 그는 그의 신념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86년 내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나가 있던 미국에서 돌아와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돌아가신 정 선생의 묘소(충북 영동)였다.
우리가 만든 신당은 한국엔 없던 현대식 정당이었다. 가장 큰 특징이 사무국과 원내(院內)를 나눈 이원(二元) 조직이란 점이었다. 정치학 교수(윤천주·김성희·강상운)들이 각국의 정당조직과 영국 등 선진국 정당의 모델을 연구해 내놓은 안이었다. 우리나라엔 그 전까지 정당다운 정당이 없었다. 자유당과 민주당 시절에 정당이라고 있었지만 조직 기반이 없는 이름뿐의 정당이었다. 사당(私黨) 몇 개가 모여 정당이랍시고 이름을 내걸었다. 명실상부한 공당(公黨)을 만들기 위해 신당은 국회의원과 사무국을 분리하고, 원외(院外)의 사무국이 당의 중심이 되도록 설계했다. 사무국은 창당정신을 계속 끌고 가기 위한 기반이었다.
비례대표제라는 새로운 선거제도도 도입하기로 했다. 나는 윤천주·김성희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혁명 주체 대부분이 이북 출신 실향산민(失鄕散民)입니다. 국회의원을 시키려고 해도 당선될 만한 연고지가 없습니다. 이들이 국회의원이 돼 같이 갈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러자 두 교수가 “비례대표제라는 게 있다”고 아이디어를 줬다. 설명을 듣고서 나는 “참 좋은 생각이다. 실향산민을 구제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후에 비례대표제를 채택할 때 명분은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을 국회에 동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이북 출신 혁명동지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목적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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