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2호, 인도양에서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 바다와 배를 공부하는 航海記(3) 趙甲濟
현대세계의 文明(문명)이 기름에 의존한다는 말은 '우주선 지구호'의 일상적 삶이 유조선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세계 기름 소비량의 반을 유조선이 운반한다. 적재 톤수에서 세계 화물선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3100여 척, 3억2000만 톤의 유조선들은 지구를 돌리는 동맥-오일 로드를 끊임없이 오가는 赤血球(적혈구)들이며 지구는 이 적혈구가 공급하는 산소, 곧 기름으로 생존하고 있다. 유조선에의 의존도가 100퍼센트인 한국은 스물 대여섯 척의 기름배가 이어주는 '해상벨트'로 움직여지고 있다. 이 벨트의 주요 연결 부품인 동해 2호는 3800만 명의 4일분 소비량에 해당하는 기름을 실은 채 인도양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냉각기의 대롱들을 후벼주는 수술 작업은 열 시간이나 계속됐다. 관 속의 찌꺼기를 녹여내기 위해 화공약품을 쉼 없이 부어 넣었다. 그것은 마치 고혈압 환자의 혈관을 뚫고 넓히는 일 같았다.
기관실의 상황실은 기관의 작동 상탤르 알려주는 수 백개의 계기로 만원. 슈퍼 탱커로서는 문화재 급인 열네 살짜리 동해2호는 여러 가지 老年期(노년기) 질병을 앓고 있었다. 동해 2호는 이날 저녁 6시30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관소통 수술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오일 벨트를 세워 둘 수는 없는 일, 尹 기관장은 근본적 수술을 다음으로 미루고 수리를 대충 끝냈던 것이다. 오만을 향해 온 길을 되돌아 떠내려가던 배는 針路(침로)를 인도 반도의 남단을 향해 굳히고 129도 방향으로 13노트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역시 배는 가야 된다." 조타수 주문길 씨가 말했다. 배가 정지한 열 몇 시간이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배가 움직이자 船內(선내)에는 活氣(활기)가 돌았다. 배의 진동, 엔진소리, 다시 이어지는 물 이랑은 적막한 한나절을 보낸 선원들에게 다시 생기를 불어넣었다. 화투 치는 소리, 탁구장의 고함은 더 요란한 것 같았고, 휴게실과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더욱 부산하게 움직였다.
밑바닥에서 올려다 본기관실은 고층 건물을 연상시킨다. 작은 화력 발전소만한 이 우람한 장치를 돌리는 건 물의 힘이다. 다음날 아침 식당에서 동행한 박상원 사진기자가 대뜸 '오늘이 며칠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5일이다'고 했더니 그는 '3일이 틀림없다'고 우겼다. 마침 식당에 나타난 3항사가 판결을 내려 주었다. 2월4일이었다. 3항사는 요일을 맞추어 보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의 해답은 모두 어긋났다. 날짜와 마감 시간과 부대끼며 살아온 나에겐 이것은 작은 충격이었다. 갑작스런 건망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船上(선상)생활은 날짜나 요일의 바뀜에 대응하지 않는다. 일요일이라고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배가 멈추는 것도 아니다. 자연히 날짜나 요일의 변화를 눈치채게 하는 조짐을 찾기 어렵게 된다. 더구나 우리 같은 승객은 휴일과 근무일이 따로 없어 날짜를 꼭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날짜와 요일은 聯想(연상) 작용으로 기억되는 수가 많다. 배 위에선 그런 연상을 일으키게 하는 매체도 찾기 어렵다. 누구를 만난 다방, 무엇을 산 구멍가게, 몇 시까지 술을 마신 주점… 이런 地理感(지리감)에 의한 연상 기억을 유조선에선 기대할 수 없다. 요일과 날짜는 바뀌어도 똑같은 茫茫大海(망망대해). 어디에다가 기억을 붙들어 매어 두고 표시를 해 둔다는 말인가? 기억력을 발휘케 하는 외부의 자극도 유조선엔 없다. 항구의 추억도 없고 세상에서 날마다 터져 자빠지는 사건, 사고의 뉴스도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다. 유조선 선원들을 지배하는 단조로움, 일상의 되풀이, 그것은 기억력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또 경쟁력, 즉 뭍의 인간들과 부대끼며 싸워 나가는 생존경쟁력의 약화를 뜻한다. "박 대통령이 죽은 그 술자리에 김00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우리는 동해 2호에 오른 날부터 이런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하남수 1기사는 우리의 乘船(승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고 했다. "선원들 사이에 김00이가 있었다, 없었다로 시비가 붙어 있단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뭘 압니까? 서로 다투어도 권위 있는 판정을 내릴 사람이 있나요? 그래서 기자들이 오면 확답을 받자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