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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슈퍼탱커 타고 오일로드를 가다(11)

淸山에 2015. 4. 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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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

슈퍼탱커 타고 오일로드를 가다(11)/뭍이 두려운 바닷사람들의 애환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수출 선원뿐 아니라 해외에서 뛰는 노동자나 상사원들이 그런 가능성을 입증한 지 오래다. 中東(중동)경력이 7년인 ㅅ종합상사의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외국에 나가 우연히 동양인과 스치면 단번에 한국인을 알아봅니다. 눈이 달라요. 눈초리에 살기가 돈다고 할까. 독기가 서려 있다고 할까요? 눈동자가 번득이고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건 영락없이 한국 사람이지요. 저는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야생마처럼 무섭게 뛰는 그 힘이 우리 민족사의 거듭된 시련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밟히고 얻어맞고 까지고 하면서 잡초처럼 생존해 온 우리는 차돌처럼 단단해졌던 모양입니다. 그 당찬 잠재력을 해외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스스로가 놀란 거지요."
  
   만주 벌판을 잃은 뒤 한 번도 그런 무대를 갖지 못했던 한국인이 1960년대에 들어와 바다에서, 그리고 바다를 건너 사막에서, 정글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야성의 무대를 다시 찾아냈다는 이야기다.
  
   이런 재발견의 여행을 선도한 것은 1960년대 초의 수출 선원이었고 이덕인 선장은 그 척후병의 한 사람으로 해외 선원 시장을 개척했다.
   "한국선원들이 본격적으로 외국배를 타게 된 데는 협성해운 왕상은 씨의 공이 큽니다. 중국인이 선주로 있었던 룽캉, 룽앙, 룽하호에 한국선원들을 해외 취업시킨 것이 협성해운이었고 여기서 인정을 받자 우리 선원들이 대거 해외로 쏟아져 나갔지요.
  
   룽캉 호 등은 만든 지가 30년쯤 되는 고물이었지요. 2300톤쯤 됐는데 동남아로 原木(원목)을 실으러 다녔습니다. 저는 1963년에 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해군장교 생활을 거쳐 1965년부터 룽하 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낡은 배였던지 뱃전에서 녹을 긁어내면 구멍이 뚫리고 용접을 하려고 불꽃을 갖다 대면 철판에 금이 좍좍 가고 기관실에는 물이 새어드는 판이었죠. 서병기, 김동화, 김석기 씨들은 초창기에 선장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한국 선원들은 라이베리아의 편의 치적선을 많이 탔지요. 세금이나 임금 등에서 한국선원들을 쓰는 게 유리하다고 이들 船主(선주)는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관들은 선장이 1항사로, 2항사가 3항사로 하는 식으로 스스로 계급을 강등시켜 해외취업을 나갔지요. 초기에는 船內(선내) 규율이 엉망이었습니다. 깡패들이 술 주정을 하고 도끼를 휘두르는가 하면 어떤 선장들은 20세기 폭력단 조직을 호위병으로 태워 船內 군기를 잡게 한 뒤 돈을 빼먹는 등 나쁜 짓을 하기도 했지요. 참 그때는 살벌했습니다."
  
   한국의 뱃사람들은 몸으로 때우고 주검을 쌓아 올리며 바다를 개척했다. 1950년대 말부터 남태평양의 원양어장이 개척되고, 1960년대 초부터 商船(상선) 선원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고, 이어서 北洋(북양)과 북아프리카 어장이 열리고 이들이 닦아 놓은 해외에의 길을 따라 상사원과 노동자들이 질주해 간 것은 그 뒤였다. 뱃사람들은 임금과 안정성을 경제성과 맞바꾸는 등식 선상(線上)에서 일해 왔다. 일본에서 사들인 낡은 어선, 갈라진 철판을 시멘트로 때워 가며 고기잡이를 하다가 실종, 실종, 실종… 짓가림(步合制)이란 임금 제도는 선장으로 하여금 어부들을 혹사하도록 내몰았고 폭풍을 무릅쓴 出漁(출어) 끝에 실종, 실종, 실종…
  
   썩어 가는 편의치적선을 몰고 荒天(황천)항해를 하다가 실종, 실종, 실종… 한국의 교통 사고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란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다. 海難(해난) 사고에 있어서도 한국은 세계 최상급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브리태니카사에서 펴낸 '재난' 이란 책에는 지난 1959년에서 1978년 사이의 20년 동안의 세계 주요 해난 사고 기록이 실려 있다. 수십 명 이상이 떼죽음한 큰 사고만 추린 것이다. 316건의 사고가 실려 있는데 한국이 19건으로 으뜸, 2위는 필리핀으로 16건, 3위가 일본으로 11건이다.
  
