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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8) 朴正熙의 경제 家庭교사 李秉喆

淸山에 2011. 4. 26. 17:29

 

 

 
 
朴正熙의 경제 家庭교사 李秉喆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8)/ 두 사람은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강병과 反共 태세
확립이란 大綱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거나 갖게 된다.
趙甲濟   

 
 

 

 
 
경제 家庭교사 李秉喆
 
 박정희는 혁명정부가 부정축재혐의로 구속했던 기업인들을 풀어주었고, 이들 13명은 한국경제인협회를 창립하여 경제인들의 對(대)정부 창구로 활동하면서 정부의 경제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 협회의 회장이 된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군사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전략에 우리가 돌파구를 마련해주고 실천해 보여 주자’고 결심했다고 한다(前 전경련 상근부회장 《金立三(김입삼) 회고록》).
 
 이때 기업인들은 쫓기는 기분이었다. 최고회의는 이들 기업인에게 부정축재에 따른 벌과금을 부과해놓고 있었다. 1961년 12월31일까지 이 벌과금을 내지 않으면 다시 구속하겠다고 했다. 이병철은 박정희 의장에게 호소하여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장을 건설하여 그 주식을 벌과금으로 代納(대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건의했다.
 
 “이렇게 해주시면 우리 기업인들은 시간의 여유를 갖게 되고 정부 측에서도 기업인들이 과연 국가에 해를 끼쳤는가 이바지를 했는가 다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難色(난색)을 보였다. 이병철도 지지 않고 “필요하다면 국민들을 납득시키는 것도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인들을 활용해야만 경제건설도 가능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湖巖自傳(호암자전)》).
 
 결국 박정희는 이병철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병철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도 ‘부정축재자 처벌로써 제일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은 처벌통고를 받은 기업인이 아니고 국가와 국민대중이다. 1958년과 1959년에 GNP(국민총생산) 성장률이 평균 6.1%였던 것이 1960년과 1961년엔 2.3%, 2.8%로 내려갔다. 다시는 소급법을 제정하여 경제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업인들은 기간산업을 맡아서 건설하되 그 재원으로서 외자를 도입하는 길도 스스로 뚫기로 했다. 이들이 건설할 기간산업으로 정한 것은 시멘트, 비료, 전기, 제철, 화학섬유, 정유산업이었다. 洋灰(양회)공장은 雙龍(쌍용)의 전신인 금성방직이 맡기로 했다. 비료공장은 삼성과 삼호 및 조선 견직이, 전기는 대한제분이, 제철은 대한양회·극동해운·대한산업·동양 시멘트에서, 화섬공장 건설은 화신과 조선견직 및 한국유리가 단독 또는 합작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병철과 극동해운의 남궁련 사장은 거의 매일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서 경제인협회에서 만든 기간산업건설계획안을 설명하고 이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여건조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제철 공장 하나만 해도 이를 건설하는 데 1억 3000만 달러나 든다지 않습니까. 정부보유弗[달러]을 전부 투입해도 모자라는데”하면서 난색을 보였다. 이병철은 그럴 때마다 외자도입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박 의장을 설득했다. 달리 대안이 없던 박 의장은 기업인들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철과 남궁련은 박 의장의 허락을 받고 1961년 9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산업회의에 참석하여 외자유치 가능성을 탐색했다. 9월13일 한국경제인협회는 5개년 계획에 소요되는 민간외자도입 추진계획서를 마련해 최고회의에 제출했다. 9월18일엔 박 의장과 경제인협회 회장단이 ‘당면 경제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이란 회의를 가지고 외자 조달 방안을 논의했다. 이런 회의를 거쳐 협회가 마련한 것이 외자도입 촉진책이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1. 개별기업의 교섭으로는 외자도입이 어려우므로 미국, 일본, 유럽 등 세 지역에 외자유치단을 파견한다(당시는 외국여행이 엄격한 허가사항이었다).
 
 2. 민간차관 도입 시 정부가 지불보증을 해줄 것.
 
 3. 민간경제외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해외공관에 상무관을 주재시켜 줄 것.
 
