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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1) 기자 受難 시대

淸山에 2011. 4. 12. 16:03

 

 

 
 
기자 受難 시대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1)/ 朴正熙는 생래적으로 기자를 싫어했다.
趙甲濟   

 
 

 

 
 
기자들의 受難
 
 박정희는 생래적으로 기자를 싫어했다. 2군 부사령관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대구 주둔 공병부대 대대장 張東雲(장동운) 중령이 모 신문사 기자가 기름 유출과 관련된 약점을 잡고 따지고 들자 구타하여 중상을 입혔다. 당시 2군 사령부 CID 대장은 방자명 중령. 기자들이 단체로 몰려가서 방 중령에게 항의했다. 방 중령은 이주일 참모장에게 찾아가서 사건을 보고했다. 이 참모장은 “기자를 때렸으니 큰일이 아니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지”라고 걱정했다. 방 중령은 박정희 부사령관에게도 보고를 올렸다. 박정희의 표정은 딴판이었다. 평소 과묵하던 그의 표정은 동감과 통쾌감까지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거 잘했어! 젊은 장교들은 그런 기백이 있어야 해. 요즈음 신문 기자놈들 정말 안하무인이거든.
잘했어, 정말 잘했어!”
 
 박정희는 “잘했어!”를 연발하면서 껄껄 웃어댔다. 박정희는 혁명 성공 직후 부산을 방문하여 在釜(재부) 장성급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여기서도 그는 사이비 기자들을 척결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부산일보 金鍾信(김종신)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雨後竹筍(우후죽순)격으로 쏟아져 나와 민정을 어지럽히는 사이비 언론 기관도 차제에 정리되어야 하겠습니다. 부산에서만 하더라도 기지창 철조망 근방에 얼씬거리며 군인들의 등을 쳐먹고 사는 치들이 많은데 그게 무슨 기자란 말이오. 당무자는 그러한 자들을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다가 김종신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박정희는 미안한 듯이 “김 기자는 제외야. 김 기자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 마!”라고 말하면서 눈웃음을 보냈다. 이런 박정희 치하에서
기자들이 당하기 시작했다.
 
 6월 초 윤보선 대통령의 ‘조기 민정 이양’을 희망하는 기자회견을 보도했다가 구속된 <동아일보> 정치부 이만섭, 이진희 기자에 대해서 윤 대통령은 부담을 갖고 있었다.
 
 7월 초 서울 외곽 지역을 도는 교외선 개통식과 시승식이 있는 날이었다. 金準河(김준하)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귀띔했다.
 
 “각하께서 오늘 박 의장을 만나시면 꼭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를 석방해 달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윤 대통령은 박 의장 및 관계관들과 같은 칸을 탔다. 그는 박정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만섭 기자 석방 건을 넌지시 꺼냈다. 그러자 박정희는 옆 칸에 타고 있던 김종필 정보부장을 불렀다.
 
 “김 부장, 동아일보 기자를 구속한 일이 있는가?”
 
 김 부장이 “예, 있습니다. 정치부 기자들이 지난번 청와대 기자회견 때…”라고 말을 흐리자 박 의장은 즉시 지시를 내렸다.
 
 “그랬던가? 윤 대통령의 부탁 말씀이니까 곧 석방하도록 해.”

 
 

 

 
 
 7월15일 아침 서빙고동에 있던 육군 형무소로 최고회의 원충연 공보실장이 지프를 몰고 나타났다. 이만섭, 이진희 기자를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면서 그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라고 위로했다. 이만섭 기자는 2년 뒤 대통령 선거 직전엔 공화당에 입당, 박정희 편에 서서 윤보선을 공격하는 입장이 된다.
 
