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측에 붙어있던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을 공격하기 위해, 소아시아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여 벌인 전투. 세계 전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삽질작전 중 하나로 명성이 높다.
터키어로는 가까이에 차낙칼레라는 대도시가 있기 때문에 차낙칼레 전투(Çanakkale savaşı)라고 칭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갖는다. 증조할아버지 시절엔 총부리를 겨눴던 사람들이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고(…). 오스만 제국어로는 Harb-i Umum-i Çanakkale(하르비 우무미 차낙칼레).
영국군이 중심이 되어, 호주와 뉴질랜드로 구성된 앤잭군(ANZAC, Australia and New Zealand Army Corps)이 참전했다.
당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독일에 대항하는 연합이었는데, 오스만 제국과 독일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고 독일 군사고문단의 지도를 받아 근대화를 하자 곧 이들이 오랜 숙적인 러시아와 싸울까봐 걱정이 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선수를 치기로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러시아가 생각보다 못 싸워주면서 러시아와의 연결선인 다르다넬스 해협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있었다.
이 때, 오스만 제국군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지배받아온 식민지 사람들이 저항을 벌이면서 내부 문제부터 시급했는데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파병하면서 거대한 적군들과 죽기살기로 싸워야 했으며, 군 상층부들은 이 와중에 자기 배를 채우느라 오스만군 작전지휘체제도 상당수 동맹국인 독일 제국 장군들 지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스만 사병들은 당연히 이방인인 이들 장군 지휘를 잘 따르지 않았기에 그들도 엉망이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 장군이던 잔더스 대장이 바로 이 차낙칼레 주둔 오스만군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도 오스만 사병들이 그다지 따르지 않았기에 곤란해했는데, 무스타파 케말 대령(바로 훗날의 아타튀르크)이 잔더스 대장의 지휘안을 잘 조율하면서 참모장 격으로 오스만군을 잘 다독였기에 그가 사실상 사령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잔더스 대장도 이 30대 후반의 젊은 대령을 꽤 높이 평가했다.
작전 시작 자체가 오해가 좀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당시 해군장관(First Lord of Admiralty, Board of Admiralty[1]를 총괄하는 직책) 윈스턴 처칠은 십수 척의 전함과 수십 척의 수송선, 순양함 등으로 이뤄진 대함대를 몰고 적의 저항을 간단히 씹으며 그대로 터키 해안으로 쳐들어가 단숨에 병력을 상륙시켜서 최종적으로는 이스탄불까지 밀어버린다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상륙 당일인 2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요새를 공격했지만, 이미 이곳을 요새화하고 있던 잔더스 대장 지휘 아래, 오스만군의 요새포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다. 결국 1주일간 포격전 끝에 영국 해군 전함은 3척이 침몰하고 다수의 순양함 등이 격침당해 피해가 상당한 지경에 이르렀다. 연합군 함대가 입은 피해의 다수는 포격이 아닌 기뢰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스만군의 포격이 무력한 것은 아니다. 당시 연합군 해군도 오스만군이 해협에 잔뜩 깔아둔 기뢰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당시 기뢰 제거를 담당한 함선들은 징발된 민간인 함선들에 민간인 승무원들이 담당 하고 있었고, 이들이 오스만군의 포격에 겁먹고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기뢰제거는 영영 불가능해지고 만다. 결국 영국군 함대지휘관 카든이 작전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었고, 다시 3월 18일 2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16척 중 5척이 침몰하는 참담한 실패였다. 결국 이번에는 영국함대 총사령관인 피셔 제독이 처칠에 대한 불만표시로 사퇴해버렸고, 당연히 처칠도 그 책임을 물어서 잘렸다.
