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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2> 민주공화당의 탄생

淸山에 2015. 5. 15. 06:39






“국민, 혁명에 싫증내기 전 신당 만들자”

중정부장 사퇴한 JP…“여기 올라타 대통령 되셔야”

 박정희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중앙일보] 입력 2015.05.15 02:04 / 수정 2015.05.15 02:1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2> 민주공화당의 탄생
 


6대 대선이 열린 1967년 5월 3일 밤, 서울 소공동 민주공화당 중앙당사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의장실에서 김종필 당의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낙승을 예상한 듯 두 사람의 표정이 밝다. [중앙포토]


혁명정부가 의욕적으로 일을 벌여나가던 1961년 여름이었다. 내 머릿속엔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의 혁명과업을 이어받을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군인이 주가 되는 혁명조직을 가지고는 나라를 길게 이끌어갈 수가 없다. 머지않아 국민들이 싫증낼 게 뻔했다. 우리보다 앞서 혁명을 한 터키나 이집트를 봐도 그랬다. 군인조직이 이끌어 가는 통치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은 원래 쉽게 변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혁명세력에 질리기 전에 민간 정부로 이양(移讓)해야 한다. 혁명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국민의 지지를 얻어 민간 정부로 넘어가는 게 혁명 성공의 관건이라고 본 것이다.


 61년 8월 12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63년 3월 이전에 새 헌법을 공포하고, 5월에 총선거를 치러 63년 여름까지 정권을 민간에 넘긴다는 계획이었다. 며칠 뒤 나는 석정선 정보부 제2국장과 강성원 행정관을 불렀다. 민정이양 뒤에도 구정치인이 아닌 깨끗하고 유능한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아 혁명과업을 승계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


 61년 10월 말, 석정선 국장이 내게 보고서를 냈다. 정보부 정책연구실 연구위원인 윤천주 고려대 교수와 김성희 서울대 교수 등이 짜낸 안이었다. ‘구정치인의 집권을 막으려면 혁명 주체세력이 정권을 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보고서 표지에 ‘8·15 계획’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5·16 직후 혁명정부가 내놓은 포고문에 따라 정당의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있었을 때다. 당을 만드는 것 역시 금지된 일이었다. 하지만 민정이양 이후에도 혁명정신을 이어가려면 전국 단위의 강력한 정당이 필요했다. 나는 이 일이 혁명과업의 일환이라고 믿고 내가 앞장서기로 했다. 어떤 욕을 먹더라도 몇 발짝 앞서나가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나중에 공화당을 불법으로 사전 조직했다고 비난도 받았지만, 그때 나는 앞만 보고 마구 달렸다.





 61년 12월 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8·15 계획’을 보고했다. 나는 “민정이양에 대비해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그걸 어떻게 벌써 만드느냐”고 반문했다. 박 의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를 설득했다. “벌써가 아니라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비난이 들어올 게 뻔한데, 각하께서는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최고위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박 의장은 “그래, 해봐”라고 승낙했다.


 사전 창당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62년 1월 말 종로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빌딩에 ‘동양화학주식회사’라는 간판으로 사무실을 냈다. 정보부 이영근 차장과 강성원 행정관을 중심으로 각계의 신진 엘리트들을 발굴·포섭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초기 영입 기준은 ‘새 술은 새 부대에’였다. 정치에 가담한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는 참신한 새 인물을 위주로 찾았다.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우리나라가 일어서서 걸을 수 있도록 끌고 나가려면 진보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다. 예춘호 부산 동아대 강사, 황성모 서울대 교수, 서인석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 등이 우리의 ‘재건동지회(再建同志會)’에 참여했다. 윤주영 조선일보 편집국장도 뒤에 합류했다. 시·도지부 책임자로는 서울 김홍식, 부산 예춘호, 경기 이영호, 강원 이우영, 충북 정태성, 충남 정인권, 전북 박노준, 전남 최정기, 경북 김호칠, 경남 박규상, 제주 이승택 등 주로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활동했다.


 그때는 부탁하기가 무섭게 우리 뜻에 찬동하고, 함께 일하겠다고 했다. 아마도 ‘이 세력과 한번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싹수가 보였던 모양이다. 나라를 제대로 일으켜세우고 싶다는 욕망들이 잠재돼 있다 기댈 곳이 생기자 대한민국 인물들이 다 모였다. 나는 속으로 ‘이 나라가 될 나라로구나’라고 느꼈다. 선발된 창당요원들은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62년 4월부터 종로구 낙원동의 요정 춘추장에 교육장을 차리고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윤천주 고려대 교수와 김성희 서울대 교수 등이 5·16 혁명이념과 근대화를 지향하는 정당론, 조직론 등을 강의했다.