 6월18일에 <민국일보> 정치부장 趙世衡(조세형·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역임)이 혁명 정부에 구속되었다. 혁명 공약 제6항 때문이었다. 6항은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슬며시 바뀐 것이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운운’이 빠지고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경주한다’는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민국일보>가 보도하자 최고회의에선 ‘그것은 민간인용’이라면서 조 부장을 구속했다. 조세형 부장이 중부경찰서 유치장 감방에 들어가 보니 金大中(김대중) 민주당 선전부장, 혁신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고려대 李建鎬(이건호) 교수 등 8, 9명이 붙들려 와서 방이 비좁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진 조세형은 뒤에 붙들려온 민주당 시절의 내무장관 申鉉燉(신현돈), 자유당 때 농림부 장관 鄭在卨(정재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신현돈은 조세형을 상대로 장면 정부를 무자비하게 난타한 언론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신 장관의 설명에 의하면 언론이 도를 지나쳐 모처럼 민주적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 정부까지도 자유당 독재 정권을 대하듯 사뭇 부정적이고 사사건건 반대론으로 매질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 언론 문제가 민주당 閣議(각의)에서까지 여러 번 이야기 대상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장면 총리가 맨 앞장을 서서 “정부가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억압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신 장관은 정치적인 후진 상태에서 민주주의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다며 앞으로 한국이 진짜 민주주의, 진짜 자유를 누릴 때 국민과 언론이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인지 한번 심각히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조세형은 언론계 대표는 아니었지만 별로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조세형은 1985년 12월호 <월간조선>에 기고한 회고담을 이렇게 끝맺었다.
 
 <자유당과 민주당과 신문기자가 모인 감방 안에서는 연일 시국 토론이 벌어졌다. 네가 잘 했느니, 내가 잘 했느니, 신문이 잘 했느니 하다가도 결국 결론은 모두가 잘못해서 군사 쿠데타를 만나 이 꼴이 되었다고 탄식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도 이승만 박사가 조금만 더 잘 해서 민주주의의 기틀만 잡아 주었어도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 하였고, 민주당이 조금만 더 줏대 있게 정치를 했어도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든가, 신문이 조금 책임 있게 모처럼 만난 민주주의의 기회를 잘 살려 주었어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자성론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다.
 
  7월20일이었으니깐 만 31일 만에 나는 풀려났다. 최고회의 공보실장 원충연 대령이 직접 차를 가지고 와서 나를 태우고 신문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담요를 싸들고 감방을 나서는 이 신문기자를, 서글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자유당 장관과 한 민주당 장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들은 나보다 몇 달씩 더 고생한 뒤 풀려났지만 그들이 속했던 자유당과 민주당의 민간 정치는 역사의 허공 속으로 흩날려 버린 것이다>

 
 

 

 
 
 미국이 본 군인통치
 
 워싱턴 시간으로 1961년 7월7일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柳陽洙 소장은 丁一權 주미 대사와 함께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을 예방했다. 이 자리엔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매카나기 극동담당 차관보가 동석했다. 주미 대사관에서 武官(무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유양수는 친선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는 길이었다. 유양수는 영어에 능통했지만 한국말로 하고 영어로 통역하도록 했다. 그러나 러스크 장관이 영어로 말하는 것은 통역하지 않도록 했다.
 
 유양수 장군은 ‘미국 측이 보여준 동정적인 이해심’에 감사한다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미국의 동정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혁명 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안보를 강화하고 부정부패를 몰아내며 혁명 공약이 완수되는 대로 양심적이고 깨끗한 민간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柳陽洙 장군은 또 ‘서울 사태 때문에 미국 측이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에 대해 미국 측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 간에 장막을 쳐버리지 않는 일이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러스크 장관은 그동안 혁명 정부에 대하여 품었던 불만들을 열거했다. 그는 이런 요지로 말했다.
 
 “우리 측 대표들은 한국 정부 실력자들과 충분한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협력과 동반자의 정신을 살려서 한국의 발전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버거 신임 대사를 우리 대통령과 국무부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지도자들은 그와 함께 장래 계획에 대해서 의논하기를 바랍니다. 한국 정부가 법과 정의의 원칙에 벗어나서 행동한다면 한국이 잘되기를 바라는 나라들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丁一權 대사는 이런 요지의 발언을 한다.
 
