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관심 세상史

세계의 목구멍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다-연재(1)/초대형 유조선을 타고 배와 바다를 공부하자.

淸山에 2015. 4. 18. 17:58

**







세계의 목구멍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다

연재(1)/초대형 유조선을 타고 배와 바다를 공부하자.

趙甲濟   


   
  호르무즈 해협, 기름을 마셔야 움직이는 이 지구촌의 목구멍이다. 목구멍은 평화時(시)에는 열량과 영양분을 공급하지만 비상시에는 틀어 막혀 질식사를 부를 수도 있다. 이 경우, 질식사는 현대 문명의 종말을 뜻한다. 세계에서 가장 전략상 가치가 높은 곳이 어디냐 할 때 호르무즈 해협을 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중해와 대서양 시대의 지브롤터 해협, 아프리카 인도양 아시아로 제국주의 진출 시대의 수에즈 운하, 석유문명 시대의 호르무즈 해협, 세계사의 변천에 따라 옮겨다닌 국제 정치의 무게 중심은 지금 동해 2호가 통과하려 하고 있는 이 해협에 꽂혀 있다. 기름을 쓰는 세계 어느 나라도 이 해협과 무관할 수는 없다. 1981년 현재 미국은 국내 소요량의 16퍼센트, 유럽공동체 국가들은 60퍼센트, 일본은 66퍼센트를, 이 해협을 지나는 유조선들을 통해 수입하고 있다. 한국의 호르무즈 의존도는 80퍼센트 이상으로서 세계에서도 이 해협의 안보와 가장 밀착된 운명을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다.
  
   몇 년 전부터는 북한도 이 해협을 통과하는 탱커로 이란 기름을 사들이고 있어 이곳과 이해 관계를 갖게 되었다. 언젠가 소련의 산유량이 줄어들어 동구 공산권과 더 나아가서는 소련까지도 석유 수입국으로 변한다면 그들도 이 해협의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강대국들이 펼치는 파워 게임의 방정식을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변수로 풀어 본다면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페르시아만의 관리인을 자처하던 이란의 팔레비가 몰락, 이곳에 힘의 진공상태가 빚어졌을 때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공군기지를 설치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아프가니스탄에서 40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소련은 그 전에 홍해를 양쪽에 낀 이디오피아와 남 예멘에 접근, 해군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미국 및 유럽 행 원유 수송선이 지나가는 수에즈 운하-홍해 부근의 동향을 모니터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우디 등은 'PG'연안 항구에의 과도한 의존도를 홍해 쪽으로 분산시키려고 송유관 및 항만시설 재배치를 꾀하고 있는데 소련은 벌써 전부터 그 홍해에 매복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맞서 미국은 지난 '80년부터 호르무즈 해협의 직접 관할국(다른 관할국은 이란)인 오만의 마시라 섬에 공군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이디오피아와 오가덴 사막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소말리아에서도 군사 기지를 만들고 있다. 아프리카의 케냐와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샤 섬에도 미군기지가 있다. 이들 미군기지는 중동에서 전쟁이 터졌을 땐 맨 먼저 현장에 파견될 미국의 기동타격대(RDF=Rapid Deployment Force)가 발판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 기동타격대의 임무는 호르무즈 해협의 장악, 그리고 중동유전 시설의 보호 또는 복구와 이에 따른 원유항로의 안전유지로 되어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사우디에 공중경보기 판매를 단행한 배경도 'PG' 및 호르무즈 해협의 감시와 통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호르무즈 해협이나 PG에서 비상사태가 터졌을 때 미국은 한 가지 중요한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 동해안에서 PG까지는 항공편으로 1만4000킬로미터,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海路(해로)로는 1만6000,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면 2만2000킬로미터다. 사막지대 중동의 전쟁은 初戰(초동)의 기동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네 차례의 중동전이 입증했다. 미국이 이렇게 먼 거리를 건너뛰어 강력한 전투부대를 초전의 결정적인 시기에 늦지 않게 중동에 보낼 수 있느냐, 陸路(육로)로 밀고 들어오는 소련군보다 빨리 닿을 수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결판이 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하고 있다.
  
