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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2호, 인도양에서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바다와 배를 공부하는 航海記(3)

淸山에 2015. 4. 18. 17:47




동해 2호, 인도양에서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

바다와 배를 공부하는 航海記(3)

趙甲濟   


   


  
   현대세계의 文明(문명)이 기름에 의존한다는 말은 '우주선 지구호'의 일상적 삶이 유조선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세계 기름 소비량의 반을 유조선이 운반한다. 적재 톤수에서 세계 화물선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3100여 척, 3억2000만 톤의 유조선들은 지구를 돌리는 동맥-오일 로드를 끊임없이 오가는 赤血球(적혈구)들이며 지구는 이 적혈구가 공급하는 산소, 곧 기름으로 생존하고 있다. 유조선에의 의존도가 100퍼센트인 한국은 스물 대여섯 척의 기름배가 이어주는 '해상벨트'로 움직여지고 있다. 이 벨트의 주요 연결 부품인 동해 2호는 3800만 명의 4일분 소비량에 해당하는 기름을 실은 채 인도양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냉각기의 대롱들을 후벼주는 수술 작업은 열 시간이나 계속됐다. 관 속의 찌꺼기를 녹여내기 위해 화공약품을 쉼 없이 부어 넣었다. 그것은 마치 고혈압 환자의 혈관을 뚫고 넓히는 일 같았다. 
  

  
 

기관실의 상황실은 기관의 작동 상탤르 알려주는 수 백개의 계기로 만원.


  
   슈퍼 탱커로서는 문화재 급인 열네 살짜리 동해2호는 여러 가지 老年期(노년기) 질병을 앓고 있었다. 동해 2호는 이날 저녁 6시30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관소통 수술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오일 벨트를 세워 둘 수는 없는 일, 尹 기관장은 근본적 수술을 다음으로 미루고 수리를 대충 끝냈던 것이다. 오만을 향해 온 길을 되돌아 떠내려가던 배는 針路(침로)를 인도 반도의 남단을 향해 굳히고 129도 방향으로 13노트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역시 배는 가야 된다." 조타수 주문길 씨가 말했다. 배가 정지한 열 몇 시간이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배가 움직이자 船內(선내)에는 活氣(활기)가 돌았다. 배의 진동, 엔진소리, 다시 이어지는 물 이랑은 적막한 한나절을 보낸 선원들에게 다시 생기를 불어넣었다. 화투 치는 소리, 탁구장의 고함은 더 요란한 것 같았고, 휴게실과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더욱 부산하게 움직였다.
  
  
  
  

 밑바닥에서 올려다 본기관실은 고층 건물을 연상시킨다.

작은 화력 발전소만한 이 우람한 장치를 돌리는 건 물의 힘이다.
 
 
   다음날 아침 식당에서 동행한 박상원 사진기자가 대뜸 '오늘이 며칠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5일이다'고 했더니 그는 '3일이 틀림없다'고 우겼다. 마침 식당에 나타난 3항사가 판결을 내려 주었다. 2월4일이었다. 3항사는 요일을 맞추어 보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의 해답은 모두 어긋났다. 날짜와 마감 시간과 부대끼며 살아온 나에겐 이것은 작은 충격이었다. 갑작스런 건망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船上(선상)생활은 날짜나 요일의 바뀜에 대응하지 않는다. 일요일이라고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배가 멈추는 것도 아니다. 자연히 날짜나 요일의 변화를 눈치채게 하는 조짐을 찾기 어렵게 된다. 더구나 우리 같은 승객은 휴일과 근무일이 따로 없어 날짜를 꼭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날짜와 요일은 聯想(연상) 작용으로 기억되는 수가 많다. 배 위에선 그런 연상을 일으키게 하는 매체도 찾기 어렵다. 누구를 만난 다방, 무엇을 산 구멍가게, 몇 시까지 술을 마신 주점… 이런 地理感(지리감)에 의한 연상 기억을 유조선에선 기대할 수 없다. 요일과 날짜는 바뀌어도 똑같은 茫茫大海(망망대해). 어디에다가 기억을 붙들어 매어 두고 표시를 해 둔다는 말인가? 기억력을 발휘케 하는 외부의 자극도 유조선엔 없다. 항구의 추억도 없고 세상에서 날마다 터져 자빠지는 사건, 사고의 뉴스도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다. 유조선 선원들을 지배하는 단조로움, 일상의 되풀이, 그것은 기억력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또 경쟁력, 즉 뭍의 인간들과 부대끼며 싸워 나가는 생존경쟁력의 약화를 뜻한다.
  
