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8월 부평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중앙포토]
증권파동은 62년 5월 증권가에서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이 단시간에 급등한 뒤 거품이 꺼지면서 5000명이 넘는 투자자가 큰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다. 증권시장에 내가 관여한 건 사실이다. 혁명 직후 경제개발을 위한 내자(內資) 동원 차원에서 자본시장을 획기적으로 활성화해 보자는 게 내가 관여한 이유였다. 당시 국내 증시는 유명무실했다. 상장된 기업이 십여 개에 불과했다. 선진국처럼 기업이 증시를 통해 자본을 조달하는 체제를 만들고 싶었다. 61년 말 공화당 사전조직의 실무자인 강성원·정지원 소령에게 이 일을 맡겼다. 강 소령은 증권업계에서 투자의 귀재로 소문난 윤응상씨를 만났다. 의논 끝에 증권회사를 2~3개 만들어 시장에 힘을 불어넣기로 했다고 한다. 증권사를 만드는 데 돈이 필요했다. 강 소령은 농협이 가지고 있던 한국전력 주식을 빌려 이를 사고팔면서 자금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통일·동명·일흥 3개 증권사를 설립했다. 이후 증권투자로 도중에 돈이 생기고 하니까, 이 돈의 일부를 당에 들여놓은 모양이다.
나는 당시 보고를 받지 못했고 액수가 얼마인지도 몰랐다. 수많은 투자자가 막대한 피해를 본 증권파동에 대해 이 사건에 개입한 부서의 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 선의로 출발했고 내가 몰랐다 하더라도 정보부가 무리한 일을 벌여 국민에게 고통을 준 건 사실이다.
새나라자동차를 기획한 사람도 나다. 당시 동양에서는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가 일본뿐이었다. 일본에서 적당한 차를 가져와 자동차 공업을 일으키고 외국인 관광객도 유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일본 닛산을 찾아가 실마리를 텄다. 61년 12월 정부는 일본 닛산의 소형차 블루버드를 부품 형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 시판하기로 했다. 우선 관광용으로 블루버드 완제품 250대를 면세로 도입하기로 했다. 당시 재일교포 실업가 박노정씨가 전체 자본금 1억원 중 30%를 대고, 70%는 은행융자로 해서 새나라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
부평에 연간 60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65년 6월 22일 조인)가 되기 전이라 박노정씨가 대겠다는 자금을 국내로 들여올 수 없었다. 한·일 수교 뒤 들여오는 조건으로 한일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공장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박노정씨가 “돈을 못 대겠다”며 손을 들어버렸다. 박씨는 그동안 800만원만 댔고 미국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이 때문에 새나라자동차는 63년 5월까지 2700여 대 차를 생산하고 중단했다. 회사가 망한 것이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은 내가 공장 설립과 차량 생산 과정에서 20억원의 정치자금을 빼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의혹도 부정도 있을 수 없다. 돈을 대던 사람이 미국으로 도망간 판에 어떻게 수십억원을 빼돌릴 수 있겠는가.
어쨌든 새나라자동차는 뒤에 국산 자동차 생산에 불을 붙였고, 오늘날 세계 4~5위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부평공장에서 조립한 새나라자동차 1호차가 나왔을 때의 추억이 있다. 62년 8월 27일이다. 내가 부평에서 직접 운전해 청와대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옆에 모시고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늦은 해가 진 뒤 종로에는 동대문까지 가로등(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박 대통령이 “이런 가로등이 시내 도로 전체에 세워져 불을 밝힐 때가 언제쯤일까. 불 켜진 가로등을 보니 환하고 좋네…”라며 웃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전기도 가로등도 없던 시절의 풍경이다. 정치에선 동기보다는 나타난 결과가 중요하다는 점을 난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의혹’이란 글자가 붙은 일이 국민을 일시나마 괴롭혔던 결과에 대해 나 자신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