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사망한 아이젠버그는 독일 출생의 유태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일본에서 돈벌이에 성공한 巨商(거상)이었다.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한국에 지사를 두고 장사를 시작했다. 주로 수입품의 중계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 1959년에 도입된 서독 지멘스社의 전화교환기도 아이젠버그가 중계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 한국뿐 아니라 중남미, 동남아, 중동 등지에서도 많은 사업에 관여했다. 그는 주로 자금이 달리는 開途國(개도국)에 진출, 정부─기업─은행─건설회사 등을 서로 연결시켜주면서 자금도 마련해주고 사업도 성사시키는 ‘일괄 거래의 조정자’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이스라엘의 2중 국적소지자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체스카 여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아이젠버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은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성장정책을 밀고 나갈 때였다. 아이젠버그는 주로 서독 차관을 많이 끌어와서 우리나라의 기간산업 건설에 연결시켜주고 많은 커미션 등 이문을 남겼다. 그가 ‘일괄거래’ 방식으로 엮어준 사업 목록은 한국기간산업총람으로 보일 정도이다. 영월화력 2호기, 부산화력 3·4호기, 영남화력 1·2호기, 인천 화전, 월성 원전 3호기, 동해화력 1·2·3호기, 쌍용시멘트, 고려 시멘트, 동양시멘트, 한일시멘트, 일신제강, 유니온 셀로판, 피아트 자동차, 석탄공사의 채탄시설 현대화, 중앙선 전철화, 포항제철 증설 등등.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줄어들 때라 박정희 정권은 아이젠버그가 주선하는 차관이 이자율이 매우 높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젠버그가 처음으로 서독 차관 도입을 중계한 것은 1961년 가을이었다. 아이젠버그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 서독의 관료들과 기업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손을 써놓은 뒤 정 장관과 함께 차관도입 교섭차 1961년 11월13일 독일로 출발했다. 아이젠버그는 정래혁 장관을 안내하여 크루프, 지멘스, 하노버 조선소 등 서독의 유수한 회사들을 돌아보게 했다. 에르하르트 경제담당 부총리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 아래 차관과 교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서독 정부의 장기차관과 민간투자를 합쳐 3750만 달러 상당의 마르크화를 1962년에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혁명정부 최초의 공공차관 도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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