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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3) “혁명한 목적은 국민을 잘 살게 하려는 것”

淸山에 2011. 4. 14. 12:01

 

 

 
 
“혁명한 목적은 국민을 잘 살게 하려는 것”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3)/ 정부가 주도하되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살리는
정부주도 형태의 시장 경제체제를 만들다
趙甲濟   
 
 

 

 
 
29세의 청년박사 鄭韶永 발탁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朴正熙(박정희) 의장은 최고회의 간부들에게 訪美(방미) 결과를 들려 줄 때 비공식 수행요원으로 데려갔던 당시 29세의 鄭韶永(정소영·뒤에 경제수석, 농수산부 장관 역임)박사를 극구 칭찬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 전날 밤에 정 박사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를 두고 말을 많이 했지. 정 박사가 그때 중요한 점들을 지적해 주어서 이번 회담이 아주 잘 됐어.”
 
 수차례에 걸친 이런 칭찬은 정소영 박사를 경제개발 계획에 참여시킨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 柳原植(유원식) 준장을 포함한 많은 최고위원들에게 전해졌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장교단은 정권을 장악하자 바로 경제건설을 서둘렀다. 당시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李錫濟(이석제·감사원장 역임)의 회고─.
 
 “혁명 전 우리는 민주당 정부가 구상했다는 경제개발 계획 문건을 한 번 구해 보려고 무척 노력했지요. 국방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정부 관료들이 경제개발 청사진이 있다고 합디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추종을 하든지 비판을 하든지 하지요. 한 번만이라도 보면 기본적인 통계가 나와 있을 테니까 우리들도 어떻게 머리를 써 보겠는데 이게 잘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 주체들의 가장 큰 약점은 경제를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막상 혁명을 성공시키고 나니 초조했습니다.”
 
 5·16 거사가 성공했다고 판단이 선 사흘 뒤 박정희 소장은 유원식 당시 대령에게 사람을 찾는 일을 맡기면서 선정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는 젊고 참신한 인물, 둘째는 실력이 있고 경제개발을 공부했거나 계획 입안의 경험이 있는 인물, 셋째는 학계·금융계 등 광범위한 계층의 인물을 찾을 것.
 
 
 

 

 
 
  
 유원식은 개성이 강하고 고집은 셌지만 혁명정부의 과도기에 重責(중책)을 맡아 열심히 뛰었다. 유원식 대령이 고른 사람들은 宋正範(송정범·당시 37세·뒤에 경제기획원 부원장·도로공사 사장 역임), 白鏞粲(백용찬·당시 32세·뒤에 농협 이사·수협 이사 역임), 金聖範(김성범)과 정소영 등이었다.
 
 송정범은 자유당 시절 復興部(부흥부) 기획국장과 조정국장을 지낸 뒤 공직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중 혁명정부로부터 불려 나왔다. 송정범은 다른 세 사람과 달리 경제기획원을 창설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김성범은 산업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민간인으로서 5·16 모의에 자금을 댄 南相沃(남상옥·타워호텔 회장)의 추천을 받아 경제개발 계획의 작성에 참가하게 되었고, 2차 산업 분야를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백용찬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대학강사로서 1959년에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 보좌위원으로 참여한 경력을 가졌다. 그는 쿠데타 주체세력의 한 사람인 朴泰俊(박태준·前 자민련 총재) 대령의 추천을 받아 관여하게 되었으며 1차 산업을 담당했다. 정소영은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에 머물던 1959년 9월, 宋仁相(송인상) 재무장관이 稅制(세제)개혁을 위해 미국에서 초청한 조세 고문단의 일원으로 귀국하게 된다. 한창 작업을 하던 중 4·19 혁명이 일어나 조세 고문단이 해체되고 모두 돌아가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정소영을 金永善(김영선) 재무장관이 재무부 사세과장으로 일하도록 강권해 근무하던 중 5·16을 맞았다.
 
 혁명 직후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헌병들에 이끌려 최고회의로 불려 들어갔다. 경제기획원을 창설한 뒤 부원장을 역임하게 되는 송정범의 증언─.
 
 “1961년 5월18일로 기억됩니다. 후암동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헌병 두 명이 소환장을 들고 찾아 왔더군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별 잘못한 일이 없어 남방셔츠 하나만 걸치고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 간 데가 육군 본부였습니다. 언뜻 보니 어수선해서 도무지 일에 두서가 없어 보였습니다. 영관 장교 한 사람이 나를 찾더니 태평로에 있는 최고회의로 가라고 합디다.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 보아도 날 찾은 일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멋쩍게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정소영은 5월19일 무장헌병들에 의해 최고회의로 연행됐다. 정소영은 이날 유원식 대령과 만나 처음 인사를 나눈다.
 