 4. 민간기업이 외국의 기술자와 기업가들을 자유롭게 초청하여 공장 건설 등을 협의할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
 
 5. 외자에 의한 공장건설 시 내자를 최대한 융자해주는 동시에 後取(후취) 담보제도를 마련해줄 것.
 
 6. 외자도입에 의한 기계반입 시 가동에 필요한 원자재 수입을 허용하고 그 판매 代錢(대전)으로 소요 내자를 충당하는 방안을 강구해줄 것.
 
 7. 외국의 장기금융기관을 유치토록 할 것.
 
 8. 외자도입촉진법, 외환관리법, 이중과세방지조약 등을 추진해줄 것. 
 

 
 

 

 
 
 박 의장은 외자도입을 하는 기업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순차적으로 법제화해 갔다.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수출입국 전략의 기초가 된 이 정부의 뒷받침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제도가 되었지만 동시에 政經(정경)유착을 胚胎(배태)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이병철 같은 기업인들은 혁명정부가 농업 우선의 균형성장 정책을 버리고 공업과 수출중심의 불균형성장정책을 택하도록 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병철은 박정희와 혁명정부 요인들에게 ‘후진성 탈피의 지름길은 공업화뿐이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경제개발은 더욱 늦어지고 빈곤과 혼란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병철은 1962년 초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런 요지의 주장을 했다.
 
 <우리는 영국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서 경제발전의 고전적 코스를 밟아 내려올 시간이 없다. 우리는 과감하게 그 순서를 바꾸어 공업화를 먼저하고 대기업에서부터 출발하여 중소기업으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농촌을 구제하는 것은 과감한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외자도입은 미국을 주력으로 하고 배상금 문제를 주안점으로 하는 일본,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순으로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重工政策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서 혁명정부 초기의 경제발전 전략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던 李秉喆 삼성물산 사장은 1963년 초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重農(중농)정책이 아닌 重工(중공)정책을 추진해야 할 이유를 예언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1인당 국민소득을 앞으로 178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필리핀, 터키와 비슷한 수준이고 정부의 계획보다는 많다. 앞으로 10년간 21억~23억 달러의 외자도입이 성공하면 3년만 지나도 이미 건설한 공장에서는 수익이 나오게 된다. 그 수익을 매년 2억 달러로 본다면 이 자금을 민간사업에 재투자할 경우 10년간 15억~20억 달러에 해당하는 공장건설자금을 새로 확보하는 셈이 된다. 총 40억 달러의 투자로써 400만 달러 규모의 공장 1000개를 지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투자총액의 약 70%에 해당하는 28억 달러의 연간 생산증가가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1인당 100달러의 국민소득 증가는 무난히 달성될 것이다.
 
 이들 공장이 평균 500명씩 고용한다면 고용증가는 50만 명, 부양가족을 계산하면 250만 명, 하청 중소기업과 유통단계에서의 고용을 계산하면 약 500만 명의 고용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숫자만큼 농촌인구를 공업에 흡수할 수 있게 된다. 즉, 1500만 농민의 3분의 1을 공업부문으로 흡수하면 1인당 경지면적 420평은 630평으로 늘어날 것이고 공업화에 따라 비료와 농기구를 싸게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장에 부과하는 세금도 늘어나 공무원의 봉급도 배로 늘릴 수 있어 부정부패도 일소할 수 있게 되고 사회도 명랑하고 건전하게 될 것이다. 전 국민이 빈곤을 추방하여야만 반공체제를 확립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178달러 선을 넘게 되는 것은 이병철의 희망보다도 3년이 빠른 1969년이었다.
 
 이병철과 박정희는 출신배경이나 성격, 그리고 취향이 대조적이었다. 이병철은 富農(부농) 출신에 성격은 깔끔하고 엘리트주의에 기울어 있었다. 두 사람은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강병과 反共(반공) 태세 확립이란 大綱(대강)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거나 갖게 된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엘리트와 이병철로 대표되는 기업인들이 서로 호흡이 맞았던 이유에 대해서 김주인 당시 한국경제인연합회 사무국장은 “군인들의 조바심과 기업인들의 명예심이 맞아떨어진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다.