   "박 대통령이 죽은 그 술자리에 김00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우리는 동해 2호에 오른 날부터 이런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하남수 1기사는 우리의 乘船(승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고 했다.
   "선원들 사이에 김00이가 있었다, 없었다로 시비가 붙어 있단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뭘 압니까? 서로 다투어도 권위 있는 판정을 내릴 사람이 있나요? 그래서 기자들이 오면 확답을 받자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뭍에서는 이미 두 해 전에 '확정판결'이 난 문제가 이 배 안에선 化石(화석)처럼 굳어 아직 살아 있었다. 뱃사람들의 가장 큰 정보원은 신문철. 휴게실에 놓인 '조선일보' 철은 두 달 전의 것이었다. 그것은 동해 2호가 '81년 12월 말 울산에 들어갔을 때 아세아 상선(주) 울산 사무실에서 올려 준 '81년 11∼12월 치였는데 어느 새 '구문철'이 돼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선원들은 손때가 까맣게 묻어 신문지가 닳을 만큼 舊聞(구문)을 애독하고 있었다. "PG로 갈 때는 기사를 읽고 귀항길에는 광고를 읽지요." 이덕인 선장의 말이었다. 주문길 씨는 박 대통령 암살이란 천지 대사건도 일주일 늦게 알았다고 했다. 일본 항구에 탱커가 들어가서야 알았다는 것이다. 동해 2호에는 팩시밀리 신문 수신기가 없어 선원들의 정보 결핍증은 더욱 극심한 형편이었다. 윤 기관장이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고 가끔 전달하는 뉴스가 이 배에선 가장 생생한 소식이었다. KBS의 해외방송을 들을 수는 있지만 그 뉴스가 너무 '밝고 보람찬' 내용들만 전해주어 선원들은 흥미를 잃고 있었다.
  
   "세계 타이틀 매치가 언제 열린다는 소식은 알려주는데 막상 그 날 對戰(대전)결과에 귀를 기울이면 감감소식이에요. 이럴 땐 영락없이 우리 선수가 깨진 경우지요. 그 대신 현대가 어디서 몇억 달러짜리 공사를 땄다는 식의 뉴스는 자주 나와 기분이 좋아요."
  
   '81년의 한국을 진동시킨 하 형사사건, 윤노파 살해사건, 여대생 피살사건도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歸港(귀항)한 뒤에야 그들은 골동품이 된 신문철을 통해 驚天動地(경천동지)의 사건을 뒤늦게 '재발견'한 것이었다. 李 선장과 尹 기관장은 '당신 네 두 사람이 재미있는 얘기 보따리를 갖고 올 줄 믿고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면서 술자리엔 꼭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하곤 했다.
  
   "우리끼리 얼굴을 맞대면 할 얘기가 있어야지, 얘기거리도 적은 데다가 모두 몇 번씩이나 되풀이되풀이 써먹은 거라서…누가 첫 마디만 꺼내면 스토리가 대충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미리 알아버려요. 그래도 잠자코 듣지요. 그래야 시간도 흐를 것이고…"
  
   이런 船內에서 떠돌아다니는 화제는 거의가 이삼 년 해묵은 것들. 나는 간혹 타임 머신을 타고 1978, 9년의 한국에 와 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시간의 흐름이 굳어버린 세계, '정보의 진공관' 속을 지나다니는 뱃사람들.
  
   그들은 뭍에 내리는 순간부터 '정보단절'에 의한 충격에 직면하게 된다. 담배값이 그 사이 오른 것을 몰라 간첩이란 오해를 받기도 하고 그런 오해를 면하려고 버스를 탈 때나 커피값을 낼 땐 무조건 천 원짜리를 건네준다. 집에 돌아와 보면 호주머니는 동전 바구니가 돼 있고 어린아이들만 좋아한다. 친구들과 만나도 공통의 얘기거리가 없다. 억지로 아는 척 했다간 창피 당하기 일쑤. 술자리에선 입을 닫고 있는 게 上手(상수)고 집에선 손님 노릇이다. 이런 뱃사람들이 '바다에서 번 돈으로는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는 그 돈으로 뭍에서 轉職(전직)을 꾀하다가 몽땅 날리고 다시 배로 돌아오곤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리라.
  
   냉각관 수리를 끝내고 동해 2호가 航進(항진)을 재개한 다음날 오후 우리는 기관실에 있었다. 윤 기관장이 기관실 촬영을 '감독'한다고 면도를 말끔히 한 하얀 얼굴에 주황색 작업복과 안전모를 착용하고 나와 우리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다. 하오 2시쯤 윤 기관장은 기관실의 작동 상태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상황실로 급히 들어오더니 '오늘은 이쯤 해서 촬영 중지! 라고 소리쳤다. 말투는 우스개였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2기사 깨우고 기관부 비상 소집!"
  
