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박정희 대령이 육군 정보학교장으로서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살고 있을 때 金龍泰(뒤에 공화당 원내총무 역임)는 공짜로 방 하나를 얻어 쓰고 있었다. 박 대령은 김용태와 함께 소금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면서 이런 울분을 토하더라고 한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동족상잔의 전쟁을 무모하게 끌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야. 전쟁을 막으려면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해. 특히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으려면 빈곤을 없애는 길밖에 없어. 빈곤퇴치, 이것이 우리의 당면과제야.” 박정희는 잘 살아보자는 뜻에서만 경제개발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전략으로써 공업화와 새마을 운동을 추진한 측면이 강하다. 수천 년의 가난을 벗어던진다는 한풀이 의식과 함께 북한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경제건설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를 몰아세웠기 때문에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은 그토록 절박한 기분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혁명 이전에 경제서적은 거의 읽지 않고 주로 역사서적을 많이 읽었다. 인문─사회과학의 종합학문인 역사에 그가 밝았다는 것은 경제정책과 근대화전략을 판단하고 결단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정치와 경제에 접근할 때 역사적인 관점, 즉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 민족성, 그리고 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이런 관점은 사물을 주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게 해주기 때문에 명분론이나 이념에 사로잡혀 큰 오판을 하는 것을 막아준다. 박정희의 유연한 정신세계와 겸손한 자세, 그리고 사심이 적은 태도가 그로 하여금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우게 했다. 실천력을 중시하는 박정희는 이론에 치우치는 학자나 신중한 관료들보다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기업인들과 더 잘 호흡이 맞게 된다.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지낸 적이 있는 김입삼은 1961년 6월 하순에 있었던 박 의장과 기업인들의 만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 연재 《김입삼 회고록》). <박정희 부의장은 유원식 최고위원을 통해서 金容完(김용완) 경성방직 사장(뒤에 전경련 회장), 全澤珤(전택보) 천우사 사장, 鄭寅旭(정인욱) 강원산업 사장을 최고회의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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