   미국의 기동타격 부대 병력 23만 명의 空輸(공수)와 PG에서의 작전을 위해서는 PG안에서 미군기지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로 되고 있다. 중동 사막에서는 미군 한 명이 하루에 담수를 적어도 36리터는 써야 하는데 이 방대한 담수(1개 사단의 하루 소비량이 360톤, 기동타격대의 전체 소비량은 하루 약 7000톤)를 미국에서 갖고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중동의 메마른 사막에서 구할 수도 없다. 오직 한 가지 食水源(식수원)은 걸프 연안국의 담수화 공장. 이 물 문제 하나만 따져 보아도 PG에서 미군이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사 기지나 우호국가의 확보가 필수적인 과제임이 밝혀진다. 사막 지대에 전쟁의 불길이 번지면 그것은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페르시아만과 그 연안의 유전 지대는 길이 1200킬로미터 너비 600킬로미터의 직사각형 지대에 몰려 있다. 60개의 거대 유전(38개는 육상 유전), 2800개의 油井(유정), 20개소의 정유공장, 2만 킬로미터의 송유관, 24개소의 원유 적출 기지가 여기에 집결해 있다. 장애물이 없는 사막에서 이런 유전 시설을 단기간에 때려부수기는 쉽지만 이를 방어하여(미군 기동타격대의 임무) 세계의 원유공급 기능을 유지토록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몇년 전 미국 멕시코만의 어느 해저 석유 채굴 장치에서 불이 났다. 이를 끄기 위해 열여섯 개 회사와 두 정부 기관은 650명의 소방수, 두 척의 소방정, 일곱 척의 굴착선, 열한 척의 泥水(이수)운반선, 500톤 기중기를 가진 작업선을 투입해야 했다.
  
   지난 '79년 6월 멕시코령 캠피치만에서 매장량 10억 배럴짜리 익스톡 유전이 굴착 중 폭발했다. 해저 화산처럼 불바다를 이루며 가스와 기름을 내뿜는 이 유전의 진화작업에는 열 달, 그리고 1억3000만 달러가 들어갔다. 피해액은 약 6억 달러. 불덩어리를 안고 있는 유전 시설은 부수기는 쉽지만 그 불길을 잡고 시설을 복구하기란 무척 어렵다. 2차대전 때 기술진은 인도네시아 유전 시설을 몽땅 파괴하고 철수했는데 이를 점령한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이를 완전히 복구시킬 수 없었다. 호르무즈가 막히고 PG가 불길에 휩싸이는 날을 성경이 인류 최후의 전쟁-'아마겟돈'으로 암시한 까닭이 알 듯하다.
  
   출항 사흘째가 되는 날 상오, 동해 2호는 아랍 연방 에미레이트(UAE)를 오른쪽으로 60해리쯤 거리에 두고 해안선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해저 유전의 철 구조물과 불꽃이 구름 깔린 수평선 위에서 점점이 보이다가 뒷전으로 밀리며 사라져 갔다. 해협이 가까워지면서 오가는 유조선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었다. 'BERGESEN D.Y.TANKER' 'STAVENGER BERGE KING' 따위의 船名(선명)을 쌍안경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1해리 이내로 가깝게 스치기도 했다. 상오 10시께 '동해'는 시리 섬 남쪽 12해리 해상을, 하오 2시께에는 부 무사 섬 남쪽 12해리 해상, 하오4시께에는 툰브 섬 12해리 바깥을 지나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다가갔다.
  
   이 세 섬은 모두 이란령.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란 정부는 어떤 선박들도 이들 섬에서 12해리 안쪽으로 들어와선 안 된다고 경고, 종전의 항로가 약 30마일쯤 남쪽으로 붙게 되었다. 이 바람에 한국 유조선들은 왕복 80해리, 기름 값으로 환산하면 1000만 원어치의 거리를 더 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이들 탱커 선원들에게 끼친 영향은 보험료가 전쟁지역 적용을 받게 된 것, 또한 1000만 원이나 일곱 시간쯤의 손해뿐이 아니다. 동해호의 브리지에는 바레인 무선국이 보낸 항행 경보가 붙어 있었다. "북위 29도3분 이북으로 들어가는 배는 이라크 해군이 부설한 기뢰에 신경을 쓰도록 하라."



 
   이덕인 선장은 지난해 두 차례 동해 1호를 몰고 이란의 원유 적출항 카그 아일랜드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쌍용정유에 갖다줄 기름을 싣기 위해서, "으스스하더군요. 밤에는 항해등까지 완전히 끄도록 합디다. 이란 측의 對空(대공)포화가 이라크 전투기를 향해 터져 나가는 것이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휘황하였습니다. 공습으로 부서져 새까맣게 탄 항만시설과 유조선도 보았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선원들은 전쟁 위험 수당을 받게 됩니다."
   1981년 6월에는 파나마 선적의 3만 톤급 화물선이 PG 북단의 이란 령 호메이니 항 부근에서 이라크 공군의 공습을 받고 침몰했다.
  
