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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배를 탈 때-슈퍼탱커 타고 오일 로드를 가다(10)

淸山에 2015. 4. 1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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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배를 탈

슈퍼탱커 타고 오일 로드를 가다(10)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동해 2호는 船首(선수)를 울산으로 항해 느림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잇달아 入港 (입항)예정 날짜가 늦어지는 바람에 선원들은 갑갑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20만 톤짜리가 사람 걷는 속도로 바다를 헤쳐가니 정지된 섬 같이 느껴졌다. 


   쿠웨이트의 아하마디 항구를 떠난 지 27일 만에 동해 2호는 조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 마라도 등대. 한반도 최남단의 이 기점에서 남남서 150해리 바다. '동해'는 한일공동광구 안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페르샤만, 오만만, 아라비아해, 인도양, 벵갈만, 말래카 해협, 남지나해-여름의 바다들을 거쳐 온 '동해'에 조국의 냄새는 겨울 공기와 함께 밀려 왔다. 기온이 섭씨 15도까지 떨어졌다. 나는 비로소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이날 한국에서 電文(전문)이 날아 왔다. 울산 입항 날짜를 2월27일로 늦추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식당과 휴게실에선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이로써 입항 예정일은 세 번째 연기된 것이었다.
  
   2월21일에서 23일로, 다시 26일로, 이번엔 27일로 이덕인 선장은 속도를 9노트에서 6노트로 낮추도록 했다. 이날 저녁에 또 電文이 왔다. 입항 날짜를 하루 더 연기하라는 명령이었다. 李 선장은 스크류 회전 속도를 분당 32회로 다시 느릿하게 했다. '동해'의 속력은 4.3노트로 떨어졌다. 시속 8킬로미터다. 어른의 빠른 걸음걸이와 같은 속도, 섬 같은 탱커가 이 속도로 움직이니 떠 있는지, 가는지 감을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고향의 코 밑에서 제자리걸음을 강요당한 선원들은 안달도 포기하고 이젠 허탈에 빠져 비꼬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피지(PG)로 떠밀려 되돌아가겠다.' '차라리 남아 연방으로 밀려갔으면 좋겠다.' '남아 연방엔 왜?' '우리 기름을 몽땅 팔아버리지 뭐, 그 나라는 지금 경제봉쇄를 당해 기름을 못 구해서 야단들이란 말야, 도둑질한 것이든 해적질한 것이든 대환영이란 거야.' '그거 잘 됐네, 우리가 싣고 있는 원유가 얼마짜리야. 배럴당 32달러로 잡으면 150만 배럴이니까 4800만 달러. 船體(선체)까지 치면 5000만 달러가 넘네. 선원 34명이 나누어 가진다면 1인당 약 150만 달러, 야! 10억 원이구나!' '10억 원으로 무얼 하나? 우선 성형수술을 해서 양놈같이 꾸미고 흰 여자, 검은 여자 양쪽으로 끼고 세계를 유람하다가 공소 시효가 끝나면 고향으로 금의환향이라…좋군, 좋아!'
  
   원유공급 과잉과 기름 소비량의 감소로 貯油(저유) 탱크는 어디서든지 가득차 있고, 슈퍼탱크로 이어진 오일 로드의 벨트는 더욱 느릿느릿 돌아가고, 그 지루함을 몸으로 때우며 감당해야 하는 것이 유조선 선원들인 것이다. 다음날, 이번엔 밝은 소식이 달려왔다. '繫船(계선) 준비를 하라.' 계선이란 탱커를 港內(항내)에 띄워 놓고 짐이 생길 때까지 놀려두는 것을 말한다. 그럴 동안 선원들은 번갈아 쉴 수가 있다.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 1박2일로 후딱 집에 다녀와야 하는 선원들에게 그것은 꿈 같은 기별이었다. 그렇지만 불안이 없을 수 없었다. '설마 거제도 앞 바다에 띄워 놓지는 않겠지…' 어떤 선원이 말했다.
  
