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유조선의 거대한 기관실 탐험 바다와 배를 공부하는 航海記(2) 趙甲濟 리틀 쿼인을 지나 동해 2호가 '불의 바다' PG(페르시안 걸프)를 하직하고 인도양의 최북단인 오만만으로 접어든 날 저녁, 船內(선내)에는 활기가 돌고 있었다. 外地(외지) 수당과 초과 근무 수당이 지급된 덕분이었다. 총무역할을 하는 통신장 안장열 씨(34세)가 수당 명세서와 함께 돈을 내주었다. 본봉은 육상에서 가족들이 대신 받기에 탱커 선원들이 돈을 만지는 것은 이 때뿐. 보통 선원들은 5만∼10만 원의 수당을 받았는데 船內 매점에서 사 쓴 물건값은 공제되었다. 선내 매점에서는 담배, 맥주, 콜라, 소주, 양주를 면세로 팔고 있었다. 24개가 든 깡통 맥주 한 상자는 5500원, 콜라는 5900원, 거북선담배 열 갑이 2500원, 양주 한 병이 5000원, 수당 명세서를 보니 선원 35명 가운데 여섯 명은 외상 실적이 전혀 없어 공제액이 한 푼도 없었고 열다섯 명은 1만원을 밑돌고 있었다. 온몸의 골조가 통뼈로 된 듯 완강하게 생긴 펌프 맨 김무씨 는 '처자식 생각하면 담배 한 개비도 아깝다'고 하면서 유조선 선원들만큼 돈을 짜게 쓰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상륙할 곳이 없어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동해 2호에서는 점심식탁에 싱가포르에서 통선으로 조달한 오렌지를 하나씩 내놓고 있었다. 나는 오렌지가 나온 날 보통 선원 식당에 들렀다가 그들의 식탁에는 그것이 빠져 있는 걸 보고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윤 기관장에게 넌지시 '사관들 식사와 선원들 식사가 다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 차별하다간 반란이 일어나라고요?'라고 그는 면박을 주듯 내뱉었다. 그러면 오렌지는 어디로 갔는가? 며칠 뒤 의문이 풀렸다. 조타수 주문길 씨(40세)가 말했다. "그 오렌지는 조 부장님도 맛 보셨겠지만 國産(국산)과는 달리 참 달지 않습니까? 우리 선원들은 그걸 먹지 않고 식당 냉장고에 모아둡니다. 울산에서 내릴 때쯤 되면 이, 삼십 개는 되지요. 그걸 집에 갈 때 가져갑니다. 명색이 중동에 갔다 오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그래서 외제 오렌지로 때우는 거죠. 이 배의 보통 선원들은 혼자서는 오렌지를 아무도 안 먹습니다. 자식이란 것이 뭔지…" 양정모 선수와 함께 레슬링을 배웠다는 기관수 백평호. 제주도의 이름난 역도 선수였다는 갑판원 변기찬, 집안에서 대대로 力士(역사)들이 나왔다는 김무씨 등 험상궂고 무심하게만 보이는 선원들이 노란 오렌지가 든 선물 보따리를 감싸 안고 집으로 들어서는 광경을 상상하니 나의 무딘 가슴 한구석도 얼얼해 왔다. 수당이 지급된 날 밤 선원 휴게실과 사관 휴게실에선 '새 잡이'가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결과를 물어보니 선원 쪽은 기백원, 사관 쪽은 기천원을 상한으로 하여 얘기되고 있었다. 선내의 화투는 심심풀이가 목적, 뭍의 10분의 1 단위도 안 되는 판돈은 그저 구색으로 맞춘 것에 불과한 듯했다. 오만灣(만)으로 나온 동해2호는 인도남단까지 직선으로 그어진 항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선수를 고정시키고 검푸른 바다를 헤쳐 가기 시작했다. 오만灣 남쪽은 아라비아海(해), 그 남쪽을 인도洋(양)으로 가르지만 灣과 海와 洋의 구분이 市界(시계)나 道界(도계), 국경처럼 확실한 것은 아니다. 오만만으로 나오니 벌써 바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PG에서보다 바다는 더욱 검게 짙푸른 색을 띠기 시작했고 수평선은 맑게 떠올랐으며 공기는 더 투명하였다. 視程(시정)은 10海里(해리)로 지름 36킬로미터 안의 바다에 떠 있는 배는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유조선의 목격회수는 급격히 줄어 쌍안경을 통해서도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항해가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오일 로드가 여러 가닥으로 갈라졌기 때문.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 나온 오일 로드의 本流(본류)는 오만만 북쪽에서 동서로 갈라진다. 가장 굵은 흐름은 PG→북·서유럽 항로('78년 수송량은 2억4000만 톤), 다음이 동해 2호가 얹혀 있는 PG→극동항로(2억 톤), 이어서 PG→지중해, PG→北아메리카 차례. 이들 支流(지류) 가운데 가장 긴 것은 희망봉을 돌아 도버 해협을 지나 스웨덴 등 北유럽에 이르는 약 2만 킬로미터 항로다. 요즈음은 왕복 석 달이 걸리는 無寄航(무기항) 뱃길이다. 동해2호가 지금 지나고 있는 오만灣은 지난 '71년 12월19일 새벽4시께 한국삼양항해소속 유조선 스타호(12만톤)가 브라질 유조선 바르보사號(6만3000톤)에게 들이받힌 곳이기도 하다. 선실이 있는 꽁무니 쪽을 받힌 시스타는 기름을 싣고 있었는데 충돌 직후 대폭발했다. 바르보사 호에도 불이 났다. 시스타 호에서 새어 나온 기름은 사방 2킬로미터 해상으로 퍼지면서 불바다를 이루었다. 당직 근무 중, 먼저 탈출한 선원 열한 명은 이 불바다에 던져져 죽음을 맞았다. 나머지 선원 서른 몇 명은 잠자리에서 뒤늦게 일어난 덕분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불이 붙지 않은 뱃머리 쪽으로 탈출, 표류하다가 노르웨이 선박 등에 구조됐다. 두 배는 충돌 이틀 뒤까지 계속 불탔다. 이 사고는 한국유조선 사고로는 가장 컸고 지금까지는 유일한 대형 사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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