 “곧 박 장군을 만나게 될 겁니다만, 여기서 제가 약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박 장군께서 제게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건설을 완전히 새로 해야겠는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해 주시오. 그 멤버는 자유당과 민주당 각료를 철저히 배제하고 소장파로 구성하란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정 박사와 몇 사람을 모셔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뒤 다시 최고회의로 불려나간 정소영은 백용찬과 김성범 두 사람을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박정희 부의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30세 전후의 이들이 절반쯤 겁먹은 채 들어서니 박정희 소장은 “정말 반갑습니다”라며 의자를 권한 뒤 담배를 한 개비씩 손수 돌리고는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 주었다.
 
 “우리가 혁명을 한 것은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5000년 묵은 가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본 마스터플랜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정도는 돼야 하는데, 여러분들이 서둘러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실천 가능한 계획을 작성해 주시오. 여러분들이 수고를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박정희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나는 이 박사를 존경합니다. 애국자시고, 훌륭한 분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면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민주주의를 하는 것은 좋은데 이 분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옮겨 토양도 다른 이곳에 심으려 했던 겁니다. 국민성과 사회 여건이 다른데 외래 정치사상을 그대로 이식하려 한 것이 마음에 안듭니다. 두 번째는, 경제건설에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가난에 찌들려 있어도 미국 원조나 받고, 두 발로 일어서려는 정책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박정희는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혁명은 우리가 일으켰지만 젊은 여러분들이 뒤를 받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혁명을 한 목적은 국민을 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경제를 일으키려면 우선 종합적인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계획을 여러분들이 짜주셔야 하겠습니다. 내가 유 대령에게 말해 놓을 테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유 대령이 적극적으로 해결해 줄 겁니다.”
 
 종합경제재건계획
 
 정소영, 김성범 백용찬 등 세 사람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청사가 태평로에서 퇴계로의 원호처 건물로 잠시 옮겼을 때였다. 뒤에 대통령 경제수석, 농림부 장관이 되는 정소영의 회고─.
 
 “우리는 최고회의 건물 안에 있던 큰 방 하나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문 앞에는 ‘대외비’,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란 글을 크게 써 붙여 두었고, 기관단총을 든 헌병이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실무 작업반들은 50여 명이 되었지만 총괄적인 작업은 이 방에서 우리 세 사람이 시작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작업하던 방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종합경제기획위원회’란 긴 이름이 붙여졌다. 정소영 박사는 곰곰이 ‘경제개발 계획’이란 단어부터 생각해 보았다. 세계 최초로 개발 정책을 5개년 단위로 수립·시행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생산수단을 정부가 완전히 소유한 경우여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발 계획을 세우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정소영과 김, 백 세 사람은 우선 과거 정부의 개발 정책 자료들을 참조하기 위해 각 부처의 자료들을 수집했다.
 
 정부에는 당시 두 종류의 경제개발 계획서가 있었다. 하나는 자유당版(판)으로 1959년 12월31일 부흥부(5·16 직후 건설부로 개칭)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안의 요약’과 ‘단기4292년도 가격기준에 의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으로, 발표된 지 반 년도 안 되어 4·19를 맞아 무산됐다.
 
 다른 하나는 민주당 시절인 1961년 5월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試案)’. 이것은 자유당판 경제개발 계획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새로 작성한 민주당版(판) 경제개발 계획서 시안이었다.
 
 
 

 

 
 
 
 吳緯泳(오위영) 무임소 국무위원은 이 시안을 바탕으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4일 전인 5월12일 오후 4시부터 장면 총리를 방문한 뒤 약 한 시간 반 동안 정부가 1962년부터 시행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협의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 1면을 통해 ‘민주당 내각─경제 5개년 계획 윤곽 판명/일본의 재산권배상이 아니면 미·영·독 등 차관 依據(의거)/우선 석탄 年産(연산) 2000만 톤 목표’란 제목으로 그 내용을 보도했다. 5월14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민주당 정부의 5개년 경제 계획론은 緣木求魚(연목구어)격’이란 제목으로 비판했다. 정소영의 회고─.
 
 “흔히 혁명정부가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모방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들 계획을 검토는 했지만 이용가치가 없어 새 계획을 짰던 겁니다.”
 