   해난 사고는 해상 교통량과 선박 보유 척수에 비례하는 게 원칙일 것이다. 섬이 7000 개인 필리핀이나 海運(해운)국가인 일본에서 큰 사고가 자주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으나 한국이 이런 나라를 누르고 수위를 차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경제성을 위해 안정성을 희생하도록 강요한 한국 해운·수산 구조의 문제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로 뛴 죄로 해서 나는 수많은 해난사고에 접해 보았다.
  
   한밤중에 단잠을 깨운 기자를 바라보는 선원아내와 아이들의 불안한 눈망울. 그 얼굴을 향해 '당신 남편이 탄 배가 실종됐다'고 사정없이 내뱉어야 할 때, 그래서 아내는 허물어지듯 핑그르 돌면서 까무러치고 그 위로 사진 기자의 플래시가 터질 때 나는 '선원들이 동네북이다'고 중얼거리며 '배를 안 타면 못 먹고사나?'고 속으로 배부른 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遠洋(원양)수산 회사들이 몰린 충무동 해안, 商船 회사들이 집중된 중앙동엔 한 달에도 몇 번씩 종종걸음을 치곤 했다. 선원들은 십중팔구 부산·경남·전남 사람들, 특히 영도·거제도·남해 사람들이 많았다. 형제나 친구끼리 서너 명이 같은 배를 탔다가 몰죽음을 하는가 하면 남편이 그렇게도 바라던 사내아이를 아내가 낳은 바로 그날 남편은 대서양의 荒波(황파) 속에 묻혀버린 일도 있었다.
  
   아우성, 통곡, 책상이 날고 유리창이 박살나는 회사 사무실, 지긋지긋한 수색기간 중의 기다림, 그리고 사망 선고. 밀고 당기는 피해보상 교섭. 선원들, 특히 원양선원들의 목숨 값은 또 얼마나 싼가? 육상 사고 사망자의 반도 안 되었다. 남편, 동생, 오빠의 유골 대신, 목숨과 바꾼 돈 보따리를 들고 가는 허망한 歸鄕(귀향) 길. 해난 사고가 너무 자주 터지자 이삼십 명이 실종된(해난사고에선 시체가 확인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실종'이라고 보도하며 따라서 '사망'만큼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사건도 2, 3단으로 신문에 나기도 했다. 지하철 붕괴나 열차 충돌 등으로 그렇게 많이 죽으면 틀림없는 1면 머리기사다.
  
   1976년 겨울 동해 대화퇴 漁場(어장)에서 수십 척의 어선이 조난, 어부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즈음엔 '진도개가 사라진다'는 기사가 '어부가 무더기로 사라진다'는 기사를 누르고 사회면 머리에 박힌 적도 있었다. 뱃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이런 풍조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 지배층은 여러 번 어로 금지명령을 내려다. 漁具(어구)도 불태우게 했다. 불교의 살생 禁斷(금단) 사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 뱃사람들은 사회계층 구분에서 밑바닥을 맴돌았다. 어민들에 대한 착취의 정도는 농민의 그것을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중과세 때문에 어촌이 붕괴, 流民(황민)이 생기고, 혹사를 당하기 싫어 바닷가에 좌초한 고래를 어민들은 밤에 몰래 바다로 떠밀어 넣었다고 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한 미국의 비숍 여사는 어민들이 '가난의 보호'를 추구하고 있다고 썼다('한국과 그 이웃들')
  
   조금이라도 넉넉해지면 수탈당해 버리므로 일부러 가난 상태에 머물러 그 가난을 수탈에 대한 방벽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도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바다를 외면, 내륙인으로 자처하려 했던 사람들. 자연환경을 거슬러 행동한 그 결과가 역사의 정체성으로 나타났다고 崔南善(최남선)은 '한국 해양사'에서 쓰고 있다.
  
   해방과 함께 온 조국분단은 남한을 대륙과 단절시켜 사실상의 섬으로 만들었다. 남한의 생존은 미국 등 해양 세력과의 밀착 관계에 해외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1960년대 이후 이 나라 뱃사람들의 뻗어 나감은 이런 환경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팽창에 비해 한국인의 해양 사상은 아직도 前근대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탱커 선원들의 우울, 잦은 海難(해난)사고, 아직도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이 보여주고 있다.
  