   1980년 10월에 코리아 스타 호가 그런 꼴을 당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원유의 전략 비축을 위해 이 배를 '떠 있는 저유 탱크'로 이용하게 되었다. 스타호는 기름을 가득 실은 채 뭍을 지척에 두고 하염없이 떠 있기만 했다. 근 두 달의 향해 끝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손닿을 곳에 육지를 두고도 해상 고아 신세가 되었다. 선원들은 안달과 갑갑증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켜 놓고 상륙 기분을 내려 했으나 짜증만 더해 갈 뿐이었다. 그것은 고문이었다. 보다 못한 회사에서 휴가중인 선원들을 소집했다. 그들을 스타호에 대신 태우고 스타호 선원들을 하루만 상륙케 했다.
  
   세관에선 입항 수속 이전에 상륙했으니 밀입국이 아니냐고 따지는 판이었다. 이런 해상 감옥 생활로 20일을 보낸 뒤 스타호는 울산항에 들어가 기름을 부릴 수 있었다. 이것은 집 문 앞에서 장기 해상 대기를 하여 선원들이 괴롬을 당한 별난 경우고 대부분의 탱커 선원들은 해상 대기에 익숙해 있다. 이덕인 선장은 충승(오키나와) 앞바다에서 50일간이나 떠 있은 적도 있었는데 낚시로 소일했다고 한다. 기관부원 정한근 씨는 몇년 전 세브론社의 48만 톤 유조선 노스 아메리카 호를 탔었다. 2년 동안의 항해 중 뭍을 밟은 것은 바하마에서의 이틀뿐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선 해상대기나 항해나 별 차이가 없다.
  
   48만 톤 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해안 부두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바다 한복판의 해상 부두에서 기름을 부리거나 遠洋(원양)에서 다른 소형 유조선에 기름을 옮겨 주어야 하는 것이 이런 극초대형 유조선(ULCC)의 일이다. 큰 유조선을 탈수록 寄港(기항)이나 상륙의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유조선은 바다에서 바다로만 오고가고 선원들은 '바다의 우주비행사' 신세가 되고 만다. 탱커 운용의 경제성은 크기에 비례하지만 선원들의 외로움도 덩치에 비례한다. 크기에 의해 선원과 탱커는 뭍과 사람과 단절되고 있다. 경제성과 능률 중심의 사고방식이 탱커 선원들로부터 낭만과 재미와 휴식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탱커뿐이 아니다. 자동차 전용선은 부두에 접안하면 시간당 200대 꼴로 자동차를 부린다. 컨테이너船도 거대한 육상 기중기의 도움으로 컨테이너 상자를 단숨에 내려버린다. 곡물은 고압 수송 파이프로, 광석은 벨트로 순식간에 실려지고 부려진다. 하역의 기계화, 고속화는 선박의 정박기간을 단축시켰다. 보통이면 하루, 늦어도 이틀 만에 출항이다. 異國(이국)의 풍경과 술과 여자를 탐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대부분의 경우 상륙도 못하고 도시의 스카이라인만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러 가지 화물을 싣는 雜貨船(잡화선)만이 옛날의 외항선 기분을 아직도 내고 있을 뿐이다. 선박의 대형화, 하역의 고속화 추세는 세계 해운업을 변혁시켰고 뱃사람들의 삶, 그 자체도 무미건조한 것으로 되어버렸다.
  




   25일 식당에는 방이 붙었다. '야채가 동이 났으니 선원 여러분들은 서로 이해하고 참아 달라'는 내용의 선장 담화문이었다. 이날부터 김치도 끊겼다. 李 선장은 '배가 너무 빨리 가서 큰일이다'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스크류 회전 속도를 최저선으로 줄였는데도 6∼7노트로 가고 있었다. 海流(해류)가 뒤를 밀어서였다. '이러다가 하루 먼저 입항하게 생겼다'고 선장이 걱정하자 어느 사관이 '회사에서 뭐라고 하거든 배가 고향을 보더니 미친 듯 달려서 할 수 없이 먼저 들어왔다고 말씀하십시오'라고 농을 했다.
  