   그 뒤로는 호메이니 항에 들어가려는 선박들은 PG 입구의 반다르 아바스 항에 일단 집결, 선단을 이룬 뒤 단체로 이 항구를 향해 항진해야 한다. 석유제품 운반선 영 케미케리 호 선장 고석두 씨에 따르면 '여섯 척의 선단이 줄을 서 조심조심 항해하는데 맨 앞과 뒤의 선박엔 무장해군이 네 명씩 타고 敵機(적기)의 내습에 대비, 상황판단에 임하고 밤에는 항해등까지 꺼야 하며 레이다나 통신기의 사용도 금지시키고 위치보고는 비상 주파수를 배정받아 반드시 암호로 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잊혀져 있는 이란-이라크 전쟁이지만 유조선 선원들은 그 전쟁을 늘 숨가쁘게 체험하고 있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어떤 비상 사태도 원유 수송 항로에 맨 먼저 예민한 진동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가 '슈퍼 탱커를 폭파시키겠다'고 위협하면 금방 PG의 보험료가 올라간다. 이란 인질사건 때는 유조선들이 오만 만 근방에서 자주 미군 함정들과 맞닥뜨리고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것들은 원유 항로가 단순한 무역로가 아닌 가장 정치적인 뱃길임을 증명하는 사례들이다. 오일 로드는 또 전쟁 당사국이나 기름 수입국 양쪽에 똑같은 생명선이 되고 있다. 어떤 비상 사태 아래서도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름의 길을 오가는 선원들은 전쟁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영향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전쟁 이후 외국 기자들에게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카그 아일랜드를 이들 선원들이 자주 출입하고, 최화섭 선장이 호람샤르 공방전에 휘말려 이 전쟁의 가장 생생한 목격자가 된 것이나, 동해2호에는 전쟁중인 두 적대국에 따로따로 가 본 경험이 있는 선원들이 있다는 사실들은 모두 PG항로가 국가 이익을 가장 멀리 확장된 최전방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해 2호가 이날 오후에 스치고 지나간 툰브 쌍둥이 섬은 지난 '71년 영국의 PG 철수 선언 직전 이란이 점령한 것이다. 이라크 등 적대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이 점령 조치로 팔레비 치하의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의 주요 섬들-호르무즈, 라라크, 케삼, 헨잠, 시리, 부 무사, 툰브-을 장악, 사실상 이 해협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팔레비는 해협 입구 반다르 아바스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고 해양 오염을 일으키는 배들에 대한 검문 및 수색권을 해안에서 50해리까지 확대함으로써 호르무즈 해협의 覇者(패자)가 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PG와 호르무즈 해협의 통제력이 영국에서 親美(친미) 정권 치하의 이란에 옮겨진 것이었으므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아랍 국가들(이란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문화권에 들지만 인종적으로는 아랍 국가가 아니다)의 반발을 무릅쓰고 미국이 이란의 군사력 증강을 밀어 준 속셈도 이란을 통한 호르무즈 해협의 현상 관리였을 것이다. 이런 팔레비 정권의 붕괴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힘의 진공 상태를 불렀다. 이 진공 상황으로 비집고 들어온 것이 호르무즈 해협의 건넌방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에 성공한 소련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란을 대신할 호르무즈 해협의 관리인을 따로 찾아내어야 할 입장에 몰리게 됐다. 자연히 그 선택은 최근까지도 영국의 사실상 보호국이었던 오만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만은 이란의 건너편에서 호르무즈 해협의 반쪽을 누르고 있을 뿐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의 끝에 자리잡고 있어 인도양의 北端(북단), 곧 미국과 유럽行(행) 오일 로드의 갈림길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 요충이기도 하다. 오만은 최근까지 중동의 가장 폐쇄적인 변방 국가로 알려져 왔으나 18∼9세기에는 강력한 해양국가였다. 무스카트 항에 중심을 둔 오만의 해양세력은 인도양을 主무대로 하여 함대를 서인도 제도, 아프리카로 원정 보냈으며 아프리카의 잔지발, 뭄바사와 이란 남부까지 통치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보호국이 된 이후 오만은 은둔의 나라가 돼버렸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오만은 중세의 암흑기를 방불케 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었다. 국왕 사이드 이븐 타이물은 스스로 직접 입국 비자를 심사, 외국인들의 왕래를 제한했다. 
   