   동해 2호는 제주도 동쪽을 지나 부산과 대마도 사이의 大韓해협을 향해 다가갔다. 제주도는 보이지 않았다. 조국의 바다로 돌아왔다는 징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징어잡이 배 정도였다. 그러나 선내의 텔레비전 수상기에 똑똑히 잡히고 있는 KBS와 MBC의 프로가 그 어떤 징표보다도 강렬하게 '한국이 가까움'을 입증하고 있었다. 똑같은 수평선에 둘러싸인 '동해'였지만 선내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한국 텔레비전 방송이 '동해'가 조국의 磁場(자장) 안에 들어왔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뭍이 가까워지면 선원들은 가슴을 설렌다. 그런 설렘 사이사이로는 불안감이 깃들기도 한다. 육지는 바다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流體(유체) 위의 생활을 제2의 天性(천성)으로 받아들인 그들에게 固體(고체) 위의 생활은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강요한다.
  
   "늘 흔들리는 배 위에 있다가 갑자기 딱딱한 땅을 밟으면 섬찟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걸음걸이가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발놀림이 안 맞아 두 다리가 제멋대로 노는 것 같기도 하답니다. 외국의 약삭빠른 화류계 여자들은 걸음걸이만 보고도 선원들을 가려낸다고 합니다."
  


   최화섭 씨는 '선원들이 잘하는 건 탁구, 못하는 건 축구'라고 덧붙였다. 그런 것밖에도 유조선 선원들과 뭍 사람들의 구별점은 많다. 선원들은 대체로 장발이다. 배에는 이발사가 없고 歸港(귀항)해선 머리를 깎고 있을 한가한 시간이 없다. 선원들은 안경을 끼지 않는다. 視力(시력)이 1.0을 웃돌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별자리를 많이 안다. 직업상 天測(천측)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깨끗한 밤하늘을 구경할 기회가 잦은 덕분이기도 하다.
  
   탱커 선원들은 술을 천천히 마신다. 통행금지 시간을 걱정해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유행어나 時事(시사)화제에 어둡다. 탱커 선원들은 옷값을 거의 쓰지 않는다. 여름 航路(항로)를 뛰기 때문에 하복으로 족하다. 선원들은 겁이 많다. 스스로 세관원의 밥이라고 自嘲(자조)할 정도다. 세관원뿐 아니라 경찰관, 상인, 선박회사 직원 등등 뭍사람 일반에게 겁을 먹고 있다. 그런 겁은 뭍의 삶에 대한 겁이기도 하다.
  
   뭍의 생활에 적응하려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을 때 그런 생각은 육상의 모든 것에 대한 공포로 발전할 수도 있다. 느릿느릿한 탱커의 리듬과는 너무나 딴판인 택시의 질주, 망망대해의 편안함과 북적대는 도심의 자동차 행렬·인파, 수평선과 그 너머의 고향을 그리는데 굳어버린 향수 어린 눈동자와 또릿또릿, 번득번득 돌아가는 육지 사람들의 눈매, 상쾌한 바다의 공기와 숨막힐 듯한 도심의 대기...
  
   '역시 내가 살 곳은 바다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될 때 그들은 '육상의 패배자'로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동해'에는 선원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육상 직업으로 바꾸려 했다가 실패, 다시 바다로 돌아온 선원들이 많았다. 힘이 센 변기찬 씨는 수출 선원으로 고생하여 모은 돈으로 제주도에서 술집을 차렸다가 '돈천만 원을 깨먹고' 다시 배로 돌아왔다. 조기장 정명수, 기관수 정상율 씨는 택시운전을 시도했다가, 갑판원 정태석 씨는 공사판의 노동자로 일해 보다가 바다로 복귀했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는 바다에서 번 돈을 육지에서 순식간에 날려버린 선원들이 뭍에의 공포감을 갖고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일 것 같다.
  
   '동해가 중동∼극동 항로의 네 번째 해협인 大韓해협을 통과, 부산의 태종대 등대 앞을 지나간 것은 2월27일 정오 무렵이었다. 브리지의 무전기에선 '부산무선, 부산무선, 여기는 ○○○'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부산에 집이 있는 선원들은 부산 무선국을 불러 집으로 전화를 거느라고 바빴다.
  
   송정을 지나 양산군 기장, 일광, 좌천 쪽으로 '동해'는 北上(북상)하고 있었다. 비로소 왼쪽으로 조국의 해안과 그 위로 고래등같은 산 능선이 부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에겐 모두 눈에 익은 地形(지형), 두 달 만에 처음 보는 조국의 山河(산하)였다. 별 감회가 없었다. 그 동안의 항해가 고생스럽지 않았던 덕분이리라. 오후 네 시쯤 왼쪽으로 간절갑 등대가 허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얼룩말 무늬 등대 세 개가 부연 스모그 사이로 솟아났다. 다시 그 북쪽에는 울기 등대! 종착점, 울산항인 것이다.
  