   선실은 이미 입항 분위기로 감싸여 있었다. 이번에 年暇(연가)를 받아 배를 내리게 된 사람이 여섯 명. 선장, 기관장, 통신장, 기관원 백평호, 갑판원 정태석, '살롱' 이영우씨. 이들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목욕물이 많이 쓰일 겁니다."
 
   최화섭 동승 선장이 말했다.
   "입항 준비 때문이죠. 지금쯤 육지에선 아내들도 한창 남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방을 치운다, 미장원에 다녀온다, 화장을 한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여자의 들뜬 모습을 보고는 남편의 귀국이 가까워졌다는 걸 안다고 합니다."
  
   탱커 선원들의 생각을 가장 넓게 점유하고 있는 소재는 아내다. 가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내와 떨어져 산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지배하고 있다. 불안, 그리움, 안타까움, 망상, 울분. 한국의 선원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그들을 일찍 바다에서 떠나게 하는 것, 뱃사람이란 직업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 외국의 선원들을 부러워하게 만드는 것들이 모두 '아내로부터의 격리'에서 비롯된 문제다. 사주장 박도석 씨의 방에는 어린이 및 여자용 구명조끼가 걸려 있었다.
  
   동해 2호의 원주민이었던 노르웨이 선원들이 두고 간 유물. 그것은 박씨의 방에 선원가족, 곧 아내와 아이가 함께 타고 있었다는 증거다. 외국상선에서 가족을 태우는 것, 통신장이나 취사부원으로 여자를 채용하는 것은 이미 관습으로 굳어 있다. '동해'에는 그런 외국 배에 수출 선원으로 일했던 보통 선원들이 많았다. 조타수 황보씨는 그리스 화물선에서 여자들과 같이 지냈다.
 
   "사관들의 아내뿐 아니라 통신실의 차석이 여자였어요. 사관 마누라들은 낮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브리지로 올라와요. 저는 그 서양 애들이 앉을 의자를 정렬하곤 했는데 별로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브리지나 발코니에 쭉 늘어앉아 바다 구경, 배 구경을 하는데 비키니 수영복 차림이에요.
   발코니에서 일광욕을 한다고 브래지어까지 벗어놓고 있다가 내가 가면 모포로 몸을 감싸곤 합디다. 이 여자들이 개까지 데리고 타는 수가 많아요. 어느 한국 선원은 자기에게 엉겨붙어 핥아 대는 애완견의 꼬리를 잡고 떼기장을 쳤는데 선장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거였죠. 선장에게 혼이 나 하마터면 강제 하산당할 뻔했어요. 그 배의 통신실은 브리지 바로 뒤에 붙어 있었습니다. 차석 여자가 개를 꼭 껴안고 침대 위에 나뒹굴어 있는 게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거예요. 심술이 나서 개한테 물을 흠뻑 뒤집어씌우기만 했지만 말입니다.
   이 차석은 나중에 초사와 눈이 맞아 초사 방으로 옮겨 동거를 해버리더군요. 얼마 뒤 임신을 해서 배를 내렸습니다만 내가 싫어한 강아지는 그새 송아지 만한 어른 개가 되어 下船(하선)했지요."
 
   김상달 씨는 세브론의 탱커에서 남의 아내들과 함께 생활하는 고역을 치렀다.
   "일곱, 여덟 명의 여자들이 탔는데 복도고 식당이고 온통 향수 냄새, 여자 냄새예요. 그래도 그들은 마음씨가 좋아 저녁의 파티에선 우리하고도 곧잘 춤을 추고 船內(선내) 분위기는 좋았어요."
   갑판원 변기찬 씨는 외국배의 수출선원으로 일할 때 한국인 아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 회사에선 사관들(한국인)에겐 부부동반 승선을 허락했어요. 선장, 기관장, 초사의 아내가 탔는데 선내 분위기가 흐려집니다. 여자가 남편 꼭대기에 올라앉아 우리를 인간 차별하고 下視(하시)하는가 하면 자기들끼리도 암투를 벌이고 해서…다른 배에서 일본 선장의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그 여자의 자상한 성격으로 해서 선원들이 모두 포근한 마음을 갖게 된 적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우리 나라에선 옛날부터 배에 여자가 타는 것을 금기처럼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이 선원 가족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는지 배가 항구에 들어온 뒤에도 남편이 타고 다니는 그 배에 아내는 오를 수가 없는 형편이다. 일본에선 유조선이 귀향하면 육상 대기조가 올라와 하역 업무를 책임지면서 선원들을 몽땅 상륙시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짧은 기항 시간이나마 가족과 함께 마음놓고 쉬라는 배려이다. 이렇게는 못 해줄망정 가족을 배로 불러 사나흘을 함께 있도록 하는 것도 회사나 관청의 이해부족으로 실시되고 있지 않다.
  
