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한국 선장으로선 처음으로 24만 톤급 VLCC 천우호를 몰고 말래카 해협을 지난 김태덕씨(45세 아세아상선)는 두 해 전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저와 해저 사이의 여유가 1미터도 안 된 적이 있었습니다. 수심 측정기를 들여다보면 배 밑창이 해저에 붙은 것처럼 나오지요. 이럴 때 배가 흔들린다든지 파도가 치면 박살이 안 나고 견디겠습니까?" 코리아 배너 같은 배들은 홀수가 20미터를 넘는다. 해면이 가장 높아지는 밀물 때를 기다렸다가 그 大潮期(대조가)를 틈타 황급히 얕은 길목을 빠져나가기도 한다. 이 때 선장들은 '해도야, 제발 틀리지 말라'고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그들의 행동은 해도에 나타난 수심(해도의 수심은 해면이 가장 낮아졌을 때의 깊이)의 정확성을 근거로 하여 결정된다. 水深(수심)측량은 해저를 훑는 게 아니다. 몇 군데의 표본조사라는 한계성을 갖고 있다. 해저의 이변으로 모래톱이 생기거나 바위가 굴러와 있을 수도 있다. 말래카 해협의 인도네시아쪽 수심 자료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정평으로 되어 있다. 이 해협의 수심 표시는 세계 최고의 권위인 영국 해군 水路局(수로국) 것보다 일본 수로국의 海圖(해도)가 더 정확하다고 한다. 일본은 해협 연안국과 합동으로 해마다 이곳의 水深측량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의 유조선들이 가장 많이 이 해협을 이용하고 있는 데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오후 5시30분 '동해'는 두 말뚝 사이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빨강 부이를 통과하면서 李 선장은 變針(변침) 지시를 내렸다. 107도에서 116도로, 107도 방향으로 곧장 가면 5킬로미터 앞에 있는 또 다른 침몰선 부근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 침선은 해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부근은 수심 15∼18미터. 이 제2의 침선 바로 남쪽에는 제3의 침몰선이 묻혀 있다. 첫 관문을 통과한 동해는 두 번째 난관인 침선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고 그래서 5킬로미터를 앞두고 변침한 것이었다. 곧은 물길이 배 꽁무니에서 큼직한 원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두 침선 사이의 거리는 약 1000미터. 투수 이덕인 선장는 5킬로미터 앞에서 공을 던져 1킬로미터 너비의 스트라이크존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공이 길이가 330미터. 너비가 50미터나 되고 반응 신경이 무딘 놈이란 점이었다. 다행히 李 선장은 20년 동안의 바다생활 중 백 번 이상 여기서 그런 투구를 해 본 사람이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민한 감각으로 그는 이 둔중한 괴물을 부드럽게 몰이해 갔다. 李 선장은 두 시간에 걸쳐 세 곳의 관문을 더 통과해야 했다. '동해'는 노련한 조련사의 지휘를 받는 코끼리처럼 외길 항로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가며 다섯 개의 바늘구멍을 항로라는 굵은 실로 차례차례 꿰어 갔다. 구슬 꿰기가 대충 끝난 것은 밤 8시가 넘었을 때였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李 선장은 어둠이 깔린 해협을 항해사에게 넘겨주고 브리지를 떠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제부터 싱가포르까지엔 별 문제가 없으리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남은 건 필립 채널 하나다. 그는 이번의 시험에서도 무사히 합격한 안도감에 잠시 젖었다. 그러나 내일의 시험은? 유조선 선장에겐 오직 백전백승이 있을 뿐임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백전 99승 1패는 뱃사람들에겐 파멸을 뜻한다. 그는 오늘밤도 다리 뻗고 자기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직 2차 시험이 남아 있지 않은가. ..................................... 夜食(야식)이 나왔다. 떡과 감주. 