   오만인들의 출국은 거의 전면 금지된 형편이었다. 내륙산간 지방 주민들의 해안 지방 방문도 엄금시켰다. 의약품, 라디오, 음악, 춤, 담배도 금지되었다. 심지어 안경도 못 쓰게, 책도 못 읽게 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카부스 왕자를 몇 년 동안 가택 연금시켜 '교육에 의한 오염'을 막았다. '68년에 이 나라에서 유전이 발견되고 '73년에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타이물 왕이 쫓겨나고 카부스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오만은 비로소 開明(개명)의 문을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두 배쯤 되는 국토에 광주시 정도의 인구(89만)를 갖고 있는 오만은 1인당 국민소득이 2570달러로 중동 기준으로는 매우 가난한 나라 축에 든다. 오만은 지리상으로도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다르다. 내륙 지방에서는 높이 3000미터의 산맥이 솟아있고 그 연변에는 농사, 기암절벽의 인도양쪽 해안에서는 고기잡이가 성하다.
  
   동해 2호가 세계의 목구멍으로 기어든 것은 이날 저녁,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2월의 밤 기온은 섭씨 30도를 약간 밑돌고 있었다. 李 선장은 해협 통과를 1등 항해사에 맡겨두고 배의 사령탑인 船橋(브리지)에는 올라오지도 않았다. 말래카 해협과는 달리 호르무즈 해협은 항해 기술상으로는 아무런 危害(위해) 요인을 안고 있지 않다. 초대형 유조선이 지날 수 있는 海路는 가장 좁은 곳도 너비가 50킬로미터나 된다. 수심도 70 미터쯤으로 넉넉하다. 몇 년 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슈퍼 탱커들을 격침. 이 해협을 봉쇄하려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 해협에 들어서고 보니 그런 우려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도에는 잘록한 목구멍처럼 그려져 있으나 동해 2호는 여전히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원의 중심을 가고 있었다. 저녁 7시께, 어둠이 깔린 후덥지근한 바다에 빗발이 가볍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켠 1시 방향으로 거무스름한 섬이 나타난 것은 이 무렵.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섬은 셋으로 분리되면서 그 자태를 드러냈다. 맨 끝에 있는 섬에서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탐조등처럼. 그때마다 세 개의 섬들은 형광을 발하듯 잠시 그 윤곽을 또렷이 보여주곤 다시 어슴프레한 어둠에 묻혔다. 맨 첫째 섬, 곧 그레이트 쿼인은 부산의 아치섬과 모양이나 크기가 거의 같은 반월형의 돌 섬이었다.
  
   두 번째 섬, 갭 아일랜드는 오륙도처럼 이등변 삼각형으로 뾰죽 솟아 있었다. 등대가 있는 마지막 섬, 리틀 쿼인은 세 형제 섬의 막내같이 금방이라도 바다 속으로 잠길 것처럼 나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 앞에는 섬보다 더 큰 슈퍼 탱커 한 척이 판자조각처럼 납작하게 하체를 잠근 채 가는지 멈추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련스럽게 떠 있었다. 항구의 불빛을 떠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둑한 海面(해면) 위를 쓸고 가는 등대의 불빛은 어떤 안도감과 함께 인간의 숨소리를 느끼게 해주는 듯했다. 그것은 뭍에서 '구경하는' 등대의 그런 하얀 건조물과는 판이한 느낌이었다.
  
   칠흑의 바다에서 선박과 인간의 존재, 그리고 온 길과 갈 길을 '확인시켜주는' 뚜렷한 징표로서 등대는 암초 위에 굳건히 박혀 있었다. 나는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어쩌고저쩌고 흥얼거리며 선교 옆 난간에 기대어 서서 배의 진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세 돌 섬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최1항사는 리틀 쿼인 등대를 기준하여 동해 2호의 정확한 위치를 내고 있었다. 인공위성과 자이로 콤파스가 수시로 이 배의 위치, 속도, 針路(침로)를 확인시켜 주고는 있었지만 물을 딛고 있는 등대처럼 확실한 위치계산의 근거는 없는 법이다. 이 리틀 쿼인 등대는 유조선 선원들에게 긴장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 주는 PG의 關門(관문)으로서 귀에 익은 이름이 되고 있다.
  