   그러니 울산에 기항해도 半(반)은 배에 남고 半은 1박2일의 가족면회를 허겁지겁하고 돌아와야 한다. 울산과 가까운 경북 월성군 감포에 집이 있는 조타수 주문길 씨는 '오후1시 통선을 타고 나갈 때 벌써 돌아올 걱정부터 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울산항에 상륙하면 오후 2시,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닿으면 저녁 무렵, 저녁상을 물리고 두 달만에 만난 가족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엔 새벽밥을 먹고 아쉬워하는 아내의 눈길을 등 뒤로 하고 집을 나서야 한다. 
  




   다시 두 달의 별거가 시작되는 것이다. 장생포 항에서 탱커로 향하는 오후1시 통선을 놓치면 자기 돈으로 빌어서라도 歸船(귀선)해야 한다. 주씨는 그래도 사정이 좋은 편이다. 집이 서울에 있는 최명기 초사는 '별을 보고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새벽 별을 보고 나와야 한다' 총각인 그는 귀가를 단념할 때도 많다. 남동생을 부산으로 불러내려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가족 안부를 듣기도 한다.
  
   전북 이리에 집이 있는 2항사 이종권 씨는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못했다. 인천에 집이 있는 갑판원 정태석 씨의 아내는 입항날짜에 맞추어 아이를 데리고 울산으로 내려온다. 정씨 부부는 울산의 여관방에서 하룻밤의 회포를 푸는 것이다. 진주 서쪽, 대전 북쪽에 집이 있는 탱커 선원들은 대부분 정씨처럼 울산에서 '하루 랑데뷰'를 하는 것으로 때운다.
  
   이건 가족과의 재회가 아니라 면회에 불과하다. 짧은 만남이지만 아내와의 면담을 끝내고 배로 돌아오면 그 동안의 불안과 걱정이 말끔히 가시고 홀가분해져 새로운 의욕이 솟는다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걱정거리를 선물 받고 오는 선원들도 있다. 그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함으로 해서 선원들은 더욱 괴로워하게 된다. 탱커가 울산항을 떠나면 그런 선원들은 한동안 굳게 입만 닫고 공상만 골똘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루 면회에 두 달 항해. 이런 생활을 열 달쯤 하면 25일의 年暇(연가)가 주어진다. 이건 군대생활의 연가와 비슷하고 가족과의 1일 면회는 사병의 외출에 비교할 수 있다. 다른 점은, 사병들은 그래도 뭍을 딛고 사는데 선원들은 물에 떠 철판에 둘러싸여 살며, 사병들에겐 그런 생활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만 선원들에겐 기약이 없고, 사병들은 대부분 총각인데 선원들은 거의가 처자식을 데리고 있다는 것들이다.
  
   "저희 집사람은 제가 휴가를 받아 육지에 있을 때는 항상 나를 따라 다니려 해요. 제가 배를 탈 때는 아내의 몸무게가 평균 3킬로그램 줄어버립니다. 저희 휴가기간에는 감쪽같이 원상 회복이 되데요. 집사람은 신경성 심근 경색증세를 갖고 있어요. 충격을 받으면 경기하고 아이들처럼 숨이 막히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 넘어가요. 이런 증세도 제가 집에 있으면 없어져요. 모두가 저 때문에 얻은 병이지요."
   李 선장의 말이다.
  
