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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5> 공화당 창당과 권력투쟁

淸山에 2015. 5. 22. 19:00






박정희 “대선 출마 않겠다” 고집, 세 번 찾아가 설득한 JP…

“공격 목표는 나, 떠나면 조용해진다” 자의반 타의반 외유
[중앙일보] 입력 2015.05.22 01:45 / 수정 2015.05.22 01:5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5> 공화당 창당과 권력투쟁
박병권·김종오 등 반JP 군 수뇌부
“무조건 군으로 돌아가야” 주장
박 의장 민정 불참 선언에 혁명 위기
  
 

1964년 6월 18일 2차 외유를 떠나기 전 김포공항에서 담배를 피우는 김종필(JP) 전 공화당 의장. 오른쪽은 환송을 나온 오정근 전 최고위원. JP는 63년 10월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지 불과 8개월 만에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따른 여론 악화에 책임을 지고 7개월의 2차 외유를 떠났다. 두 차례의 외유로 이후 그에게는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을 둘러싼 내분으로 나는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처지에 놓였다. 당을 만들겠다며 몇 발짝 앞서 뛰던 나의 발목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형국이었다. 이른바 ‘반김종필 진영’이 사사건건 방해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창당 반대 세력은 혁명주체의 원대 복귀를 주장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말고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떠들었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항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박병권 국방부 장관과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가 주동이 됐다. 이들은 나에 대해 터무니없는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일개 중령이 국정을 우지좌지(右之左之)한다. 이 자식을 내쫓아야 한다’며 매사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도 내게 전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각군 참모총장들이 모여 쑥덕공론을 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재춘(육사 5기)·박태준(6기)과 유병현·유양수(7기특별) 등 최고위원들도 민정(民政) 불참과 원대 복귀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럴수록 나는 민주공화당 만드는 일을 마구 밀어붙였다.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다져서 박정희 의장을 뒷받침해드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걸고 한 혁명이 유야무야될 수 있다고 여겼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그러나 박 의장의 마음이 약해졌다. 압력을 의식해 자꾸 그만두려고 했다. 2월 7일, 호남 지역 시찰을 마친 박 의장이 대전에 도착해 나를 호출했다. 나는 밤 11시쯤 유성에 있는 만년장 호텔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내게 처음 밝혔다.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간곡하게 설득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혁명을 왜 했습니까. 다 같이 죽을 각오로, 조국을 본때 있는 나라로 재건하기 위해 혁명을 하지 않았습니까.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만두신다니, 안 됩니다.” 나는 박 의장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설득에 거의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며칠 뒤 박 의장은 마음을 바꿔 또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때마다 내가 달려가서 박 의장 마음을 돌려놓은 게 세 번인가 된다.





 2월 18일 새벽 2시,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을 포함한 3군 총장(이맹기 해군총장, 장성환 공군총장)과 해병대사령관(김두찬) 등이 장충동 의장 공관을 찾아갔다. 이들은 박 의장에게 무조건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박 의장은 “좋다. 나도 그만둘 생각이다”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날 정오, 박 의장이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성명을 발표했다. “재야 정치 지도자들이 9개의 수습 방안을 수락한다면 본인은 민정에 불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불참한다는 것을 대외에 선언한 것이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나는 이 혼란을 수습하려면 내가 잠시 해외로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원대 복귀파의 공격 목표는 결국 나였고, 내가 물러나면 박 의장에 대한 압박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정 불참 성명 이틀 뒤인 2월 20일 나는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민주공화당 산파역이 본인의 소임이 아니라 믿게 되었기 때문에 일체 공직에서 물러나 기꺼이 초야의 몸이 되겠다”는 사퇴 성명을 남겼다. 외유(外遊)를 허락받기 위해 22일 밤, 공관으로 박 의장을 찾아갔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없어져야 되겠습니다. 모든 공격 대상이 저로 돼 있으니, 그 대상이 없어지면 조용해지지 않겠습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던 박 의장이 “그래, 알았어. 그동안 내가 어떻게 수습해 볼게”라고 허락했다. 그간 박 의장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다들 나를 내쫓으라고 야단이었지만, 혁명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박 의장으로서는 나를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 의장은 이런 말로 나를 위로해줬다. “해외에 나간다고 해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고난을 다 겪고 나면 나중에 기가 막힌 향기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매화도 엄동설한 속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야 비로소 그윽이 향기를 사방에 풍긴다’는 뜻의 ‘매경한고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을 인용한 말씀이었다. 이 글귀는 그때부터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1963년 2월 25일 1차 외유를 떠나는 김종필(JP) 전 중정부장이 환송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오른쪽은 부인 박영옥 여사. [중앙포토]