   역의 이름으로 철로를 기억하듯 선원들은 등대 이름으로 航路(항로)를 구분하고 '온 길'과 '갈 길'을 헤아리며 歸港(귀항)과 歸鄕(귀향)의 날짜를 셈한다. 울기 등대, 태종대 등대, 홍도 등대, 가란비 등대(대만), 호스버그(남지나해의 남단 입구), 라플(싱가포르), 원 패덤뱅크(말래카 해협), 다이아먼드 포인트(수마트라), 돈드라 헤드(세일론), 그리고 리틀 쿼인.
  
   "기름을 실으러 들어갈 때 리틀 쿼인을 지나면 바짝 정신이 차려지지요. 이제는 PG다. 기름을 실을 준비가 다 되었나,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긴장의 상징이 저 등대지요. 귀항길에 저놈을 지나가면 비로소 우리가 울산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실감을 갖게 됩니다."
  
   최1항사는 약간 들뜬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리틀 쿼인을 통과하면 유조선에서 본사로 위치 보고를 한다.
  
   울산귀항 날짜가 서울 본사에서 유조선으로 하달되는 것도 이 무렵. 이번에도 귀항날짜는 리틀 쿼인 통과 직전 서울에서 날아왔다. "2월21일 상오 8시까지 울산에 입항하라." 스무 날 뒤라는 귀항 날짜가 선원들에게 알려진 이 날 船內(선내) 분위기는 한결 설레고 있었다. 가족과 만날 확실한 날짜, 막연한 희망이 아닌 구체적인 기대감의 근거가 생긴 때문이다. 기관부원들은 갑판 부원들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싱가포르는 언제 통과냐?'고 묻고 있었다. 인도양의 최북단에서 6000해리 저편에 있는 울산항을 꿈꾸기에는 스스로 외람되다고 생각했는지 그 중간쯤 되는 싱가포르에다가 희망의 중간지점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덕인 선장은 항해장인 2항사에게 '속도별로 싱가포르 통과시간을 계산하되 낮에 통과할 수 있도록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선장은 벌써부터 말래카 통과에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리틀 쿼인 등 3형제 섬은 오만領(령)인데 호르무즈 해협에서도 전략상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다. 오일로드는 여기서 너비 7.5해리의 항로로 좁혀져 이 3형제 섬에서 북쪽으로 불과 4해리 떨어진 해협을 지나간다. 너비 7.7해리의 항로는 너비 2.5해리의 중앙 분리선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진다. 북쪽의 너비 2.5해리 항로는 PG로 들어가는 배가, 남쪽의 너비 2.5해리 항로는 PG를 빠져 나오는 배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배는 우측 통항이 원칙). 통항 분리는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해사기구(IMCO)가 설정한 것으로 통항량이 많은 도버 해협, 발틱해, 말래카 해협 등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배는 반드시 이 지정된 항로를 이용해야 하며 중앙 분리선을 넘어선 안 된다. 이 지정 항로는 완전히 오만의 영해 안에 들어 있다. 기름 소비 감소 사태 이전에는 하루 평균 78척의 유조선들이 이 항로를 지나 다녔다. 지금은 그 3분의 2 수준으로 통항량이 감소했다. 그래도 시간당 약 70만 배럴(한국 1일 소비량의 약 1.5배)의 原油(원유)가 이 항로를 통과, 세계 각국으로 강물처럼 흘러들고 있다. 한국에 기름을 실어 나르는 유조선들도 하루에 한 척 꼴로 이 기름의 벨트를 타고 있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이 낯선 변방 국가, 오만의 신세를 하루도 안 지고는 생존할 길이 없다고나 할까?
  
   이란을 대신하여 '호르무즈 해협의 호민관'을 자처하고 나선 오만은 최근 경비정을 풀어 통항 분리선을 어기는 배들을 적발, 벌금을 물게 하는 등 이 항로에 대한 영향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유조선 두 척이 걸렸다. 오만의 해군은 작은 함정 10척. 공군은 낡은 전투기 35대로 짜여져 있다. 군대의 간부는 거의가 영국 군인들이다. 비상시에 오만이 혼자서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은 이로써 분명해진다. 미국은 중동에서 가장 친서방적인 이 나라의 새로운 후견자가 됨으로써 호르무즈 해협의 통제를 꾀하고 있는 바 인도양에 면한 길이 80킬로미터의 오만령 마시라 섬에 군사 기지를 만들고 있는 것도 그런 계획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