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실을 나와 새벽 3시에 브리지에 올라갔다. 1시 방향으로 촛불 같은 게 보였다. 쿠웨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 사이의 중립지대(이곳의 산유량은 두 나라가 2등분함)에 있는 해저 유전 시설의 가스 태우는 불길이었다. 후트 유전의 불꽃을 우현 쪽으로 바라보며 지나치자 곧 카푸지 유전의 불길이 1시 방향에서 나타났다. 22년 전 일본인들이 단 한 방의 첫 구멍 시추에서 발견한 매장량 50억 배럴(한국의 25년 소모량)의 대유전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원유는 주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한국도 이 유전의 기름을 사 썼다. 동해2호가 새벽 4시30분에 스쳐 지나간 카푸지 유전에서 중립 지대는 끝났고 그 뒤 또 다른 불길이 동터 오는 수평선상에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우디의 사파니아 해저 유전, 매장량이 200억 배럴을 넘어 해저 유전으로는 세계 최대다. 한국 언론이 자꾸만 7광구와 비교하여 우리 사람들의 귀에도 익은 사파니아 유전 뒤편에는 세계에서 매장량이 열 여섯 번째인 마니파 유전(매장량 110억 배럴), 다시 그 북쪽 연안에는 세계14위 베리 유전(매장량 120억 배럴), 그 한참 뒤에는 아부 사파 해저 유전. 동해 2호는 새벽 6시께에는 줄루프 유전(세계 22위, 85억 배럴)을 오른켠에 놓고 불길의 바다를 통과, 이 날 하오 2시께 라스타누라 동쪽 60킬로미터 해상에 이르렀다. 여기를 지날 때 약 9킬로미터 서쪽에 회색 군함 한 척이 멈추어 있는 것이 쌍안경에 포착되었다. 이덕인 선장은 '미국 순양함일 것이다'고 했고 해군 중위 출신인 최 선장은 '1만 톤급이다'고 했다. 동해 2호는 며칠 전 쿠웨이트 입항 하루 전날 밤 이곳을 통과할 때 미국 군함을 만나 정중한 질문을 받았었다. 목적항구, 화물내용 따위를 VHF로 물어 보더란 것이다. 美 해군은 라스 타누라 근해에 군함을 상시 배치, 유조선들의 동향을 읽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세계의 아킬레스 근육', '지구의 심장', '국제 정치의 무게중심', '열강의 파워 플레이 센터'로 불리는 'PG' 가운데서도 라스타누라는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다. 아라비아灣(만)의 세계사적인 중요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다. 아라비아 만 연안 8개 국가-사우디, 쿠웨이트, 이란, 이라크, 아랍연방 에미레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에 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57퍼센트가 묻혀 있다. OPEC 가맹국 가운데 걸프<아랍국가와 이란의 호칭 대립으로 이곳 바다를 그냥 걸프(GULF:만)라고 부르는 경향이 요즘 생기고 있음> 연안 여섯 나라(바레인과 오만은 가맹국이 아님)의 산유량은 OPEC 전체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한다. 걸프 연안 국가의 기름은 공산권을 제외한 세계 각국의 소비량 가운데 40퍼센트를 공급하고 있으며 세계원유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기름의 거의 전부가 걸프 연안 항구를 통해 수출되고 있다. 가장 큰 적출항구는 세계 최대 석유 매장국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간판 라스타누라 주아이마의 시 아일랜드. 한국은 소비량의 60퍼센트쯤을 이곳에서 실어오고 있다. 세계의 탱커 선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여러 갈래의 '기름의 길'이 비롯되는 현대의 로마인 셈이다. 라스타누라의 시 아일랜드는 여덟 척의 VLCC가 동시 접안할 수 있는 규모이고 그 쌍둥이 주아이마의 그것은 30만 톤을 넘는 ULCC급 슈퍼탱커도 수용한다. 주아이마에서는 입항 때 도선사와 화물 적재 감독이 헬기로 탱커 갑판에 착륙, 출항 때까지 머물러 있다가 다시 헬기를 불러 퇴근한다. 육지와 시 아일랜드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1일 PG의 장래와 이곳을 둘러싼 국제 역학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변화가 조용하게 일어났다. 라스타누라에서 출발, 아라비아 사막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건너편 홍해 연안 도시 얀부에 이르는 1215킬로미터의 송유관이 개통된 것이었다. 16억 달러를 들여 만든 이 송유관 '페트로라인'은 세계 최대 가와르 유전의 원유를 하루 185만 배럴씩 흘려 보내고 있으며 몇 년 안으로 송유 능력은 두 배로 늘 것이다. 기름 수출량의 100퍼센트를 PG연안 항구를 통해 내보내었던 사우디는 이제 20퍼센트를 홍해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란의 해·공군에 의해 송유 및 유전 시설이 대파되어 'PG'를 통한 원유 수출이 어렵게 되어 있는 이라크는 사우디의 사막을 지나 홍해로 들어가는 송유관 건설 계획을 사우디 정부와 의논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일본 기업들은 사우디 및 오만 정부와 합작, 라스타누라로부터 PG 바깥 아라비아 해 연안에 있는 오만의 무스카트 항까지 1500킬로미터의 송유관을 새로 까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또 얀부 동쪽에 40억 달러를 들여 15억 배럴의 기름을 저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인공유전을 만들 계획이라고 최근 보도되었다. 이런 잇단 움직임은 페르샤만 연안 산유국들이 'PG'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의 기름 시설을 때려부수는 데 주력했던 이란-이라크 전쟁은 유전, 송유, 정유, 원유 수출항만시설이 공습이나 해상 봉쇄로 얼마나 손쉽게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 있는가를 입증했다. 그래서 'PG' 로만 통하던 기름의 길을 호르무즈 해협을 넘어선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갈라놓아 위험 부담을 분산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PG'는 만으로 불리지만 동해만큼 넓은 바다다. 길이가 약 900킬로미터, 최대 폭은 300킬로미터쯤. 깊이는 100미터 미만, 동해 2호는 반월도처럼 생긴 'PG'의 한복판을 세로로 가르며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12노트 속도로 순항하고 있었다. 쿠웨이트에서 보았던 초록색의 바닷물은 짙은 청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푸른 광활한 들판 위를 뉘엿뉘엿 기어가는 듯 동해 2호는 1분당 50만 톤의 바닷물을 양쪽으로 밀어붙이며 미련스럽게 나갔다. 가벼운 배들은 해면을 지치고 파도를 타지만 이 빙산 같은 巨體(거체)는 바다를 무지막지하게 찢어 발기며 헤쳐 나가는 꼴이었다. 높이 24미터의 船體(선체) 가운데 19미터를 물 속에 잠근 이 배는 사실상 半(반) 잠수선. 워낙 흔들림이 적어 날개처럼 船首(선수)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는 파문과 배 꼬리에서 뒤로 뻗은 물길이 없다면 동해2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수평선에는 'PG'로 들어오는 탱커와 빠져나가는 납작한 탱커가 끊임없이 엇갈리고 있었다. 일반 화물선은 슈퍼 탱커의 그림자에 가렸는지 자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선원들은 이 며칠간 휴게실의 텔레비전에 빠져 있었다. 항로에 따라 쿠웨이트, 사우디, 바레인, 아랍 연방 에미레이트의 텔레비전 화면이 차례로, 또는 몇 채널이 동시에 잡히고 있었다. 모두가 아랍어 방송인데 라스타누라 근방을 지날 때 잠시 아람코 석유 회사의 자체 영어 방송화면이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