   사진 찍는다고 어수선해졌던 기관실 분위기는 금새 싸늘하게 식었다. 윤 기관장은 박 기자를 안내하던 길에 보일러 버너의 외벽에서 볼그스름한 반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갑판원들은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커피 타임을 갖고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한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철판이 손바닥만큼 붉게 달아오른 게 아닌가. 이 버너 속에선 벙커C油가 연소, 보일러의 물을 끓인다. 불꽃이 직접 버너의 철판 벽에 닿지 못하도록 사방 벽을 따라 耐火(내화) 벽돌을 붙여 놓았다. 그 벽돌 한 장이 벽에서 떨어져 나가 불꽃이 곧장 철판을 달구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두면 버너에 구멍이 나고 기관실엔 화재가 날 판이다.
  
   "보일러를 죽인다!"
  
   尹 기관장은 피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보일러를 죽인다는 것은 정박이나 냉각기 수리 때같이 엔진만 죽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배는 定期(정기)점검을 위해 드라이 도킹을 할 때만 보일러를 끄는데 '동해'는 인도양 가운데서 응급수술을 받게 됐다. 보일러, 곧 배의 심장을 잠시라도 죽이는 것은 開心(개심)수술만큼이나 까다롭다.
  
   2시50분 동해 2호에는 다시 고요가 깃들었다. 엔진을 끄고 스크류 회전을 정지시킨 것이었다. 이어서 기관실의 부속 장치 하나, 하나씩을 차례로 죽여가기 시작했다. 심장에 칼질을 하기 전에 환자의 신경을 마취시키듯 거대한 기관실의 복잡한 신경조직들을 잠재워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연료유 공급 밸브가 잠가지고 버너가 꺼지자 보일러도 서서히 식어갔다. 섭씨 500도 넘게 달구어졌던 거대한 보일러와 갖가지 파이프들은 냉각되면서 오므라들고 있었다. 보일러 조직 전체에 變形(변형)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때 일부러 빨리 식혀 주려고 물을 뿌린다든지 찬 공기를 쐬면 각 기관이 기형적으로 쭈그러지면서 기계에 금이 가거나 구겨져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워낙 큰 보일러인지라 완전히 숨을 죽이는 데도 근 스무 시간이나 걸렸다.
  
   기관부원들은 전체 기관의 조직이 모두 보조를 맞추어 잠들도록 철야 감시를 해야 했다. 기계의 고장을 알리는 '앵앵'하는 사이렌은 밤새도록 울어 선내를 긴장된 분위기로 몰고 갔다. 동해 2호는 이제 두 번째의 표류에 들어갔다. 카라치 남남서 600킬로미터 해상, 아라비아 해의 한복판, 수심 3100미터의 바다에서 23만 톤 유조선은 死體(사체)가 돼버렸다. 해·조류에 몸뚱이를 내맡기고 드러누워 버린 동해 2호는 또 북쪽으로 되돌아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산더미 같은 파도는 슈퍼 탱커를 어쩔 수 없지만 수첩만한 벽돌 한 장은 이 巨船(거선)을 심장마비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초대형 유조선의 敵(적)은 늘 내부에 있는 법이었다.
  
   이 슈퍼 탱커의 심장마비가 水深(수심) 깊은 대양에서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폭풍 속에서나 탱커들이 줄을 서는 싱가포르 해협과 같은 좁고 얕은 水路(수로)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풍파가 세어도 배의 기관이 살아 있는 한 침몰은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다. 반대로 아무리 배가 커도 엔진이 죽으면 파도를 모로 받게 돼 끝장을 보기가 쉽다. 좁고 얕은 水路에서 기관 고장을 일으킨 탱커가 떠밀리다가 암초에 얹혀져 기름을 쏟아놓는 사고는 이미 숱하게 일어났다. 지난 '79년에는 동해 2호의 자매선 동해 1호가 대만 근해에서 기관마비를 일으켜 5일 동안 표류, 중공 쪽으로 떠내려가지 않나 하는 우려를 자아낸 적도 있었다.
  
   풍랑엔 안전한 유조선이 가장 자주 걸리는 발작이 이런 기관마비. 유조선 이외의 상선들은 두 대 이상의 보일러를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이다. 퀸 메리 호 같은 호화 여객선은 여덟 개의 보일러를 갖고 있다. 이런 배에선 보일러가 하나쯤 마비되어도 큰 문제가 없다. 유조선에 보일러가 하나만 붙게 된 것은 지난 '60년대부터. 일본 조선소에서 값싸고 간편한 원 보일러 슈퍼 탱커를 만들자 船主(선주)들은 사고의 위험성은 접어두고(대부분의 선박 사고는 보험으로 처리되므로 선주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배 값이 헐하다는 매력에 꾀여 이런 배들을 대량 주문, 금방 초대형 유조선의 主流(주류)를 이루게 됐다. 경제성이 안전성을 누른 셈이다.
  