   최화섭 씨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받았다.
   "저희 친구 아내는 여섯 달 이상 남편(선장)이 집에 안 오면 신경성 위장병이 발작, 아무 것도 못 먹고 바짝바짝 말라요. 할 수 있습니까? 그 친구는 수입 좋은 수출 선장직을 그만두고 요즘은 對日(대일) 정기선을 타지요. 보름 만에 한 번씩 부산항에 돌아와요. 남편들만 배를 타는 게 아닌가 봐요. 남편들이 배를 탈 동안 아내들도 더 고통스러운 정신적인 항해를 함께 하는 거지요."
  
   통신장도 말했다.
   "언젠가 무전기를 조정하고 있는데 한국인 선원과 아내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지요. 선원은 수출선을 타는 모양인데 인도인가 어디에선가에서 상륙,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어요. 아내는 '지금 그곳이 어디냐, 이래선 도저히 못 살겠으니 당장 그쪽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어찌나 애절하게 말하는지 정말이지 전화 끊고 당장 비행장으로 달려갈 것 같은 기분이 듭디다. 남편은 아내를 달랜다고 땀을 빼더군요. 나중엔 아내가 전화통을 붙들고 엉엉 우는데…"
  
   尹 기관장도 할 말이 있다. '한국 수출 선원들이 탄 부정기화물선이 우연히 부산에 들른 적이 있었죠. 선장은 부산항에서 하역을 끝내고 출항, 자기 재량으로 오륙도 근방에 배를 띄워 놓도록 한 뒤 선원 아내들을 불렀죠. 통선을 타고 온 여자들은 그 위험한 줄 다리를 잽싸게 타고 올라와 남편과 감격의 재회를 했지요. 몇 시간 동안 선원들은 '해상허니문'을 즐겼고요. 이건 잘 된 경우이고 그렇지 못한 적도 있었죠. 어느 외국배가 부산에 들어왔는데 수출선원들의 가족들이 부산으로 집결했어요. 그러나 선원들은 하역이 바빠 상륙을 못하고 다시 인천으로 배를 돌려야 했습니다.
  
   선원 가족들은 기차, 버스 편으로 우루루 인천으로 몰려갔습니다. 인천에서도 하역이 빨리 끝나 선원들은 가족들의 애타는 아우성을 선박 전화로만 듣고선 출항을 해야 했습니다. 배를 하루 정박시키는 데 수백만 원이 날아가니까 회사에선 '인간적 편의'를 보아주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남편 얼굴 한 번 보려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닭 쫓던 뭐 신세가 된 아낙네들의 허탈감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유조선 선원들의 아내는 한 가지 점에선 안심할 수 있다. 남편의 외도에 대해선 신경 쓸 필요가 도무지 없다. 배가 기항하지 않으니 무슨 재주로 다른 여자의 속살을 엿볼 수 있겠는가. 그래도 '동해' 선원들의 여자 이야기도 과거 외항선 시절 한참 잘 나갈 때의 추억담뿐이었다.
  
   '선원들에게 안성맞춤인 여자라면 역시 남미 여자들이 최고지, 몸매 좋고 예쁘겠다, 값싸고 친절하니까.' '돈이 없을 땐 치약이나 비누, 라면만 주어도 오케이더군. 그런데 배에서 자고 나갈 때 물건을 훔쳐 가는 버릇이 있더군.' '우리 배가 미국 남부의 어느 항구에 들어갔을 때인데 한 아가씨가 큼직한 옷 가방을 들고 배로 올라왔어. 감을 잡은 우리는 선실 2층에 방 하나를 내어 주었지. 그 방에서 그 계집은 점방을 벌이더군. 한 일주일 있으면서 우리 선원들을 모두 동서로 만들었어. 사주장은 아가씨가 수고한다고 양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까지 해주었지. 미국인답게 그 여자는 거리낌이 없고 사무적이더군. 우리가 일할 때인 낮에는 낮잠만 자다가 밤엔 그 장사를 하고…' '난 아르헨티나에서 여자를 샀는데 그 여자 집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니 바깥에서 웬 남자가 아이를 안고 어르고 있잖아? 안내한 사람한테 누구냐고 물어보니 그 여자의 남편이란 거야, 어찌나 기분이 안 좋던지…'
  
