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배를 탈 때 슈퍼탱커 타고 오일 로드를 가다(10)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동해 2호는 船首(선수)를 울산으로 항해 느림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잇달아 入港 (입항)예정 날짜가 늦어지는 바람에 선원들은 갑갑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20만 톤짜리가 사람 걷는 속도로 바다를 헤쳐가니 정지된 섬 같이 느껴졌다.
쿠웨이트의 아하마디 항구를 떠난 지 27일 만에 동해 2호는 조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 마라도 등대. 한반도 최남단의 이 기점에서 남남서 150해리 바다. '동해'는 한일공동광구 안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페르샤만, 오만만, 아라비아해, 인도양, 벵갈만, 말래카 해협, 남지나해-여름의 바다들을 거쳐 온 '동해'에 조국의 냄새는 겨울 공기와 함께 밀려 왔다. 기온이 섭씨 15도까지 떨어졌다. 나는 비로소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이날 한국에서 電文(전문)이 날아 왔다. 울산 입항 날짜를 2월27일로 늦추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식당과 휴게실에선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이로써 입항 예정일은 세 번째 연기된 것이었다. 2월21일에서 23일로, 다시 26일로, 이번엔 27일로 이덕인 선장은 속도를 9노트에서 6노트로 낮추도록 했다. 이날 저녁에 또 電文이 왔다. 입항 날짜를 하루 더 연기하라는 명령이었다. 李 선장은 스크류 회전 속도를 분당 32회로 다시 느릿하게 했다. '동해'의 속력은 4.3노트로 떨어졌다. 시속 8킬로미터다. 어른의 빠른 걸음걸이와 같은 속도, 섬 같은 탱커가 이 속도로 움직이니 떠 있는지, 가는지 감을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고향의 코 밑에서 제자리걸음을 강요당한 선원들은 안달도 포기하고 이젠 허탈에 빠져 비꼬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피지(PG)로 떠밀려 되돌아가겠다.' '차라리 남아 연방으로 밀려갔으면 좋겠다.' '남아 연방엔 왜?' '우리 기름을 몽땅 팔아버리지 뭐, 그 나라는 지금 경제봉쇄를 당해 기름을 못 구해서 야단들이란 말야, 도둑질한 것이든 해적질한 것이든 대환영이란 거야.' '그거 잘 됐네, 우리가 싣고 있는 원유가 얼마짜리야. 배럴당 32달러로 잡으면 150만 배럴이니까 4800만 달러. 船體(선체)까지 치면 5000만 달러가 넘네. 선원 34명이 나누어 가진다면 1인당 약 150만 달러, 야! 10억 원이구나!' '10억 원으로 무얼 하나? 우선 성형수술을 해서 양놈같이 꾸미고 흰 여자, 검은 여자 양쪽으로 끼고 세계를 유람하다가 공소 시효가 끝나면 고향으로 금의환향이라…좋군, 좋아!' 원유공급 과잉과 기름 소비량의 감소로 貯油(저유) 탱크는 어디서든지 가득차 있고, 슈퍼탱크로 이어진 오일 로드의 벨트는 더욱 느릿느릿 돌아가고, 그 지루함을 몸으로 때우며 감당해야 하는 것이 유조선 선원들인 것이다. 다음날, 이번엔 밝은 소식이 달려왔다. '繫船(계선) 준비를 하라.' 계선이란 탱커를 港內(항내)에 띄워 놓고 짐이 생길 때까지 놀려두는 것을 말한다. 그럴 동안 선원들은 번갈아 쉴 수가 있다.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 1박2일로 후딱 집에 다녀와야 하는 선원들에게 그것은 꿈 같은 기별이었다. 그렇지만 불안이 없을 수 없었다. '설마 거제도 앞 바다에 띄워 놓지는 않겠지…' 어떤 선원이 말했다. 1980년 10월에 코리아 스타 호가 그런 꼴을 당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원유의 전략 비축을 위해 이 배를 '떠 있는 저유 탱크'로 이용하게 되었다. 스타호는 기름을 가득 실은 채 뭍을 지척에 두고 하염없이 떠 있기만 했다. 근 두 달의 향해 끝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손닿을 곳에 육지를 두고도 해상 고아 신세가 되었다. 선원들은 안달과 갑갑증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켜 놓고 상륙 기분을 내려 했으나 짜증만 더해 갈 뿐이었다. 그것은 고문이었다. 보다 못한 회사에서 휴가중인 선원들을 소집했다. 그들을 스타호에 대신 태우고 스타호 선원들을 하루만 상륙케 했다. 세관에선 입항 수속 이전에 상륙했으니 밀입국이 아니냐고 따지는 판이었다. 이런 해상 감옥 생활로 20일을 보낸 뒤 스타호는 울산항에 들어가 기름을 부릴 수 있었다. 이것은 집 문 앞에서 장기 해상 대기를 하여 선원들이 괴롬을 당한 별난 경우고 대부분의 탱커 선원들은 해상 대기에 익숙해 있다. 이덕인 선장은 충승(오키나와) 앞바다에서 50일간이나 떠 있은 적도 있었는데 낚시로 소일했다고 한다. 기관부원 정한근 씨는 몇년 전 세브론社의 48만 톤 유조선 노스 아메리카 호를 탔었다. 2년 동안의 항해 중 뭍을 밟은 것은 바하마에서의 이틀뿐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선 해상대기나 항해나 별 차이가 없다. 48만 톤 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해안 부두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바다 한복판의 해상 부두에서 기름을 부리거나 遠洋(원양)에서 다른 소형 유조선에 기름을 옮겨 주어야 하는 것이 이런 극초대형 유조선(ULCC)의 일이다. 큰 유조선을 탈수록 寄港(기항)이나 상륙의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유조선은 바다에서 바다로만 오고가고 선원들은 '바다의 우주비행사' 신세가 되고 만다. 탱커 운용의 경제성은 크기에 비례하지만 선원들의 외로움도 덩치에 비례한다. 크기에 의해 선원과 탱커는 뭍과 사람과 단절되고 있다. 경제성과 능률 중심의 사고방식이 탱커 선원들로부터 낭만과 재미와 휴식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탱커뿐이 아니다. 자동차 전용선은 부두에 접안하면 시간당 200대 꼴로 자동차를 부린다. 컨테이너船도 거대한 육상 기중기의 도움으로 컨테이너 상자를 단숨에 내려버린다. 곡물은 고압 수송 파이프로, 광석은 벨트로 순식간에 실려지고 부려진다. 하역의 기계화, 고속화는 선박의 정박기간을 단축시켰다. 보통이면 하루, 늦어도 이틀 만에 출항이다. 異國(이국)의 풍경과 술과 여자를 탐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대부분의 경우 상륙도 못하고 도시의 스카이라인만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러 가지 화물을 싣는 雜貨船(잡화선)만이 옛날의 외항선 기분을 아직도 내고 있을 뿐이다. 선박의 대형화, 하역의 고속화 추세는 세계 해운업을 변혁시켰고 뱃사람들의 삶, 그 자체도 무미건조한 것으로 되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