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 슈퍼탱커 타고 오일로드를 가다(11)/뭍이 두려운 바닷사람들의 애환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수출 선원뿐 아니라 해외에서 뛰는 노동자나 상사원들이 그런 가능성을 입증한 지 오래다. 中東(중동)경력이 7년인 ㅅ종합상사의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외국에 나가 우연히 동양인과 스치면 단번에 한국인을 알아봅니다. 눈이 달라요. 눈초리에 살기가 돈다고 할까. 독기가 서려 있다고 할까요? 눈동자가 번득이고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건 영락없이 한국 사람이지요. 저는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야생마처럼 무섭게 뛰는 그 힘이 우리 민족사의 거듭된 시련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밟히고 얻어맞고 까지고 하면서 잡초처럼 생존해 온 우리는 차돌처럼 단단해졌던 모양입니다. 그 당찬 잠재력을 해외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스스로가 놀란 거지요." 만주 벌판을 잃은 뒤 한 번도 그런 무대를 갖지 못했던 한국인이 1960년대에 들어와 바다에서, 그리고 바다를 건너 사막에서, 정글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야성의 무대를 다시 찾아냈다는 이야기다. 이런 재발견의 여행을 선도한 것은 1960년대 초의 수출 선원이었고 이덕인 선장은 그 척후병의 한 사람으로 해외 선원 시장을 개척했다. "한국선원들이 본격적으로 외국배를 타게 된 데는 협성해운 왕상은 씨의 공이 큽니다. 중국인이 선주로 있었던 룽캉, 룽앙, 룽하호에 한국선원들을 해외 취업시킨 것이 협성해운이었고 여기서 인정을 받자 우리 선원들이 대거 해외로 쏟아져 나갔지요. 룽캉 호 등은 만든 지가 30년쯤 되는 고물이었지요. 2300톤쯤 됐는데 동남아로 原木(원목)을 실으러 다녔습니다. 저는 1963년에 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해군장교 생활을 거쳐 1965년부터 룽하 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낡은 배였던지 뱃전에서 녹을 긁어내면 구멍이 뚫리고 용접을 하려고 불꽃을 갖다 대면 철판에 금이 좍좍 가고 기관실에는 물이 새어드는 판이었죠. 서병기, 김동화, 김석기 씨들은 초창기에 선장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한국 선원들은 라이베리아의 편의 치적선을 많이 탔지요. 세금이나 임금 등에서 한국선원들을 쓰는 게 유리하다고 이들 船主(선주)는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관들은 선장이 1항사로, 2항사가 3항사로 하는 식으로 스스로 계급을 강등시켜 해외취업을 나갔지요. 초기에는 船內(선내) 규율이 엉망이었습니다. 깡패들이 술 주정을 하고 도끼를 휘두르는가 하면 어떤 선장들은 20세기 폭력단 조직을 호위병으로 태워 船內 군기를 잡게 한 뒤 돈을 빼먹는 등 나쁜 짓을 하기도 했지요. 참 그때는 살벌했습니다." 한국의 뱃사람들은 몸으로 때우고 주검을 쌓아 올리며 바다를 개척했다. 1950년대 말부터 남태평양의 원양어장이 개척되고, 1960년대 초부터 商船(상선) 선원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고, 이어서 北洋(북양)과 북아프리카 어장이 열리고 이들이 닦아 놓은 해외에의 길을 따라 상사원과 노동자들이 질주해 간 것은 그 뒤였다. 뱃사람들은 임금과 안정성을 경제성과 맞바꾸는 등식 선상(線上)에서 일해 왔다. 일본에서 사들인 낡은 어선, 갈라진 철판을 시멘트로 때워 가며 고기잡이를 하다가 실종, 실종, 실종… 짓가림(步合制)이란 임금 제도는 선장으로 하여금 어부들을 혹사하도록 내몰았고 폭풍을 무릅쓴 出漁(출어) 끝에 실종, 실종, 실종… 썩어 가는 편의치적선을 몰고 荒天(황천)항해를 하다가 실종, 실종, 실종… 한국의 교통 사고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란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다. 海難(해난) 사고에 있어서도 한국은 세계 최상급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브리태니카사에서 펴낸 '재난' 이란 책에는 지난 1959년에서 1978년 사이의 20년 동안의 세계 주요 해난 사고 기록이 실려 있다. 수십 명 이상이 떼죽음한 큰 사고만 추린 것이다. 316건의 사고가 실려 있는데 한국이 19건으로 으뜸, 2위는 필리핀으로 16건, 3위가 일본으로 11건이다. 해난 사고는 해상 교통량과 선박 보유 척수에 비례하는 게 원칙일 것이다. 섬이 7000 개인 필리핀이나 海運(해운)국가인 일본에서 큰 사고가 자주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으나 한국이 이런 나라를 누르고 수위를 차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경제성을 위해 안정성을 희생하도록 강요한 한국 해운·수산 구조의 문제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로 뛴 죄로 해서 나는 수많은 해난사고에 접해 보았다. 한밤중에 단잠을 깨운 기자를 바라보는 선원아내와 아이들의 불안한 눈망울. 