   제주도가 가까워지자 어선들이 점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이 되니 '동해'의 주위는 불밭으로 변했다. 오징어잡이 불배는 대낮같이 밝은 전등들을 주렁주렁 달고 호수 같은 해면을 휘황하게 오가고 있었다. 비로소 한국 텔레비전 방송이 잡히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그 앞에 몰려 앉았다. 쉴 새 없이 계속되던 화투 노름도 텔레비전 앞에선 맥을 출 수 없었다. 船室(선실)에선 下船者(하선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모임이 끼리끼리 숨을 죽여 가며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었다. 선내 매점에선 술이 떨어졌지만 이런 자리엔 비장의 술병이 나오는 법이다. 뭍에서의 송별식과는 달리 조용한 송별식이었다. 노래도 없었다. 꼭 한 곡 뽑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문을 꼭꼭 쳐닫고 담요로 다시 방음 장막을 친 뒤 그렇게 했다.
  
   남의 안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자기와 남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태도는 선원들에겐 체질화되어 있는 듯했다. 당직이나 日課(일과) 시간이 끝난 뒤에는 아무리 상급자라도 하급 선원들에게 사사로운 심부름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화투나 탁구를 칠 때도 계급의식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사관들은 보통 선원 휴게실에 자주 건너와 그들과 어울리지만 선원들은 사관 휴게실로 잘 가지 않는다. 일단 日課가 시작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선원들은 스무 살쯤 아래인 아들 뻘 되는 사관에게도 깍듯이 존대를 하는 반면 사관들은 '이씨! 주씨!' 식으로 부른다.
  
   브리지에서도 커피나 라면을 끓여 갖다 바치는 건 늘 선원 쪽이다. 나이가 마흔 아홉인 조기장 정명수 씨나 마흔 여섯인 갑판장 김상달 씨는 서른 살도 안 되는 항해사에게 순종한다. 아니꼬움을 억지로 참는 듯한 그런 태도가 아니라 퍽 자유로운 행동 가짐이다. 나는 이 선원 사회가 민주적이고 公(공)과 私(사)가 잘 구별되는 자율조직으로 보았다. 세 사람만 모여도 편으로 갈라지고, 여럿이 협동하여 공동목표를 달성하는 훈련이 잘 안되어 있는 한국인의 약점을 그들은 이미 뿌리친 것으로 보였다.
  
   이에 대해 李 선장은 '선원들이 순해 빠진 데 놀랐지요?'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선원들은 그들이 놓인 상황을 잘 알고 있어요. 협동하지 않으면 사고가 나고 죽는다는 것, 일종의 安保(안보)의식이라 할까요, 그런 데 투철합니다. 두 번째로는 선장의 절대적인 권한이 확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선박을 하나의 영토로 본다면 선장은 통치자이고 그의 권한은 법적으로도 뒷받침되어 구금권까지 행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선원은 회사에 통보, 즉각 하선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말썽을 피우면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알지요.
  
   세 번째로 선원 사회는 경쟁이 없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지 않아도 때가 되면 승진하고 승급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모함할 필요도 없고 누구를 경쟁 상대자로 지정, 긴장관계를 형성할 필요도 없어요. 제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기만 하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습니다. 일과 시간 뒤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까?"
   李 선장의 얘기를 듣고 나는 꼭 10년 전 한국 해양 대학 손태현 교수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한국 선원들이 외국에 나가 왜 환영을 받는지 아십니까?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육지의 정체된 분위기, 한국 사회의 폐쇄성, 그것도 훌훌 털어 버리고 新開地(신개지)에 이식되니 구김살 없이 무럭무럭 곧게 뻗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도의 고질화된 나쁜 풍토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민족성을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수출선원들이 그 증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