 “유양수 특명대사는 이번 방미길에서 미국 정부, 의회, 그리고 국민들이 (한국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귀국하면 이런 여론들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유양수 장군은 “내 위치가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지만 돌아가면 장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동지들에게 잘 설명하겠다”고 했다. 이 회담이 끝난 직후 러스크 장관은 주미 영국대사와 프랑스 대사를 불러 한국 사태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권력이 행사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당혹해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북한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은 신빙성이 없다. 우리는 주한 미국, 영국, 프랑스 대사가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주기를 바란다. 한국 군부가 미군 사령관 몰래 전국을 점령해 버릴 위험성도 상존한다.”

 
 
 

 

 
 
  
 
 7월 9일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는 부임한 이후 약 20일에 걸친 활동의 결과를 요약하여 워싱턴으로 보고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활이 걸린 권력 투쟁에 휘말려 있는 지금 그에게 어떤 충고를 해도 먹히지 않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다’고 분석하면서 ‘적합하지 않은 충고를 하면 그는 더욱 억압적인 조치를 취하든지 역쿠데타나 내란을 유발할 위험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버거 대사는 ‘박정희는 권력의 속성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며 순수한 애국심으로 행동하는 사람임은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버거 대사는 박정희 의장의 혁명 정부가 ‘장면 정부의 장관들과 측근들이 공산당과 연루되어 있다’고 발표한 것은 ‘박정희가 보복과 탄압을 얼마나 과격하게 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고 비판했다.
 
 <이는 혁명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도 쓸모가 없고 국내외적인 관점에서 모두 전술상의 착오이다. 박정희는 장면 정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서 그런 용공 조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할 목적이라면 부패나 무능 혐의로 그를 공격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아마도 박정희는 장면 세력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제거해 버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진심으로 공산당의 선전·선동과 중립주의가 장면 정부 시절에 학생, 노조, 지식인들 사이로 침투했다고 믿는 것 같다>
 
 7월 18일에 CIA가 중심이 되어 미국의 여러 정보기관들이 작성한 ‘한국의 현 정권에 대한 특별 정보 판단서’는 ‘한국 군사 정권의 성격과 의도’를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혁명이 성공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미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어느 방향으로 나라를 끌고 가려는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문을 던지고 답을 내고 있었다.
 
 이 판단서는 ‘지금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군인들은 완강하고 민족주의적이면서 야심찬 집단이다’고 했다. ‘그들은 성인으로서의 삶을 거의 모두 군대에서 보냈고 많은 전투 경험을 갖고 있다’면서 ‘그들이 일하는 방식은 지식인이나 직업 정치인들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조직의 중요성과 정치 통제 기술을 잘 알고 있는 행동가들이다. 그들은 정부와 군부의 기득권층이 무능하고 부패한 데 대해서, 그리고 문민정부 아래서 발전이 더딘 데 대해서 오랫동안 절망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권위주의적인 국가관을 갖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公衆(공중)의 기율과 확고하고도 중앙집권적인 정부 통제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한국의 새로운 지배층은 한국인들의 삶에 새로운 질서와 규율을 주입시키고 대대적인 경제 개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희망하고는 있지만 국내 문제는 독자적으로, 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끌어나가려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정권을 민간인들에게 이양할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당면한 문제의 복잡성과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수단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이 판단서는 또 혁명 정부 내의 권력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10명에서 12명으로 구성된 대령급들은 쿠데타를 기획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정책을
선호하고 있다. 박정희는 이들을 승진시켜 일선에 내보내는 식으로 거세해 버리고 싶어한다. 박정희와 이들
 영관급 사이에 충돌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혁명 세력은 초기에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나 최근에는 도시에서 불만이 점증하고 있다.
혁명 정부의 정책이 농촌과 농민들 중심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農心(농심)은 여전히 군사
정부에 대해서 호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