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럴 때마다 갑판 밑의 기름이 이리저리 쏠리는 소리가 강물 흐르듯 쏴쏴 들려왔다. 海面 위의 요란한 파도보다는 해면 밑으로 힘을 미치는 조용한 너울이 배를 더욱 크게 흔든다. '배가 제법 논다'고 했더니 최 선장은 코웃음을 쳤다. "날씨가 매일 이렇다면 우리같이 빽 없는 사람들은 배를 못 타지요." '이번 항차 같으면 3000만 국민이 전부 배 타려고 하겠다'고 한 선원이 참견하고 나섰다. 동해 2호 선원들은 거의가 한 번쯤은 모진 풍파를 만나 '이번에 육지에 오르면 절대로 배를 안 탄다'는 맹세를 해 본 사람들이다.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보아야 뱃사람의 고생을 실감할 수 있다는 거다.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다는 겨울의 北태평양, 곧 北洋(북양). 기관수 민춘기 씨(38)는 이렇게 말했다. "1만 톤짜리 잡화선을 타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자주 왕래했죠. 여름의 태평양은 이름 그대로 잔잔하기 짝이 없습니다. 겨울에는 문제가 틀리지요. 일본을 넘어서면 미국 서해안까지 13일쯤 곧장 달립니다. 우선 다른 배를 자주 볼 수 없고 중간에 의지할 섬이 없으니 심리적으로 불안해지지요. 北洋은 '저기압의 쓰레기장', 또는 '저기압의 무덤'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늘 구름이 나지막하게 드리워져 있지요. 갑판을 넘은 바닷물은 얼어붙으니 배 전체가 얼음으로 도배되죠. 마스트의 가느다란 철사가 팔뚝처럼 굵어지고 갑판은 몇십 센티 두께의 氷板(빙판)으로 변하고…배가 파도 사이로 자맥질을 할 때마다 과연 이 배가 다시 치솟을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을 졸이게 되지요. 배가 파도 꼭대기에 얹히면 스크류가 공기 중으로 나와 헛돌 때도 있지요. 파도의 골 사이로 곤두박질 치면 다시 부르릉-엔진이 돌아가는데 그때마다 십 년 감수예요. 그럴 땐 엔진이 꺼지면 마지막이죠. 배는 파도를 맞받으면서 파도를 타야 하는데 엔진이 죽으면 파도가 측면으로 밀고 와 배를 엎어버린단 말예요. 북양에선 탈출해도 영하 20도나 되는 바닷물에서 당장 동태가 됩니다. 파도에 너무 시달리다가 보면 차라리 바다로 뛰어내리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화물선으로 가장 위험한 배는 原木(원목) 운반선이다. 침몰해도 原木을 타고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바다를 모르는 뭍 사람들의 순진한 착각일 뿐. 미국-일본 사이의 北태평양 항로에서 原木船을 1년간 탔다는 정상률 씨는 '원목선은 무게중심이 높이 있어 배가 잘 노는 데다가 原木을 묶은 줄이 터져 집채같은 원목덩어리들이 와르르 쏟아지면 끝장이다'고 했다. 원목을 실을 때는 요소 요소에 버팀목을 전봇대처럼 세워 박고 굵은 철사로 원목 무더기를 팽팽하게 동여맨다. 파도가 이 버팀목을 쓰러뜨리면 원목은 산사태가 난 듯 바다로 쏟아진다. 이런 바다로 비상탈출을 하면 원목 사이에 끼여 죽는다고 한다. 원목은 바다에서 모로 빙빙 돌기 때문에 그것을 타고 견딜 장사가 없다. 원목선이 원목을 실은 채 가라앉으면 원목의 부력이 동여맨 철사를 끊고 원목들이 해면 위로 튀어 오른다. 로켓 발사 장면처럼 대포소리를 내면서 원목이 海面 위 공중으로 튄다는 것이다. 슈퍼 탱커를 타면 적어도 파도에 의한 침몰이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탱커 생활을 오래하면 통선을 타도 멀미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문길 씨는 말했다. 슈퍼 탱커는 물보다 가벼운 기름을 싣고 있으므로 가라앉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실정이다. 그 대신 폭발이나 좌초에 의한 침몰 위험과 지루함이 선원들을 괴롭힌다. 반면 잡화선 선원들은 파도에 혼이 나긴 하지만 자주 외국 항구에 들른다는 위안이 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이종권 2항사는 '잡화선을 타고 싶어도 멀미를 어떻게 견딜까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멀미에는 장사가 없다고 한다. 선장도 다른 배의 손님으로 타면 멀미를 한다고 한다. 그만큼 멀미는 심리적인 원인이 강하다. 멀미가 날 때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멀미에 취해 누워버리든지 식사를 끊든지 하면 멀미에 지는 것이다. 멀미가 날 때는 선실 안에 틀어박히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 시선을 멀리 두고 심호흡을 하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이 멀미는 뭍 사람과 뱃사람을 갈라 놓는 장벽이 되고 있다. 