물론 해군의 포격으로 오스만군 역시도 피해가 적지 않아 그대로 밀어 붙이면 싸움을 해볼 만했으나, 처음 처칠이 강행했을 때부터 해군 단독 작전이었기 때문에 상륙할 육군 자체가 없었다. 영국군 중동 사령관 해밀턴이 해군을 도와서 진격한다는 육해군 연합작전으로 변경한 것이 이미 1차 공격이 실패한 3월 12일이었고, 준비부족 때문에 2차 공세가 실패할 때에는 병력 자체가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결국 상륙작전은 4월 25일에나 펼쳐졌고, 오스만 제국군은 병력을 회복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그 6주간의 시간 동안, 케말 대령의 오스만군은 보충병을 받아들여 다시 한번 전투력을 회복한 뒤였다. 이 때 추가로 충원된 오스만군 병력이 10만. 요새포와 해안포도 다시 재구축했기 때문에 앞서한 공격은 완전히 헛짓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와중에 케말 대령은 사병들을 모아두고 연설을 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싸워라가 아닌 죽기 위하여 오늘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그리고 상륙작전은 뒤늦게 다시 강행된다. 그런데 영국군은 해안에 첫발을 디딘 뒤에야 이 지역이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임을 깨닫게 된다. 해안의 폭이 워낙 좁아서 상륙한 영국군은 그 자리에 못박힌 채 고지대에 위치한 오스만군의 대포와 기관총에 맞는 지경이었음에도 영국군은 당초 계획대로 병력을 차분히 그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렇게 쳐발리던 와중 결국 수뇌부에서 내놓은 작전이 야포들을 이용한 포격으로 화망을 형성해서 오스만군을 참호에서 교착시키고 그때 그나마 좀 상태가 멀쩡한 오스트레일리아 보병사단이 일제히 고지로 돌격해서 참호를 뺏고 전진한다는 아주 지극히 간단해보이는 작전이었다. 의도는 좋았고 성공 가능성도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막상 작전개시 하는 날에 하필 야포를 지휘한 사령관과 보병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시계가 싱크로되지 않았다! 해군의 함포사격은 애저녁에 끝나버렸고, 함포의 화망을 바탕으로 돌격했어야 할 육군이 튀어나왔을 때에는 이미 해군의 엄호사격은 다 끝난 뒤였다. 만일 여기서 다시 야포사격을 하고 보병대가 돌격했으면 될 수도 있었으나 외부의 전황을 모르는 최고사령부는 그냥 씹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은 몇 m도 달리지 못하고 기관총의 화망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결국 단 하루만에 오스트레일리아 사단 중 8천명이 무인지대의 백골이 되었고 1만 8천 명은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상륙지점에서 단 1마일도 전진하지 못하고 해안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물조차도 현지에서 보급하지 못해 멀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실어오는 물탱크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영국군은 병력을 끊임없이 축차 투입하였고, 당연히 박살이 나는 수순을 무한 반복했다. 전투가 중반을 넘어서자, 오히려 오스만 군이 요새에서 튀어나와 연합군을 해안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하마터면 연합군은 해안가에 상륙시킨 병력이 몰살당할 뻔한 상황까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군 57연대는 총알도 포탄도 모두 바닥이 났지만 그들 모두는 "오늘 우린 죽기 위하여 싸운다!"을 외치며 착검돌격을 가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론 이들은 착검돌격 전에는 정말로 돌을 내던지면서 싸웠다고 한다. 이때 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Hüseyin Avni Bey)가 장검을 쳐들고 맨 먼저 달려나갔고, 연합군의 총격에 그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부연대장이 연대장의 장검을 쳐들고 진격했다. 대장부터가 이렇게 솔선수범을 보이니 사기가 오른 연대원들도 착검돌격하여 결국 전원 장렬히 전사했다. 이 집념어린 착검돌격에 연합군의 피해도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육상돌격을 머뭇거리게 된다. 사실 연합군이 병력 피해를 감안하고 묻지마 돌격을 했더라면 승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오스만군은 당시 총알부족 및 여러 문제에 빠졌지만 연합군들이 신중을 기하느라(물론 이들도 위에 열거한 여러 사정과 문제도 있었지만) 오스만군은 총알 및 무기 보급을 받을 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중에 아타튀르크는 이 57연대 전원의 용기어린 활약으로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기리면서 연대장의 이름을 딴 훈장을 제정하고 이 연대를 명예부대로 헌사했다. 하지만 부대를 재건하지 않고 영원한 명예부대로만 남겨뒀다.
그리고 몇달에 걸쳐 결국 지지부진한 소모전 끝에 연합군 사령관 해밀턴이 해임되었고, 후임인 찰스 먼로는 이듬해인 1916년 1월 작전실패를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해야 했다. 8개월 넘게 끈 이 전투로 연합군은 총병력 57만 가운데 30만 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했고, 오스만군 32만 또한 1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터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국의 전투.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의 해외 영토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갈리폴리에서 승리함으로서 본토까지 점령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결국 터키 국내는 별다른 피해없이 온존될 수 있었고, 전후에 벌어진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배후지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5]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전투의 결과를 터키의 승리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당연히 영웅이 된 케말은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이후로 군에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과 세력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힘을 가지게 된다. 그 뒤 무너져 가는 오스만 제국을 쿠데타로 뒤집어 엎고 귀족정치와 부패를 척결하였다. 그후 새로 탄생한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터키의 국부로 지금까지도 칭송받고 있다.
반대로 윈스턴 처칠에겐 쿠르드족 독가스 학살 명령과 더불어 정치인생에서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처칠의 정적들은 "처칠의 오만함이 보기 싫다면 갈리폴리라고 말해라, 그러면 대꾸도 못한다." 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실제로 처칠은 이 말만 들으면 엄청 화를 냈고 친구들은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는 고전적인 상륙작전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고, 이후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소규모 상륙전 경험과 이 전투의 교훈을 토대로 신개념 상륙함을 건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개삽질의 주범인 영국은 여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그냥 흑역사 취급을 하기에 바빴다.
이 전투는 영국뿐 아니라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안작군(호주+뉴질랜드군)이 약 1만명 정도였는데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의 총 인구수가 다 합쳐도 5~6백만 정도밖에 안되었던걸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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