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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70) 혁명가 朴正熙, 경제를 배우다

淸山에 2011. 4. 26. 17:35

 

 

 
 
혁명가 朴正熙, 경제를 배우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70)/ 박정희는 잘 살아보자는 뜻에서만
경제개발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전략으로써 공업화와
 새마을 운동을 추진한 측면이 강하다.
趙甲濟   

 
 
 

 

 
 
 정유공장 계획안
 
 일부 혁명주체 장교들은 對美(대미)자주노선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성향이 경제정책으로 나타날 땐 통화개혁에 의해 민족자본의 動員(동원) 시도, 또는 수입代替(대체)산업 건설의 형태를 보이곤 했다. 자립경제의 상징은 精油(정유) 공장이었다. 우리나라가 전략물질인 석유의 공급을 미국과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모에 대해서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군인들은 아주 예민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1954년에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군과 환─달러 환율문제로 분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환율을 현상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환율인상을 요구하던 미군은 한국 측에 대한 석유공급을 중단했다. 우리나라에 대한 석유공급은 민수용을 포함해서 전량을 미군이 맡고 있었다. 약 60일간 석유공급이 중단되어 경제가 마비되자 고집 센 이승만도 환율 인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등 일본 육사 출신 장교들은 1941년 여름 미국이 메이저 석유 회사에 對日(대일) 석유수출 금지령을 내린 것이 일제를 몰아붙여 태평양 전쟁으로 가게 한 요인이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한 데 대한 보복조치로 석유 금수령을 내린 것이다. 그때 일본은 석유수입의 대부분을 미국계 석유회사에 의존하고 있었다. 일본은 약 5000만 배럴의 석유를 비축하고 있었으나 약 80%는 해군용이었다. 일본은 비축용 석유가 바닥나기 전에 開戰(개전)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주된 進攻(진공) 목표도 유전지대인 인도네시아로 잡았던 것이다.
 
 이처럼 석유가 가진 고도의 전략적, 정치적 가치를 체험한 혁명주체들은 울산공업센터의 상징으로서 정유공장 건설을 부각시켰으며 국내자본에 의해 설립되는 國營(국영)으로 계획하였다. 민족주의적 발상이 물씬 풍기는 정유공장 건설 계획을 짠 것은 동국대 경제학 교수 兪仁浩(유인호·뒤에 중앙대 교수)였다. 30대의 유인호 교수는 5·16 직후 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산하의 중화학공업소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운영되는 기업들의 경영실태를 조사하는 일을 했다.

 
 
 
 

 

 
 

 “이 조사에서 한심한 꼴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느 비료공장에 갔더니 빗자루와 사다리까지 美製(미제)를 수입하여 쓰더군요. 그 까닭을 물었더니 원조계약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겁니다. 영등포의 해남硝子(초자) 공장에 갔더니 공장은 2년 동안 문을 닫고 있고 웬 미국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지 않겠어요. 그 노인은 기술고문이고 할머니는 노인의 아내 겸 비서라는 거예요. 월급은 얼마나 주느냐고 공장주에게 물었더니 노인에겐 월 1200달러, 할머니에겐 월 800달러가 나간다는 거예요. 이것도 원조계약에 따른 것이랍디다.
 
 부산 영도의 어느 조선소에도 갔습니다. 한 영감이 미국에서 들여온 17만 5000달러짜리 기계를 쌓아놓고 지키고만 있었습니다. 이유인 즉 4년 전에 들어온 기계인데 일부만 도입되고 後續(후속)공급이 되지 않아 그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일부 기계라도 돌려야 될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런 부분 운전은 금지되어 있다나요.”
 
 미국원조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 兪仁浩에게 1961년 8월 정유공장 설립의 기본안을 만들어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유인호는 정유공장만큼은 외자를 쓰지 않고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서 작업에 착수했다.
 
 유인호는 석유 공부를 많이 했다. 석유 전문가는 고사하고 석유에 대해서 상식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때였다. 그는 민주당 때 만든 정유공장 건설계획과 관계부처에서 제출한 자료들을 참고하여 기본계획안을 만들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경영형태: 국영.
 
 규모: 日産(일산) 3만 5,000배럴.
 
 자금: 정부 보유외화 1,600만 달러 및 한화 35억 환.
 
 원유도입(국가): 이란 또는 사우디아라비아.
 
 원유수입(회사): 독립계 석유회사.
 
 원유수송: 그리스 유조선(3만 톤급).
 
 국내판매: 코스코 조직 이용>
 
 이 案은 민족주의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메이저 석유회사를 원유공급선에서 배제한 것이라든지 국영으로 운영함으로써 가격결정에 있어서는 영리만을 내세우지 않도록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유인호는 “그때는 이상하게도 나 혼자에게 정유공장 건설계획안을 기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기름을 정치무기로 사용한 교훈을 되새기면서 소신껏 안을 짤 수 있었다”고 했다.
 
 1961년 10월 유인호는 정유공장안을 기획위원회 전체회의에 넘겨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민간 정유공장 설립을 은근히 꿈꾸던 실업인들과 가까운 기획위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국영에 반대했습니다. 저는 석유의 역사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 기름은 피와 같다고 역설하고 이 핏줄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경제자립이냐, 예속이냐의 문제가 결정된다고 열을 올렸습니다.”
 
 유인호의 정유공장 계획안은 최고회의의 승인을 받아 건설 예산이 1962년도 투·융자 예산에 반영되었다. 건설 기간은 3년. 첫해에 46억 환(외화 277만 달러 포함)을 투자하도록 했다. 유인호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면서 대학으로 돌아갔다.