멀미를 이기지 못하면 뱃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멀미를 계속하는 선원은 일부러 항구에 들러 아예 下船(하선)시켜버리는 선장도 있다. 해양학의 진보가 늦고 뱃사람들에 대한 이해나 동감이 부족한 큰 원인이 멀미라는 견해도 있다. 세일론을 통과, 말래카 해협 쪽을 겨냥, 針路(침로)를 굳히고 벵갈만 남쪽을 가로질러 동해 2호가 나감에 따라 우리는 많은 배들을 만나게 됐다. 11일 오전만 해도 동해 2호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배가 네 척 육안으로 목격되었다. 수평선을 둘러보면 늘 너댓 척의 배가 발견되었다. 말래카 해협-세일론 항로는 세계에서도 가장 선박 통항량이 많은 축에 든다. 동남아시아나 극동에서 중동, 아프리카, 유럽, 인도로 가는 배나 그곳에서 돌아오는 배는 이 항로를 지나야 하므로 붐빌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항로는 선박 전시장 노릇도 한다. 이날 우리 배와 스친 선박만 해도 유조선(空船, 滿船), 컨테이너선, 자동차전용선, 잡화선, 광석선, 원양어선 등 가지각색이었다. 국적별로는 가장 많은 일본을 비롯 중공, 싱가포르, 리베리아, 파나마, 필리핀, 그리스, 아부다비, 영국 등등. 동해 2호 선원 가운데는 이 항로를 십 년 가까이 다닌 사람도 있어 지나치는 배 이름을 읽고는 '저 놈 또 만났다'고 아는 체하는 판이었다. 아부다비 국영 석유 회사의 탱커 사관은 VHF로 우리 쪽과 통화하는 중에 '당신 배는 쉘이 초대 船主(선주)였고 노르웨이 회사에게 넘어갔다가 1979년에 당신 회사에 팔렸지?'라고 배 족보까지 술술 읽기도 하였다. 바다는 넓은 것 같지만 그 바다를 한 동네처럼 오가는 外航(외항) 선원들에겐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다만 북한 선박과 스칠 때는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동해 2호는 이번 항차에서는 PG로 갈 때 이 벵갈만에서 8000톤급 북한 화물선 백두산호와 마주쳤다. 500미터쯤 떨어져 지나쳤는데 그 흔한 VHF 통화도 없이 냉랭하게 갈라졌다. 상대방의 배를 구경하겠다고 양쪽 선원들이 갑판과 선교로 나와 있는 것은 서로가 보았겠지만 아무도 손을 흔들지 않았다고 한다. 백두산호는 혁명호, 개혁호, 은성호와 함께 한국의 유조선 선원들이 자주 만나는 북한 배들 가운데 하나다. 북한은 요즘 이란에서 기름을 사들이고 있으므로 양쪽의 유조선끼리 만날 날도 멀지 않다. 지금은 북한이 외국 탱커를 용선하여 기름을 운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입량이 늘면 그들도 자체 유조선을 확보할 것이다. 한국의 탱커 선원들과 가장 친근한 것은 아마도 필리핀 선원들일 것이다. 브리지에서 당직중인 사관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까이에서 항해하는 배를 VHF로 불러내 말을 걸 때가 자주 있다. 먼저 채널 16으로 교신을 한 뒤 다른 채널로 바꾸어(채널 16은 만국 공통이므로 오래 쓸 수가 없다) 雜談(잡담)을 하게 된다. 일본이나 유럽 선원들은 이런 잡담을 싫어한다. 말이 길어지면 냉정하게 통화를 끊고 이쪽을 무안하게 만드는 게 보통이다. 필리핀 등 아시아, 南美(남미) 선원들은 그렇지 않다. 특히 필리핀 선원들은 상냥하게, 솔직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 한국 선원들이 가장 자주 상대하는 외국 선원이 되고 있다. 3항사 박영간 씨와 통화를 한 필리핀 선원은 자신이 한국 여자와 결혼했다고 털어놓았다. 아내가 임신하여 친정인 포항으로 보내 출산 준비를 시키고 있다는 말도 했다. 다른 필리핀 선원은 부산의 어느 술집에 있는 김소희라는 접대부 이름을 들먹였고 마산으로 가고 있다는 필리핀 선원은 마산 여자들이 예쁘냐고 묻기도 했다. 朴 3항사는 지난해 VHF로 필리핀 국영 석유회사 유조선의 3항사와 친해졌다. 걸프로 갈 때였는데 두 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까이 붙어 PG까지 갔기 때문에 당직 시간만 되면 서로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편지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번에 또 만났다. 이번엔 길이 엇갈려 잠시밖에 통화할 수가 없었다. 필리핀 선원들은 VHF 채널 16으로 '빠송, 빠송'이라고 하거나 휘파람을 불어 '손님'을 부르는가 하면 한국 배끼리의 통화를 엿듣고 있다가 끝나자마자 '코리아 쉽!' 이라고 부르며 말을 걸어오는 열심을 보였다. 필리핀 선원들은 지금 세계 해운 시장에 대거 수출되고 있어 이 부문에서 선두그룹을 달리고 있는 한국 선원들을 위협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