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노서리 호우총에서 나온 ‘청동호우’에 새겨진 글자는? 동아일보 입력 2015-04-26 14:02:00 수정 2015-04-27 09:58:41
1945년 12월 3일 새벽. 경복궁에 흰 눈이 쌓였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이날 박물관이 개관하면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 부산 행 열차표까지 어렵게 구했건만, 미군정은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억류기간 연장을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안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근무하던 전문직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교토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박물관에 채용된 아리미츠는 관장에 해당하는 주임으로 일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다른 직원들은 9월 21일자로 파면되었지만 그만 홀로 남아 박물관 업무의 인수인계를 담당했다. 그 임무가 끝난 12월 3일 그에게 새로 부여된 임무는 박물관 한국 직원들에게 고고학 발굴기술을 전수하는 일이었다. 독일에서 중국고고학을 전공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정에 부탁했다는 후문이다.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그릇)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3그는 김 관장에게 경주 노서리 소재 140호분의 발굴을 추천했다. 과거 경주 근무 시절부터 발굴하고 싶었던 무덤이었다. 발굴을 개시한 것은 1946년 5월 3일. 그 소식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전파됐고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매일 현장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발굴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그릇). 밑바닥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발굴 시작 8일째인 5월 10일. 무덤 위의 돌무지를 하나 둘씩 걷어내고 발굴자의 손길이 무덤의 바닥에 미쳤을 때 금동관 조각과 귀걸이가 주인공의 머리 쪽에 놓여 있었고, 머리맡엔 뚜껑 덮인 청동 호우(그릇)이 1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보통 그릇처럼 보여 별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그릇을 들어내다가 그릇 바닥에 글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 관장을 비롯한 조사단원 모두는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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