원 패덤 뱅크의 '바늘구멍'을 무사히 통과한 2월15일 밤이었다. '살롱' 이영우씨가 선실을 돌면서 배달해 주기도 했다. '살롱보이'라는 애칭을 가진 李씨는 서른 살의 '어른'. 앳된 童顔(동안)으로 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船室(선실)의 청소, 船內(선내) 매점운영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줄곧 유조선만 타느라고 婚期(혼기)까지 놓쳤다고 했다. 夜食은 배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울산 출항 때 실어 보관한 것이었다. 취사부는 3, 4일에 한 번쯤 야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동해 2호 선원들은 한결같이 '사주장을 잘 만났다'고 했다. '船內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선장과 사주장이다'는 말이 있다. 사주장, 곧 취사부의 책임자가 어떤 요리 솜씨와 성의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선원들의 일상 분위기가 흐렸다, 개었다 한다는 것이다. 유조선 선원들의 味覺(미각)은 예민하다. 고립된 無寄港(무기항) 항해, 달리 욕구를 발산시킬 출구가 없다. 막혀서 충만해진 욕구는 미각에 집중되고 '먹는 재미'를 갈구하게 된다. "다른 배 같으면 음식에 좀 불만이 있더라도 항구에 닿으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배설할 수 있어 쌓인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탱커에서는 그렇게 안 되지요. 설상가상으로 副食(부식)조달에 애로가 많습니다. 출항 때 한 번 실으면 그걸로 두 달을 견뎌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귀향길에는 김치 등 채소가 동이 나는 수가 많아요. 그러면 고기만 내놓게 되는데…아무리 요리 솜씨가 뛰어나도 그것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재료가 한정되어 있어 안타깝습니다." 사주장 박도석 씨의 말이다. "음식 솜씨도 좋아야 하지만 사주부의 사교술도 중요합니다. 평소에 선원들과 잘 어울려 인간 관계를 돈독히 해 놓으면 우리의 작은 실수는 묻혀 넘어가 버립니다. 요리가 언제나 좋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군중심리라 할까요. 누가 먼저 음식 투정을 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들고 나와 사주부를 집중 공격하게 됩니다. 이런 불만의 집결과 폭발을 막으려면 평소에 정치를 잘 해야 한다 말입니다. 허허…" 조리수 김동훈씨는 얼마 전에 선원들로부터 밀리다시피 하여 下船(하선)한 어느 사주장의 사례를 들면서 말했다. 배는 밤에도 분명히 가고 있었다. "밤에도 정말 배가 가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늘 반바지 차림으로 알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펌프 맨 김무 씨가 휴게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뭍 사람들의 뱃사람들에 대한 무식을 비꼬고 있었다. "윤정희가 여선장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었죠? 선장이 키를 잡지 않나, 갑판장이 船長에게 말을 놓고, 하역중인데 출항 명령이 떨어지지 않나…개판 오 분 전 같은 영화 말입니다." 尹 기관장이 화가 치민 듯 내뱉었다. 대다수 육지 사람들이 가진 선장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마도로스 모자를 약간 치켜 쓰고 파이프 담배를 지긋이 문 채 키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털보 사나이- 통선이면 몰라도 큰 배의 선장은 절대로 키를 잡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멋은 있겠지만, 키를 돌리는 건 操舵手(조타수)의 임무이며 그것도 위험한 항로를 지날 때만 그런다. 90퍼센트 이상의 시간은 자동 항해기에 맡겨두고 브리지 안을 어슬렁어슬렁 왔다 갔다 하는 게 조타수의 일이다. 선장이 키를 잡아야 할 때는 사고로 항해사들과 조타수들이 전멸한 뒤이다. 갑판장은 거창한 職名(직명)에도 불구하고 선장과 감히 맞먹을 수 없다. 船長 다음의 선임자는 기관부의 책임자 기관장, 세 번째가 갑판부의 책임자 1등 항해사. 1항사는 흔히 '초사'로 불린다. '치프 오피서'(Chief Officer)를 일본 사람들이 줄여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사는 갑판부의 日課(일과), 선실 생활의 통제, 화물의 싣고 부림을 책임 맡은 사관, 곧 선박 운용의 실무 책임자. 