 
 
 

 

 
 

 박정희 측은 국민들에게 보여줄 공장건설 등 可視的(가시적)인 실적을 원했고 기업인들은 ‘부정축재자’란 불명예를 벗어던지기 위해서 하루빨리 기간산업을 건설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박정희는 뒷날 외무장관이 되는 李東元(이동원·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비서실장)에게 이런 푸념을 했다고 한다.
 
 “이 실장, 아무래도 내가 쿠데타를 잘못한 것 같소. (정권을 잡고 나서야) 우리나라가 도둑맞은 초가집 꼴이란 것을 알았소. 광복 후 벌써 15년이나 흘렀소. 그간 뭐 제대로 해놓은 게 있소. 다들 썩어빠진 정치인 때문이오. 정권욕에 눈 멀고 입만 살아 벙긋하는 그 못난 놈들 때문이오. 내 무식하잖소. 그래서 유명하다는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에게 물어봤소. 어떻게 해야 우리도 잘 살 수 있냐고. 그들이 그럽디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란 것이오. 자원도, 기술도 없는…. 결국 경제발전의 조건을 못 갖추었다는 거였소. 이 실장, 정말 우리나라는 가망이 없는 것이오?”
 
 박정희의 이런 답답한 심경이 아래로 전해질 때는 더 증폭되었을 것이다. 李秉喆의 회고에 의하면 혁명정부는 기업인들이 약속한 공장을 빨리 짓지 않는다고 ‘별도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까지 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한 기업인이 볏짚 펄프 공장을 짓겠다고 했는데 진척이 잘 되지 않자 혁명정부에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이 기업인이 겁에 질려 한국경제인협회 이병철 회장을 다급하게 찾아왔다. 이 기업인은 ‘자금과 기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공장을 안 짓는다고 야단이다’고 호소했다. 李秉喆은 최고회의로 들어가서 차근차근하게 설명하여 납득을 시켜 이 기업인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金立三(김입삼) 전 전경련 부회장은 ‘기업인들이 외자도입을 통해서 공장을 건설키로 하면서도 세워질 공장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없었다’고 기억한다.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힌 기업인들 가운데는 物慾(물욕)보다는 후손들에게 그런 汚名(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더 절박한 기분으로 외자도입, 기간산업 공장 건설에 뛰어다녔다는 것이다. 김입삼은 “사람이란 묘한 것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리면 재물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모양이다”라고 했다.

 
 
 

 

 
 
  
 李庭林(이정림) 대한양회 사장은 延安(연안) 李 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6代祖(대조)는 士禍(사화)에 휘말려 고생을 했는데 유언이 “벼슬길은 단념하고 가게를 꾸미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정림은 개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당이 기업체마다 강제로 배당한 정치헌금을 냈다고 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상을 욕되게 했다’면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짓기도 했다.
 
 이병철은 기업인들이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을 리드하게 되었다는 자신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민간외자유치 교섭단을 결성했다. 1961년 11월 초순에 이병철을 단장으로 하는 美洲(미주) 교섭단과 이정림을 단장으로 하는 歐洲(구주)지역 교섭단이 출국했다.
 
 이병철은 미국의 기업인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20억 달러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13억 달러는 외자로 조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臨海(임해)지역에 특별공업지역을 설치해야 투자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비료공장 건설을 宿願(숙원)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이병철과 정유공장건설을 추진해왔던 극동해운의 남궁련은 이때 이미 울산을 공업지구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미국 기업인들은 이병철 일행을 인도하여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 공업지구를 구경하도록 했다.
 
 대한양회 사장 이정림이 이끄는 구미지역 교섭단은 서독에서 크루프, 지멘스 등 대기업을 상대로 차관교섭을 벌였다. 그 뒤 여섯 달 이내에 금성사, 한일시멘트, 쌍용 시멘트 등이 2500만 달러 규모의 서독차관을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본격적인 외자도입 시대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