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인들의 출국은 거의 전면 금지된 형편이었다. 내륙산간 지방 주민들의 해안 지방 방문도 엄금시켰다. 의약품, 라디오, 음악, 춤, 담배도 금지되었다. 심지어 안경도 못 쓰게, 책도 못 읽게 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카부스 왕자를 몇 년 동안 가택 연금시켜 '교육에 의한 오염'을 막았다. '68년에 이 나라에서 유전이 발견되고 '73년에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타이물 왕이 쫓겨나고 카부스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오만은 비로소 開明(개명)의 문을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두 배쯤 되는 국토에 광주시 정도의 인구(89만)를 갖고 있는 오만은 1인당 국민소득이 2570달러로 중동 기준으로는 매우 가난한 나라 축에 든다. 오만은 지리상으로도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다르다. 내륙 지방에서는 높이 3000미터의 산맥이 솟아있고 그 연변에는 농사, 기암절벽의 인도양쪽 해안에서는 고기잡이가 성하다. 동해 2호가 세계의 목구멍으로 기어든 것은 이날 저녁,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2월의 밤 기온은 섭씨 30도를 약간 밑돌고 있었다. 李 선장은 해협 통과를 1등 항해사에 맡겨두고 배의 사령탑인 船橋(브리지)에는 올라오지도 않았다. 말래카 해협과는 달리 호르무즈 해협은 항해 기술상으로는 아무런 危害(위해) 요인을 안고 있지 않다. 초대형 유조선이 지날 수 있는 海路는 가장 좁은 곳도 너비가 50킬로미터나 된다. 수심도 70 미터쯤으로 넉넉하다. 몇 년 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슈퍼 탱커들을 격침. 이 해협을 봉쇄하려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 해협에 들어서고 보니 그런 우려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도에는 잘록한 목구멍처럼 그려져 있으나 동해 2호는 여전히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원의 중심을 가고 있었다. 저녁 7시께, 어둠이 깔린 후덥지근한 바다에 빗발이 가볍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켠 1시 방향으로 거무스름한 섬이 나타난 것은 이 무렵.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섬은 셋으로 분리되면서 그 자태를 드러냈다. 맨 끝에 있는 섬에서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탐조등처럼. 그때마다 세 개의 섬들은 형광을 발하듯 잠시 그 윤곽을 또렷이 보여주곤 다시 어슴프레한 어둠에 묻혔다. 맨 첫째 섬, 곧 그레이트 쿼인은 부산의 아치섬과 모양이나 크기가 거의 같은 반월형의 돌 섬이었다. 두 번째 섬, 갭 아일랜드는 오륙도처럼 이등변 삼각형으로 뾰죽 솟아 있었다. 등대가 있는 마지막 섬, 리틀 쿼인은 세 형제 섬의 막내같이 금방이라도 바다 속으로 잠길 것처럼 나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 앞에는 섬보다 더 큰 슈퍼 탱커 한 척이 판자조각처럼 납작하게 하체를 잠근 채 가는지 멈추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련스럽게 떠 있었다. 항구의 불빛을 떠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둑한 海面(해면) 위를 쓸고 가는 등대의 불빛은 어떤 안도감과 함께 인간의 숨소리를 느끼게 해주는 듯했다. 그것은 뭍에서 '구경하는' 등대의 그런 하얀 건조물과는 판이한 느낌이었다. 칠흑의 바다에서 선박과 인간의 존재, 그리고 온 길과 갈 길을 '확인시켜주는' 뚜렷한 징표로서 등대는 암초 위에 굳건히 박혀 있었다. 나는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어쩌고저쩌고 흥얼거리며 선교 옆 난간에 기대어 서서 배의 진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세 돌 섬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최1항사는 리틀 쿼인 등대를 기준하여 동해 2호의 정확한 위치를 내고 있었다. 인공위성과 자이로 콤파스가 수시로 이 배의 위치, 속도, 針路(침로)를 확인시켜 주고는 있었지만 물을 딛고 있는 등대처럼 확실한 위치계산의 근거는 없는 법이다. 이 리틀 쿼인 등대는 유조선 선원들에게 긴장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 주는 PG의 關門(관문)으로서 귀에 익은 이름이 되고 있다. 