 이튿날 밤, 박 의장의 장충동 공관을 다시 찾아갔다. 박 의장은 대구사범학교 동기동창생인 서정귀씨와 이야기 중이었다. 구정치인인 서정귀(민주당 출신)씨는 박 의장 옆에서 줄곧 “ 다 집어치우고 원대 복귀하라”고 충동질해 온 인물이었다. 그날 밤 내가 갔을 때도 서정귀씨는 “일단 군에 돌아가고, 다시 혼란이 오면 ‘역시 박정희 대장’이라며 모시게 될 테니 그때 다시 나와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박 의장을 설득하던 중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목소리를 높여 대들었다. “서 선생, 당신이 뭔데 옆에 와서 송곳으로 푹푹 찌릅니까. 5·16 혁명이 장난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궐기를 했는지 알기는 합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면 당장 나가시오.” 흥분한 나는 “계속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외유 나가기 전에 그냥 두지 않겠다”고 면박을 줬다. 박정희 의장을 향해서도 큰소리로 말했다. “민주공화당은 예정대로 26일 창당될 겁니다. 제가 없더라도 창당 선언을 하고 공화당이 일어서거든 올라타십시오. 제가 없다고 공화당이 흐지부지되면 공화당을 버리고 새로 당을 만들어 끌고 가십시오. 보십시오. 결국은 의장께서 공화당에 업혀서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전 그렇게 믿고 나갑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1시였다. 집에 가려는 나를 박 의장이 붙잡았다. 그리고 “이 사람도 나를 생각해서 한 얘긴데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라며 나를 진정시켰다. 우리 셋은 새벽 3시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2월 25일, 얼마가 될지 모를 외유를 떠나는 날이었다. 최고회의 의장의 ‘특명 전권 순회대사’라는 직명으로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았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중앙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들이 “왜 외유를 떠나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오.” 이 대답을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후에 8선 의원·국회의장)가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이라고 기사로 옮겼다. 이 말은 이후 나를 따라다니는 신조어가 됐다. 김포공항엔 수십 명의 내외신 기자를 포함해 200여 명의 환송객이 모여들었다. 나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 두고 보라. 공화당은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환송을 나온 딸 예리가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애써 밝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김포공항발 도쿄행 노스웨스트기에 올라탔다. 대동한 수행원은 오정근 최고위원(8기·예비역 준장)과 김홍래 보좌관(예비역 대령), 김상인 통역관(예비역 중령)뿐이었다.


 



 2월 26일 민주공화당은 서울 시민회관에서 대의원 13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당 총재로 정구영 창당준비부위원장이, 당의장으로 김정렬 전 국방장관이 선출됐다. 나는 일본 도쿄에서 민주공화당이 무사히 창당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장담한 대로 공화당은 나 없이도 흐지부지되지 않고 굳건히 일어섰다. 결국 박정희 의장은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와서 대통령이 된다. 나는 그때 멀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선을 지켜봤다. 나의 ‘1차 외유’는 박 의장이 대통령에 선출(63년 10월 15일)되고 1주일이 지난 10월 23일 끝났다. 떠날 땐 50일 정도를 생각했던 외유에서 돌아오는 데 8개월이 걸렸다.



● 인물 소사전  서정귀(1917~74)=경남 통영 출신으로 대구사범과 경성법전을 졸업했다. 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60년 5대 의원 당선 뒤 장면 내각에서 재무부 정무(政務)차관을 지냈다. 5·16으로 중단됐던 정치활동을 63년 재개하면서 야당인 민정당에 참여했다.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64년 5월 야당을 떠나 부산 국제신보 사장이 됐다. 이후 흥국상사 사장·회장에 이어 호남정유 사장을 지냈다. 부인은 농구선수 출신인 고 윤덕주 전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반혁명 사건 후 권력의지 살아난 박정희…대장으로 전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중앙일보] 입력 2015.05.22 01:46 / 수정 2015.05.22 01:49
JP 1차 외유 중 국내 정치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닦는 박정희 의장. 왼쪽 뒤편은 박종규 경호대장. [중앙포토]


민주공화당 창당 이튿날인 1963년 2월 2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정치인, 군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정국 수습을 위한 선서식’이 서울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열렸다. 박정희 의장은 목메인 목소리로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치권은 그의 발언을 대선 불출마로 받아들였다.

 박정희 의장의 권력의지가 되살아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월 11일 김동하·박임항 등 혁명주체들이 연루된 쿠데타 음모 사건이 발표됐다. 이어 3월 15일엔 현역 군인 80여 명이 최고회의 앞에서 ‘군정 연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 박 의장은 사회혼란을 이유 삼아 “군정 기간 4년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반전(反轉) 스케줄을 내놨다. 민주공화당을 포함해 정치권은 물론 미국까지 거세게 반발하자 박 의장은 4월 8일 군정연장안을 철회한다는 성명을 냈다. 최고권력자의 민정불참→군정연장→취소로 정국이 요동치는 와중에 박 의장은 민간인으로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김종필 없는 민주공화당은 흔들렸다. 해체하려는 움직임까지 나왔다. 김정렬 공화당 초대 당의장은 훗날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 “박정희 의장이 공화당 해체를 지시했으나, 4월 8일 발표 직전에 취소했다”고 썼다. 그 뒤엔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지원하는 ‘범국민정당’이 세를 확장했고, 5·16 주체들의 모임인 ‘5월동지회’도 지방 조직을 구축했다. 친여 정치세력들의 경쟁력을 저울질하던 박 의장은 7월 4일 최종적으로 공화당을 선택했다.

 박 의장은 8월 30일 강원도 철원의 제5군단 지포리 비행장에서 육군 대장 전역식을 가졌다. 그는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의장 공보실에서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은 “군인을 향해 ‘군사혁명을 일으키지 말라’는 훈시이면서, 국민과 정치권에 ‘군인이 나올 상황을 조성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였다”고 설명했다. 박 의장은 그날 오후 공화당에 입당하고 이튿날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한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