배에서 가장 분주한 사람일 것이다. 초사 밑에 2항사, 3항사, 통신장이 있고 기관장 밑에는 1기사, 2기사, 3기사가 따른다. 이들이 장교단과 같은 사관 그룹을 이룬다. 갑판장은 '보숭'(Bos'n)이라고 불리는데 갑판부의 보통 선원들 가운데 선임자. 군대에 비교하면 선임하사다. 기관부의 선임하사는 '남방'(Number one Oiler의 준말)으로 불리는 操機長(조기장). '보숭'밑에는 펌프 맨, 갑판수, 갑판원, '남방' 밑에는 기관수, 전기수, 기관원. 이런 계급 구조이니 갑판장이 선장과 맞먹는다는 것은 선임하사가 부대장과 맞먹는 것과 같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든 항해사 출신만이 선장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항해사와 갑판부가 기관사나 기관부보다 서열이 높다는 인상을 주고 불화와 대립의 잠재적 요인이 되고 있다. 브리지가 배의 가운데에 있는 선박에선 사관들과 갑판 부원들에겐 중앙 선실에, 기관부의 보통 선원들에겐 기관실이 있는 배 꽁무니의 선실에 침실을 배당, 분단을 고착화시켰는데 슈퍼 탱커에서는 중앙 선실이 船尾(선미) 선실로 바꾸어지면서 '통일'되어 양쪽의 갈등이 상당히 해소되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해양 대학이 후배인 선장이 선배 기관장을 거느리게 되면 여러 가지 미묘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선박회사에서는 선배 선장-후배 기관장으로 짝을 맞추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동해 2호도 그런 경우인데 선장과 기관장 사이가 좋은 것이 船內 분위기가 명랑한 주요한 배경이라고 선원들은 말하고 있었다. 말래카 해협에 들어선 이후 선원들은 한결 들떠 보였다. 휴게실 텔레비전 수상기에선 인도네시아 방송이 잡히다가 말레이시아 방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휴게실은 시청자들로 흥청대고 있었다. "내일 싱가포르를 지난다." 선원들의 표정은 그 기대로 밝아져 있었다. '내일 소풍간다'는 희망에 들뜬 국민학생들처럼. 다음날 아침은 부옇게 밝았다. 욕실의 수증기처럼 진한 공기가 海面(해면)을 얕게 덮어 누르고 있었다. 동해 2호는 새벽 3시에 말래카港(항) 앞바다를 지나 싱가포르로 다가갔다. 우리는 한 달 전의 약속에 따라 사흘 전에 말래카의 폭슬리 영감에게 동해 2호의 항공 촬영을 재차 부탁하는 電文(전문)을 보냈다. 말래카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을 지날 때의 시간(상오10시)을 미리 알려주고 비행기의 출현을 기다렸으나 말래카 현지의 날씨 때문인지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동해 2호는 새벽부터 각양각색의 선박들에 둘러싸여 싱가포르로 접근하고 있었다. 말래카 해협은 선박 전시장이었다. 맨눈으로도 열한 척의 탱커, 어선, 컨테이너船(선)들이 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巨船(거선)들이 오, 륙백 미터 간격을 두고 우리 배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바다가 좁게 느껴졌다. 바닷물 색은 텁텁한 초록이었다. '한 달 전 싱가포르 항구에서 본 바로 그 물색이구나'고 나는 직감했다. 나무 껍질, 판자, 해파리, 고무튜브, 야자수 잎 따위가 둥둥 떠내려왔다. 몰려 사는 인간들의 존재와 그 숨결을 확인시켜 주는 조짐들. 무선기에선 싱가포르 무선국을 부르는 소리가 숨가쁘고 어지럽게 오가고 있었다. 무선국의 교환수는 여자였다. 브리지 당직자들 가운데는 무전기에 귀를 바짝 대고 달콤한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는 선원들도 있었다. 항구, 등대, 갈매기, 돌고래, 여자는 선원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5大 친구라고 할까? 인간은 세 가지 동경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고향에의 동경(Home Sick), 이성에의 동경(Love Sick), 바다에의 동경(Sea Sick). 육지 사람들은 이 세 가지 가운데 두 가지 동경을 충족할 수 있으나 바다 사람들은 하나밖에 만족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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