 나는 처음부터 박정희 의장에게 창당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소상히 보고했다. 하지만 박 의장은 내심 우리의 작업을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하는 거냐, 누가 하는 거냐, 의문만 제기했다. 내가 “지금 모여서 논의하고 있으니 사기를 올려주는 의미로 같이 한 번 가시지요. 가서 아무 말씀 안 하셔도 좋습니다”라고 여러 번 권했지만 가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민정이양이 되더라도 상관없도록 창당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작업이 거의 다 돼가던 62년 8월 하순, 박 의장에게 가서 보시라고 다시 권했다. 그날 저녁 사무당원들이 모여 일하던 춘추장에 박 의장이 처음 방문했다. 윤천주, 김성희 교수가 당 규약 작성과 운영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것을 직접 보자 박 의장도 신뢰가 가는 듯했다. “어, 이런 것도 만들었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잘 보십시오. 이 세력을 올라타고서 계속 국가 재건을 하셔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박 의장은 “잘들 해보라”면서 작업팀을 격려해 줬다. 창당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1963년 1월 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육군 준장으로 전역한 김종필(JP) 전 중정부장에게 1등보국 훈장 통일장을 수여하고 있다. JP는 신당 창당을 위해 중정 부장직을 사퇴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63년 1월 1일, 정치활동 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1월 5일 나는 박 의장을 찾아가 중앙정보부장 사임서를 제출했다. 박 의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당 때문에 그렇지?”라고 했다. 정당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는 안 것이다. 나는 “그렇습니다. 혁명정신이 계속되느냐 좌절되느냐, 각하께서 대통령이 되시느냐 안 되시느냐 이 모든 것이 당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당 만드는 데 전력을 쏟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의장은 “그러면 정보부는 어떻게 하지? 누가 임자만큼 정보부를 잘 끌고 갈까?”라고 물었다. 나는 “정보부는 각하가 신임하는 사람을 임명하면 그대로 갈 것입니다. 잘하실 걸로 믿고 저는 당으로 이사합니다”라고 했다. “신당을 타고서 각하가 대통령이 되셔야 합니다”라는 내 말에 박 의장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틀 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면서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뒀다. 내 후임 정보부장은 김용순 최고위원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1년6개월 만에 스스로 내려왔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그때 내겐 정당 만드는 일이 중앙정보부 일보다 더 크고 중요했다. 강력하고 유능한 정당을 만들겠다는 각오에 차 있었다. 박 의장이 대통령이 돼서 조국 근대화 과업을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보부가 아니라 정당의 뒷받침이 더 절실하다고 여겼다.

 1월 10일부터 창당작업을 공개하고 본격적으로 발기인(發起人)을 선정했다. 처음 당명은 가칭 ‘재건당’이었다. 재건당 1차 발기인으로는 혁명주체 세력인 김동환과 김정렬, 정치인 중 박현숙·서태원, 학계의 윤일선 등도 참여했다.


 신당의 당명이 ‘민주공화당’으로 결정된 건 1월 18일이었다. ‘민주공화당’ 작명은 창당준비위원장인 내 아이디어였다.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 그 두 이름을 모두 따다 쓰자고 제안했다. 다들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그땐 ‘미국같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 나의 모토였다.


 ‘공화(共和)’라는 말에는 프랑스혁명에서 내세운 공화주의의 정신도 담겨 있었다. 민주공화당이란 이름으로 63년부터 79년까지 16년간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만드는 일을 뒷받침해 드렸다. 요즘 정당들은 당명이 수시로 바뀌는데, 선진국에선 한 이름으로 정당이 몇십 년씩 간다. 나라가 그런 중후한 면이 있어야 국민들도 믿고 의지하고 살지 않겠나 싶다.


 당의 상징은 소로 정했다. 미국의 민주당은 당나귀, 공화당은 코끼리가 상징이다. 그걸 보고 우리도 그런 상징물이 하나쯤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동물 중에도 소로 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소는 살아서는 묵묵히 주인을 위해 일하고, 죽어서는 발톱까지 남김 없이 다 바치는 동물이다. 소처럼 헌신적으로 일해서 국가와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정당이 되자는 뜻을 담았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소띠다. 당을 만든 사람이 소띠이니 소가 자연스레 상징이 됐다.



● 인물 소사전 윤천주(1921~2001)=일본 도쿄대 정치학과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5년간 고려대 정경대 교수로 재직했다. 실증적 연구방법론을 도입해 한국 정치학 발전에 기여했다. 선거에서 ‘여촌야도(與村野都·여당은 농촌, 야당은 도시)’ 현상을 발견했다. 민주공화당 창당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고, 63년 공화당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64년 문교부 장관에 발탁됐고, 7대 국회의원(67년·전국구)과 부산대와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정리=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


 



JP “자유당 정권 왜 망했다고 보나” 예춘호 4시간 면접
[중앙일보] 입력 2015.05.15 02:06 / 수정 2015.05.15 02:12
공화당 창당요원 예 전 의원 증언
 

“앞으로 군사정부가 큰일을 하는 데 관계해 달라.”


 1962년 초 부산에서 대학강사로 일하던 예춘호는 박규상 동아대 교수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에 동참하라는 뜻이었다. 5일 용인시 자택에서 만난 예춘호(88·사진) 전 의원은 “그땐 비밀 유지를 위해 ‘정당 사전조직’이라는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설득해 끌어모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재건동지회’에 가입해 부산·경남 지역의 책임자 요원을 맡았다.


 그를 포함한 중앙과 지방의 모든 사무국 요원들은 서울의 춘추장에서 실시된 1주일간의 교육훈련에 참여했다. 훗날 반 JP 세력이 ‘공산당식 밀봉교육’이라고 공격했던 그 교육이다. 그는 “윤천주·김성희 교수 등이 각국의 정당론과 한국 정치현실에 대해 특강한 뒤 5~6명의 분단별로 토론을 벌이는 워크숍 형태였다” 고 말했다.


 예춘호 전 의원은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을 높게 평가한다. “정보부는 과거 12년간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석해 앞으로 누가,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할지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62년 11월 그는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과 부산 동래관광호텔에서 처음 만났다. JP가 지방을 돌면서 이영근 정보부 차장 등 실무팀이 선발한 각 지역 책임자들을 일일이 면담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JP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4시간 동안 JP는 주로 질문만 던졌다. 자유당 정권은 왜 망했다고 보느냐, 나라가 잘 살려면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을 물었다. 나는 평소 생각하던 바를 소신껏 말했다. 대화가 끝나자 JP 옆에 있던 사람이 ‘이 정도면 됐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김형욱 최고위원이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부산시 사무국 책임자가 되는 그는 대표적인 JP 사람이었다. 공화당 소속으로 6, 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하지만 69년 3선 개헌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JP와 결별한다.


정리=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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