   오후 5시, 동해2호 브리지에 李 선장이 나타났다.
  
   "하드 포트!"(왼쪽으로 확 꺾어라!) "하드 포트 써!"
  
   '동해'는 슬며시 좌회전, 울산항 해안 쪽으로 船首(선수)를 돌렸다. 오후 5시30분 船內에 '올 스탠바이'(전원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입 출항 때 늘 취하는 근무체제다. 왼쪽으로 원통 모양의 노란 부이가 보였다. 그곳에는 5만 톤쯤 되는 중급 유조선이 기름을 부리기 위해 붙어 있었다. '동해'는 아시아상선(주)의 지시보다도 하루 일찍 울산항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해가 저물어 입항 수속을 밟을 수 없었다. '동해'는 오후 7시부터 닻 내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울산 外港(외항)에서 이날 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전봇대만한 밧줄이 바다 속으로 덜컹덜컹 풀려 나갔다. 12새클, 약 70미터가 풀리자 '동해'는 潮流(조류)에 밀려 닻줄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멈추었다. 닻줄은 자체 무게로 뻘 바다 밑 10미터쯤까지 들어가 박혔다. 水深(수심) 35미터. '동해'의 갑판에는 작업등들이 환하게 켜졌다. 전등불 때문인지 주위의 공기가 탁하게 보였다. 얼마 있으니 분뇨 마르는 냄새와 비슷한 아황산 가스 냄새가 울산 공단 쪽 해안에서 밀려와 '동해'를 감쌌다. 싱그러운 갯바람만 마시던 선원들은 '캑캑'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배가 멈추자 브리지는 오히려 분주해졌다. 울산 무선국을 통해 집으로 전화를 걸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죽는 일이 아니면 서로 전화를 걸지 않기로 했다'는 조타수 주문길 씨만은 바위처럼 잠자코 있었다. 이틀 동안 김치 없이 식탁을 대했던 선원들을 대표하여 김무 씨가 울산 시내의 자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일 아침 일찍 김치 한 동이를 통선 편으로 보내라!"
  
   그는 아내에게 명령했다. 나와 박상원 기자는 이날 밤 짐을 쌌다.
  
   나는 상륙하는 게 못내 아쉬웠다. 군에서 제대한 뒤, 그러니 제대 말년의 병장시절 이후 지난 한 달 동안의 항해 기간처럼 마음 턱 놓고 지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누구의 간섭도 안 받고 나만의 시간을 이렇게 즐길 수 있을 때가 또다시 올 것인지, 나는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入港(입항) 날짜가 며칠 더 연기되었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다음날 아침 7시30분 울산항 導船士(도선사)가 '동해'에 올라왔다. 船內엔 다시 '올 스탠바이'의 비상벨이 울렸다. 닻줄이 다시 감겨졌다. 두 척의 똥똥한 예인선이 '동해'의 船首 양쪽에 붙었다. 오른쪽엔 3200 마력의 선진7호, 왼쪽엔 2700 마력의 선진6호. 2.2해리쯤 떨어진 부이를 향해 도선사는 슬금슬금 '동해'를 몰고 갔다. 두 예인선은 선수를 좌우로 밀면서 방향을 잡았다. '동해'의 엔진은 '전진' '후진'을 되풀이해 가며 조심조심 船體를 부이에 접근시켜갔다. 導船士는 브리지, 최1등 항해사는 워키토키를 들고 선수에서 서로 연락을 취해가며 23만 톤의 괴물을 몰이했다.
  
   "스리 케이블!"(1케이블Cable은 10분의 1해리) "투 케이블!"
   1등 항해사는 선수와 부이와의 거리를 수시로 도선사에게 보고했다. 브리지에서 선수까지의 거리는 200 미터, 도선사는 船首에 '제3의 눈'을 박아 놓지 않고선 이 巨船(거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감을 잡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한 시간 만에 '동해'는 부이 전방 220미터까지 기어갔다. 여기서 도선사가 '슬로우 어스턴!'(천천히 후진!)을 걸자 '동해'는 무지무지한 관성 때문에 오히려 부이 前方(전방) 149미터까지 다가간 뒤 멈추었다. 여기서 다시 위치 조정을 하여 '동해'는 부이 전방 190미터에 자리잡게 되었다.
  