그 얼굴을 향해 '당신 남편이 탄 배가 실종됐다'고 사정없이 내뱉어야 할 때, 그래서 아내는 허물어지듯 핑그르 돌면서 까무러치고 그 위로 사진 기자의 플래시가 터질 때 나는 '선원들이 동네북이다'고 중얼거리며 '배를 안 타면 못 먹고사나?'고 속으로 배부른 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遠洋(원양)수산 회사들이 몰린 충무동 해안, 商船 회사들이 집중된 중앙동엔 한 달에도 몇 번씩 종종걸음을 치곤 했다. 선원들은 십중팔구 부산·경남·전남 사람들, 특히 영도·거제도·남해 사람들이 많았다. 형제나 친구끼리 서너 명이 같은 배를 탔다가 몰죽음을 하는가 하면 남편이 그렇게도 바라던 사내아이를 아내가 낳은 바로 그날 남편은 대서양의 荒波(황파) 속에 묻혀버린 일도 있었다. 아우성, 통곡, 책상이 날고 유리창이 박살나는 회사 사무실, 지긋지긋한 수색기간 중의 기다림, 그리고 사망 선고. 밀고 당기는 피해보상 교섭. 선원들, 특히 원양선원들의 목숨 값은 또 얼마나 싼가? 육상 사고 사망자의 반도 안 되었다. 남편, 동생, 오빠의 유골 대신, 목숨과 바꾼 돈 보따리를 들고 가는 허망한 歸鄕(귀향) 길. 해난 사고가 너무 자주 터지자 이삼십 명이 실종된(해난사고에선 시체가 확인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실종'이라고 보도하며 따라서 '사망'만큼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사건도 2, 3단으로 신문에 나기도 했다. 지하철 붕괴나 열차 충돌 등으로 그렇게 많이 죽으면 틀림없는 1면 머리기사다. 1976년 겨울 동해 대화퇴 漁場(어장)에서 수십 척의 어선이 조난, 어부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즈음엔 '진도개가 사라진다'는 기사가 '어부가 무더기로 사라진다'는 기사를 누르고 사회면 머리에 박힌 적도 있었다. 뱃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이런 풍조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 지배층은 여러 번 어로 금지명령을 내려다. 漁具(어구)도 불태우게 했다. 불교의 살생 禁斷(금단) 사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 뱃사람들은 사회계층 구분에서 밑바닥을 맴돌았다. 어민들에 대한 착취의 정도는 농민의 그것을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중과세 때문에 어촌이 붕괴, 流民(황민)이 생기고, 혹사를 당하기 싫어 바닷가에 좌초한 고래를 어민들은 밤에 몰래 바다로 떠밀어 넣었다고 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한 미국의 비숍 여사는 어민들이 '가난의 보호'를 추구하고 있다고 썼다('한국과 그 이웃들') 조금이라도 넉넉해지면 수탈당해 버리므로 일부러 가난 상태에 머물러 그 가난을 수탈에 대한 방벽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도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바다를 외면, 내륙인으로 자처하려 했던 사람들. 자연환경을 거슬러 행동한 그 결과가 역사의 정체성으로 나타났다고 崔南善(최남선)은 '한국 해양사'에서 쓰고 있다. 해방과 함께 온 조국분단은 남한을 대륙과 단절시켜 사실상의 섬으로 만들었다. 남한의 생존은 미국 등 해양 세력과의 밀착 관계에 해외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1960년대 이후 이 나라 뱃사람들의 뻗어 나감은 이런 환경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팽창에 비해 한국인의 해양 사상은 아직도 前근대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탱커 선원들의 우울, 잦은 海難(해난)사고, 아직도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이 보여주고 있다. 동해 2호는 제주도 동쪽을 지나 부산과 대마도 사이의 大韓해협을 향해 다가갔다. 제주도는 보이지 않았다. 조국의 바다로 돌아왔다는 징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징어잡이 배 정도였다. 그러나 선내의 텔레비전 수상기에 똑똑히 잡히고 있는 KBS와 MBC의 프로가 그 어떤 징표보다도 강렬하게 '한국이 가까움'을 입증하고 있었다. 똑같은 수평선에 둘러싸인 '동해'였지만 선내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한국 텔레비전 방송이 '동해'가 조국의 磁場(자장) 안에 들어왔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뭍이 가까워지면 선원들은 가슴을 설렌다. 그런 설렘 사이사이로는 불안감이 깃들기도 한다. 육지는 바다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流體(유체) 위의 생활을 제2의 天性(천성)으로 받아들인 그들에게 固體(고체) 위의 생활은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강요한다. "늘 흔들리는 배 위에 있다가 갑자기 딱딱한 땅을 밟으면 섬찟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걸음걸이가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발놀림이 안 맞아 두 다리가 제멋대로 노는 것 같기도 하답니다. 외국의 약삭빠른 화류계 여자들은 걸음걸이만 보고도 선원들을 가려낸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