 
 
 
 

 

 
 

 1962년 1월20일 유인호는 <조선일보> 1면에 3단으로 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경제기획원 당무자들과 실업인들이 정유공장 문제로 간담회를 가졌는데 민간인들이 외자를 도입하여 건설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는 내용이었다. 1월29일자 <조선일보>에 유인호 교수는 반론을 투고했다. 그는 석유는 ‘혈액적 존재’라고 표현한 다음 국영론을 옹호해 갔다.
 
 <…이렇게 중요한 정유공업이 우리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든가 또는 완전히 사기업의 자유재량 아래에 있다면 정부의 정책은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자본이 아닌 봉급생활자의 저축 같은 소액자본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려면 국영으로 발족 시 일정기간 뒤에 이들(소액봉급자)에게 불하해야 할 것이다>
 
 혁명가와 기업인
 
 1962년 초 박정희의 경제노선에는 자력갱생과 對外(대외)개방이란 엇갈린 방향성이 공존하고 있었다. 민족자본을 동원하기 위한 통화개혁의 비밀 추진, 민족자본에 의한 국영 정유공장 건설의 추진이 대표적인 자력갱생 노선의 표현이라면 외자도입 추진과 공업화 및 수출산업 육성은 개방정책의 표현이었다. 1962년에 큰 소동을 겪으면서 박정희는 자력갱생 노선을 버리고 대외개방적 공업화─수출입국 정책을 선택하게 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통화개혁은 실패하고 민족자본에 의한 정유공장 건설계획은 메이저(걸프)를 불러들이는 방향으로 수정된다. 이런 박정희의 궤도수정에 따라 유원식 최고위원과 박희범 서울대 교수로 대표되는 급진적 성향의 인물들이 퇴장한다. 반면에 이병철 같은 기업인들과 박충훈─김정렴 같은 실무관료들이 박정희 의장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체들의 實事求是(실사구시) 노선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된다. 5·16 이후 약 1년에 걸쳐 이루어진 박정희 의장의 시행착오와 방황은 이 혁명가가 경제를 배워간 과정이기도 했다.
 
 박정희만큼 경제와 먼 성격의 인물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는 군 생활 중 理財(이재)엔 관심이 없었다. 돈을 돌처럼 보았는지 될수록 멀리하려 했다. 장군으로 진급한 다음에도 돈에 대한 결벽증을 버리지 않아 아내 육영수는 생계를 겨우 꾸려갈 정도였다. 박정희는 그러나 돈엔 무관심했지만 국정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안목이 있었다.

 
 
 
 

 

 
 

 1951년 박정희 대령이 육군 정보학교장으로서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살고 있을 때 金龍泰(뒤에 공화당 원내총무 역임)는 공짜로 방 하나를 얻어 쓰고 있었다. 박 대령은 김용태와 함께 소금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면서 이런 울분을 토하더라고 한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동족상잔의 전쟁을 무모하게 끌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야. 전쟁을 막으려면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해. 특히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으려면 빈곤을 없애는 길밖에 없어. 빈곤퇴치, 이것이 우리의 당면과제야.”
 
 박정희는 잘 살아보자는 뜻에서만 경제개발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전략으로써 공업화와 새마을 운동을 추진한 측면이 강하다. 수천 년의 가난을 벗어던진다는 한풀이 의식과 함께 북한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경제건설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를 몰아세웠기 때문에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은 그토록 절박한 기분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혁명 이전에 경제서적은 거의 읽지 않고 주로 역사서적을 많이 읽었다. 인문─사회과학의 종합학문인 역사에 그가 밝았다는 것은 경제정책과 근대화전략을 판단하고 결단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정치와 경제에 접근할 때 역사적인 관점, 즉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 민족성, 그리고 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이런 관점은 사물을 주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게 해주기 때문에 명분론이나 이념에 사로잡혀 큰 오판을 하는 것을 막아준다.
 
 박정희의 유연한 정신세계와 겸손한 자세, 그리고 사심이 적은 태도가 그로 하여금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우게 했다. 실천력을 중시하는 박정희는 이론에 치우치는 학자나 신중한 관료들보다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기업인들과 더 잘 호흡이 맞게 된다.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지낸 적이 있는 김입삼은 1961년 6월 하순에 있었던 박 의장과 기업인들의 만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 연재 《김입삼 회고록》).
 
 <박정희 부의장은 유원식 최고위원을 통해서 金容完(김용완) 경성방직 사장(뒤에 전경련 회장), 全澤珤(전택보) 천우사 사장, 鄭寅旭(정인욱) 강원산업 사장을 최고회의로 불렀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견을 듣기 위해서 뵙자고 한 것입니다. 순서 없이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씀 해주시지요.”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전택보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1947년에 홍콩에 갔을 때 목격한 일입니다. 모택동 군에 쫓겨 홍수처럼 밀려온 피란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물까지 수입해서 마시는 홍콩에서 수백 만의 피란민들이 직장을 갖고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그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바로 ‘보세가공’을 해서 먹고살고 있더군요. 홍콩에 비교해서 우리 여건은 유리하다고 봅니다.” >
 
 전택보가 실감 있게 설명해가도 박정희는 확실한 감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보세가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미안하지만 내일 또 시간을 낼 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에도 경제 강의 같은 기업인들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김용완 사장은 “대학이 너무 많다. 4년제 대학의 반은 기술 전문대학으로 개편하여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 사장은 또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된 기업인들을 풀어주십시오. 기업인이란 개미처럼 죽을 때까지 일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일할 수 있는 기업인을 양성하는 데는 20~30년이 걸립니다”라고 했다.
 
 정인욱 사장은 “우리나라에선 지하 30m 이하의 심층에는 어떤 광물이 있는지 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를 탐사하여 실업자에게 일터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경제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런 충고를 너무나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여 기업인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느낄 정도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