   그 결과는 유조선 사고의 증가, 해양 오염, 그리고 기관원들의 고통으로 나타났다. VLCC의 첫 세대에 속해 유물적인 가치가 있는 동해 2호는 전형적인 단일 보일러 탱커. 이런 탱커에 보일러 마비사고가 터져 자체 수리가 불가능해지면 헬기로 외부기술자나 수리 기계를 데려오든지, 예인선을 불러 수리 조선소가 있는 가까운 항구로 끌려가든지 해야 한다. 어느 쪽이나 수억, 또는 수십억 원을 까먹는 일. 더구나 동해 2호처럼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大洋(대양)에서 그런 최악의 상태에 빠진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기름을 가득 실은 VLCC가 접안할 수 있는 항구는 가까운 곳도 PG나 싱가포르밖에 없다. 그곳까지의 예인비용은 동해 2호의 몇 년 운임 수입과 맞먹을 것이다. 보일러 마비 사고가 나면 기관부원들은 가장 먼저 보일러 用水(용수)의 저장량을 점검한다. 슈퍼 탱커를 움직이는 것은 이 보일러용 증류수가 변한 증기의 힘이다.
  
   보일러가 죽으면 증류수를 만드는 造水機(조수기)도 가동하지 못한다. 증류수의 비상용 저장량이 부족하면 고장을 수리해도 보일러를 살릴 수가 없고 그렇다고 증류수를 만들 수도 없어 기관은 완전히 구제불능이 돼버린다. 다행히 동해2호는 날마다 30톤쯤의 증류수를 만들어 누수분의 충당에 쓰고 나머지는 비축한 덕분으로 90톤을 확보하고 있었다. 보일러가 죽자 기관부는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 발전기의 용량이 적어 선실의 온도 조절기 가동이 중단됐다. 식당의 증기솥 가동도 중단됐다. 섭씨 30도를 넘는 불볕 아래 밀폐된 船室(선실) 안에서 선원들은 칙칙한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날 밤 휴게실엔 기관부원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작판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누군가가 화투를 치자고 권하자 안장렬 통신사는 "이럴 때는 자중해야지"라며 혀를 끌끌 찼다.
  
   다음날 아침 보일러 버너의 내부 온도가 섭씨 80도까지 내려갔다. 조기장 정명수 씨가 방화복을 입고 장갑과 보안경을 낀 채 헝겊으로 목을 감고 버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무너져 내린 내화 벽돌을 끼워 붙이는 작업이 가슴을 헉헉 막는 뜨거운 밀폐 공간 속에서 계속됐다. 이즘 갑판에서는 돌고래 구경이 한창이었다. 두세 마리씩 무리를 지은 돌고래 가족이 좌현 쪽 바다에서 뜀뛰기를 하고 있었다. 몸을 해면 위로 솟구칠 때마다 '푸푸' '꿀꿀'하는 돌고래의 '대화'가 고요한 뱃전을 울렸다. 그 소리는 갑판원들의 녹을 까는 망치 소리와 어울려 大洋으로 번져 나갔다. 오만만을 지날 때부터 몇 번 나타난 돌고래 떼는 '동해'와 달리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었다. 뱃머리 앞에서 배의 진행 방향을 가로질러 깡충깡충 뛰며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하는 모습은 '나를 치어 보라'고 탱커를 놀리는 것 같았다.
  
   이날 돌고래 떼는 배가 달리지 않으니 재미가 없었든지 몇 번 배의 키를 재어 본 뒤 사라져버렸다. 돌고래는 船首(선수) 앞에서는 배가 밀어내는 물의 압력을 받아 최고 40노트 속도로 헤엄을 칠 수 있다고 한다. 평소의 속도는 시속 20노트. 쾌속 商船(상선)과 맞먹는다. 물고기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가다랭이, 황새치, 돛새치, 참치, 알바코 따위로 최고 60노트다.
   "갈매기와 돌고래는 우리의 친구지요."
   갑판원들과 함께 돌고래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던 최화섭 선장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도양으로 나온 뒤 생명과 만난 적은 그 둘뿐이었던 것이다. 얼마 뒤 상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뱃전에서 내려다보니 비행기처럼 뱃전 바로 밑을 빙빙 돌고 있었다. "쇠고기 기름덩어리 가져오라!" 갑판장 김상달씨가 고함을 질렀다. 상어낚시를 해 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