   동해 주변의 바다는 수심 21미터. 홀수 19미터인 '동해'의 바닥과는 2미터의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동해' 주변의 바닷물 색은 예인선의 스크류가 일으킨 뻘물로 누렇게 변해 있었다. 작은 작업선이 하나 나타났다. 부이에다가 탱커를 묶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무어링 로프'(Mooring Rope)로 불리는 지름 70센티의 나일론 줄이 작업선에 끌려 부이에서 탱커의 船首로 건너왔다. 갑판원들은 이 繫船(계선) 줄을 당겨 船首 갑판 위 쇠말뚝에 걸었다. 작업선은 또 送油(송유) 호스를 바다 위에 띄워 부이와 탱커의 파이프라인을 서로 연결했다. 때는 오전 9시15분.
  
   석유공사의 작업반 10여 명이 통선을 타고 '동해'에 오른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곧 原油(원유) 부리는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각 탱크의 뚜껑을 열고 깊이를 재고 샘플 한 병씩을 떠내기 시작했다. 내가 원유를 본 것은 샘플 채취 때가 처음이었다. 원유는 늘 밀폐용기 속을 흘러간다. 유전→集油所(집유소)→저유탱크→송유관→시 아일랜드→유조선→정유공장→탱크 차→주유소 등 소비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사람의 눈에 좀처럼 뜨이지 않는다. 탱커 선원이나 정유공장 직원 가운데서도 원유를 못 본 사람이 있을 정도다. 가장 힘세고, 가장 널리 쓰이는 광물인 기름의 이런 비밀성은 그것의 신비나 불가해성을 더욱 짙게 하고 오해와 억측을 부르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탄은 사람들이 늘 가깝게 보고 만지고 하므로 '석탄문제'라 하면 어쩐지 다 아는 듯한 생각을 갖게 된다. 반면 원유는 미스터리의 안개 저편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삶을 에워싼 석유의 힘-수십만 가지의 석유화학 제품, 전력(화력발전소), 자동차, 산업동력-도 기름 그 원래의 얼굴이 아니라 몇 차례 變形(변형)된 모습으로 우리의 피부에 와 닿고 있다. 실체를 가늠하기가 힘든 것 같은데 그 힘은 전능하다. 석유개발의 도박성, 탐광자들의 狂信(광신)에 가까운 집념, 메이저라는 거대 기업군의 술책, 産油國(산유국)의 은밀한 세계전략-실체와 이미지의 괴리,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 정열과 환상을 부르는 상징, 기름의 추상화인 것이다.
  
   탱커는 계선 줄로 부이를 당기다시피 하여 멈추었고 곧 쿠웨이트 불간 대유전의 검은 원유는 송유 호스→부이→해저송유관→유공 貯油(저유) 탱크로 치달을 것이었다. 船室(선실)은 이제 상륙 준비로 부산해졌다. 첫날의 상륙조로 뽑힌 선원들은 양복을 갈아입고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선장, 기관장도 첫 상륙조에 끼였다. 그들은 집에 며칠 묵었다가 배로 돌아와 후임 船長(선장)·기관장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영원히 이 배를 떠날 것이다.
  
   정오쯤 부식을 실은 통선이 '동해'로 달려와 뱃전에 붙었다. 하오 1시쯤 10여명의 선원들은 선측 사다리 위를 뛰다시피 하여 이 통선으로 내려갔다.
   "뭐니뭐니 해도 갱웨이(신축사다리)를 내려갈 때가 제일 기분이 좋지요."
   며칠 전에 들은 주문길 씨의 말이 생각났다. 이날 상륙하는 선원들은 내일 이맘 때 다시 배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동해'가 당분간 繫船(계선) 상태에 놓일 것이므로 선원들은 나중에도 몇 차례 더 집에 갈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선지 그들의 표정은 느긋하게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기름 부리는 작업의 준비로 바쁘게 돌아가는 선원들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통선에 올랐다. 하늘은 잿빛구름으로 흐려 있었다. 통선이 '동해'의 뱃전을 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일로드의 종착역으로.
   판자처럼 납작한 '동해'의 길쭉한 몸뚱이가 시야를 꽉 채운 뒤 수평선상에서 천천히 오그라들고 있었다. '동해'는 1월3일 울산항을 떠난 지 57일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일곱 개의 바다와 네 곳의 해협을 지난 왕복 2만4369킬로미터, 약 6만 리의 뱃길이었다. '동해'는 3981톤의 벙커시유를 연료로 태우며 20만2054.4톤의 쿠웨이트 原油(원유)를 한국으로 가져온 것이었다.[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