역의 이름으로 철로를 기억하듯 선원들은 등대 이름으로 航路(항로)를 구분하고 '온 길'과 '갈 길'을 헤아리며 歸港(귀항)과 歸鄕(귀향)의 날짜를 셈한다. 울기 등대, 태종대 등대, 홍도 등대, 가란비 등대(대만), 호스버그(남지나해의 남단 입구), 라플(싱가포르), 원 패덤뱅크(말래카 해협), 다이아먼드 포인트(수마트라), 돈드라 헤드(세일론), 그리고 리틀 쿼인. "기름을 실으러 들어갈 때 리틀 쿼인을 지나면 바짝 정신이 차려지지요. 이제는 PG다. 기름을 실을 준비가 다 되었나,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긴장의 상징이 저 등대지요. 귀항길에 저놈을 지나가면 비로소 우리가 울산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실감을 갖게 됩니다." 최1항사는 약간 들뜬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리틀 쿼인을 통과하면 유조선에서 본사로 위치 보고를 한다. 울산귀항 날짜가 서울 본사에서 유조선으로 하달되는 것도 이 무렵. 이번에도 귀항날짜는 리틀 쿼인 통과 직전 서울에서 날아왔다. "2월21일 상오 8시까지 울산에 입항하라." 스무 날 뒤라는 귀항 날짜가 선원들에게 알려진 이 날 船內(선내) 분위기는 한결 설레고 있었다. 가족과 만날 확실한 날짜, 막연한 희망이 아닌 구체적인 기대감의 근거가 생긴 때문이다. 기관부원들은 갑판 부원들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싱가포르는 언제 통과냐?'고 묻고 있었다. 인도양의 최북단에서 6000해리 저편에 있는 울산항을 꿈꾸기에는 스스로 외람되다고 생각했는지 그 중간쯤 되는 싱가포르에다가 희망의 중간지점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덕인 선장은 항해장인 2항사에게 '속도별로 싱가포르 통과시간을 계산하되 낮에 통과할 수 있도록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선장은 벌써부터 말래카 통과에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리틀 쿼인 등 3형제 섬은 오만領(령)인데 호르무즈 해협에서도 전략상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다. 오일로드는 여기서 너비 7.5해리의 항로로 좁혀져 이 3형제 섬에서 북쪽으로 불과 4해리 떨어진 해협을 지나간다. 너비 7.7해리의 항로는 너비 2.5해리의 중앙 분리선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진다. 북쪽의 너비 2.5해리 항로는 PG로 들어가는 배가, 남쪽의 너비 2.5해리 항로는 PG를 빠져 나오는 배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배는 우측 통항이 원칙). 통항 분리는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해사기구(IMCO)가 설정한 것으로 통항량이 많은 도버 해협, 발틱해, 말래카 해협 등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배는 반드시 이 지정된 항로를 이용해야 하며 중앙 분리선을 넘어선 안 된다. 이 지정 항로는 완전히 오만의 영해 안에 들어 있다. 기름 소비 감소 사태 이전에는 하루 평균 78척의 유조선들이 이 항로를 지나 다녔다. 지금은 그 3분의 2 수준으로 통항량이 감소했다. 그래도 시간당 약 70만 배럴(한국 1일 소비량의 약 1.5배)의 原油(원유)가 이 항로를 통과, 세계 각국으로 강물처럼 흘러들고 있다. 한국에 기름을 실어 나르는 유조선들도 하루에 한 척 꼴로 이 기름의 벨트를 타고 있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이 낯선 변방 국가, 오만의 신세를 하루도 안 지고는 생존할 길이 없다고나 할까? 이란을 대신하여 '호르무즈 해협의 호민관'을 자처하고 나선 오만은 최근 경비정을 풀어 통항 분리선을 어기는 배들을 적발, 벌금을 물게 하는 등 이 항로에 대한 영향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유조선 두 척이 걸렸다. 오만의 해군은 작은 함정 10척. 공군은 낡은 전투기 35대로 짜여져 있다. 군대의 간부는 거의가 영국 군인들이다. 비상시에 오만이 혼자서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은 이로써 분명해진다. 미국은 중동에서 가장 친서방적인 이 나라의 새로운 후견자가 됨으로써 호르무즈 해협의 통제를 꾀하고 있는 바 인도양에 면한 길이 80킬로미터의 오만령 마시라 섬에 군사 기지를 만들고 있는 것도 그런 계획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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