 이 밖에도 이들이 참고한 자료들로는 한국은행의 장기종합 경제개발 계획, 최고회의 기획위원회의 장기개발 계획 등이 있었다. 5월 중순부터 약 2주 동안 세 사람은 골방에 갇혀 기본전략판단을 내리는 데 골몰했다. 우선 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 불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재원을 산업분야별로 고루 분배하는 균형성장정책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데는 쉬 합의가 이루어졌다. 정소영은 이렇게 정리했다고 한다.
 
 “거지 옷 꿰매듯 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회전속도가 빠르고, 작게 투자해서 빨리 이윤을 낼 수 있도록 자본계수가 작은 분야를 먼저 공략해야 합니다. 교육에 투자하면 20년 뒤에나 효과를 봅니다. 농업에 투자하면 종자개량이다, 수리사업이다 해서 최소한 10년은 걸립니다. 공업에 투자하면 공장 짓고 생산하는 데 5년이면 충분합니다. 빨리 富(부)를 늘리려면 1차 산업과 3차 산업에는 좀 미안하지만 2차 산업에 우선 투입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차 산업에서 부를 늘려 1, 3차 산업에 투입하는 불균형 성장정책으로 결정합시다.”
 
 성장전략이 결정되자 성장률과 투자율을 산정했다. 기준연도인 1961년의 1인당 GNP는 83달러, 국내저축률은 3.9%, 투자율 13.1%, 수출 4087만 8000달러, 수입 3억 1600만 달러라는 참담한 경제규모였다. 민주당의 계획은 연 5%의 성장을 목표로 했으나 이들은 연 7.1%로 책정했다. 사회는 경제개발에의 기대가 팽배해 있었고 박정희 소장이 이들 세 사람에게 심어준 의지와 신념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용 가능한 자금 중 투자자금에 활용되는 비율인 ‘총가용자원에 대한 투자비율’은 21%, 총소득 중 저축을 뺀 ‘소비율’은 79%, 국내 저축률은 7.2% 등 목표수치를 구체화해 갔다. 이 계획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부의 역할을 한층 강조한 부분이었다.
 
 “생산수단을 정부가 장악하고 계획경제를 하던 공산주의와 달리 우리는 정부가 주도하되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살리는 정부주도 형태의 시장 경제체제를 만들어 본 겁니다. 일종의 혼합 경제체제였지요. 2차 산업의 자본형성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비약적으로 높이 책정했습니다. 종전의 비효율적인 투자의 원인을, 투자재원의 배분과 관리를 전적으로 민간인에게 의탁했다는 점과 가격기구의 매개기능을 자유방임 형태로 놓아 둔 것에서 찾았습니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 낼 수 없는 나라가 무조건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경제를 흉내내니 악순환만 계속됐던 겁니다.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이런 민간주도의 경제운영을 비판하면서 국가주도의 경제운영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작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갈 무렵 서울 商大(상대)에서 강의하던 朴喜範(박희범·뒤에 문교부 차관 역임) 교수도 참여했다. 7월 중순 확정된 안의 공식명칭은 ‘종합경제재건계획(안)’이었다. 네 사람은 7월20일경 최고회의 전체회의에서 보고회를 갖게 됐다. 박정희 의장을 위시해 각 부처 간부급 요원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정소영 박사가 차트를 넘겨 가며 보고·설명을 했다. 박희범 교수는 경제 용어를 설명했다.
 
 “…불균형성장정책을 통해 우리가 강구해야 할 전술적 목표는 다음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첫째, 2차 산업을 제일 먼저 육성하되 수출주도형으로 합니다. 방식은 模倣成長(모방성장) 정책을 통해 고도성장을 목표로 합니다.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을 빨리 모방해 가격을 낮게 책정함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조립방식으로 가는 겁니다. 라디오를 생산하더라도 수백 가지 기초자재를 우리가 다 만들면서 수출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우선 부품을 수입한 뒤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처음에는 부가가치가 작게 발생하더라도 고용효과가 크고, 수출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이윤이 축척되면 단계적으로 국산화 비율을 늘리고 그러면 언젠가는 순수 국산 라디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정소영 박사가 브리핑을 하면서 보니 박정희 의장은 열심히 받아 적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때 박 의장이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뒤돌아서면서 박수를 힘차게 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선도에 따라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완성된 ‘최고회의 종합경제재건계획’은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어 ‘5개년 종합경제기획안’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는 데 기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