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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8) “1년 안에 무슨 혁명을 합니까”

淸山에 2011. 4. 6. 18:29

 

 

 
 
“1년 안에 무슨 혁명을 합니까”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8)/ 장도영이 정색하고 따졌다. “박 장군 자신이 언명한
행동 부대의 조속한 복귀와 조기 선거는 虛言이었단 말이오.”
趙甲濟   
 
 

 

 
 
 朴致玉의 울분
 
 육본헌병감 문재준 대령의 병력 차출 명령에 대하여 제3 CID대장 김영우 중령은 “언제든지 소집하면 30명은 대기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방자명 제15 CID대장은 “부산에 가서 밀수 수사를 하고 있는 병력 19명을 철수시키겠습니다”라고 하여 헌병감은 승낙했다.
 
 최고회의 옥상에서 문재준 대령으로부터 “김종필을 붙들어다가 혼내주자”는 이야기를 들은 박치옥 공수단장은 장도영 내각수반 비서실장인 이회영 대령을 찾아가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대령은 “문재준은 성격이 왈칵 하는 사람이니 말려야 한다. 나도 말려 보겠다”고 했다. 박치옥이 부대로 돌아와 있으니 이회영이 전화를 걸어왔다. “문재준에게 그 일을 중단하라고 통보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6월29일 박치옥은 부대로 출근하는 길에 문재준에게 들렀다. 문재준은 여전히 어제의 결심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박치옥은 부대로 출근한 뒤 부단장 김제민 중령을 불러 “어제 지시한 1개 중대의 병력 동원 준비 관계는 어떻게 되었나?” 하고 물었다. 김제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김종필 부장을 혼내 준다는 것이 개인 대 개인의 일이라면 몰라도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김병현, 김경식 대위한테 이야기는 해두었습니다.”
 
 김제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대위에게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날 오전 헌병대 제3 CID대장 김영우 중령과 제15 CID 대장 방자명 중령은 어제 있었던 문재준의 돌연한 지시가 걱정이 되어 “말리자”는 데 합의했다. 방자명이 문재준 방으로 들어가 나온 얼마 뒤 문재준은 김영우를 불러들였다.
 
 “어제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랬는데 김종필이 하고는 화해할 것이니 어제 한 말은 취소한다.”
 
 

 

 
 
 
 전날 저녁 부산에서 밀수사건을 수사 중 철수 명령을 받은 제15 CID대원 20여 명은 29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방자명 제15 CID대장은 파견대장 오 대위에게만 “우리가 김종필 중령 이하 정보부 간부들을 연행해야 할지 모른다”고 귀띔해 두었다. 방 중령은 자신의 병력을 교대로 대기시키고 두 명을 뽑아 헌병감을 경호하게 하였다.
 
 7월1일 문재준은 방자명 중령을 부르더니 “병력 대기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방자명은 ‘헌병감이 아직도 중앙정보부를 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박치옥 공수단장도 이즈음 김종필 부장에 대하여 유감을 품고 있었다. 그 단서가 된 것은 깡패 소탕 작전이었다. 공수단은 혁명 직후 깡패들을 붙잡아 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명단엔 李華龍(이화룡)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날 최고위원인 송찬호 준장이 육사 5기 동기생인 박치옥을 찾아와서 “이화룡은 내가 잘 아는데 3, 4년 전에 이미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은 영화 제작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치옥 단장은 송찬호의 주선으로 이화룡 밑에서 일하는 강 전무란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화룡은 체포할 필요가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이화룡에 대한 체포 지시를 해제했다. 며칠 뒤 강 전무가 남녀 배우 몇 명과 함께 위문품을 갖고 부대를 찾아왔다. 박치옥은 이들을 대접하려고 했는데 강 전무가 접대를 하겠다고 하여 부하 장교들을 데리고 나가서 옥루정이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박치옥은 여기서 이화룡을 만나 식사를 한참 하고 있는데 이화룡이 밖으로 나가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는 동석 중인 김제민 부단장을 불러서 알아보라고 했다. 김 중령이 보고하기를 공수부대원들이 이화룡을 감쪽같이 불러내 연행해 갔다는 것이었다. 박치옥은 부하들이 자신에게 반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공수단에서는 혁명에 가담한 장병들이 기고만장하여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상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박치옥은 이런 점을 지적하여 부하들을 혼내곤 했는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장난을 친 것이라고 이해했다. 박치옥은 이화룡을 석방하라고 지시했으나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화가 난 박치옥은 장교들을 불러놓고는 “이런 식으로 하면 부대를 지휘할 수 없다. 너희들 11명이 집단 지도 체제로 부대를 운영하라”고 말하고는 귀가했다.
 
 

 

 
 
 
 그후 장교들이 박치옥의 집으로 찾아가서 사과하여 일이 일단락되었다. 박치옥은 그 자리에서 “오늘은 내 위신도 있고 하니 이화룡을 돌려보내고 다시 조사하여 깡패로 인정된다면 수사 기관에 넘기고 그렇지 않으면 석방하라”고 시켰다. 얼마 후 이화룡은 석방되었다.
 
 그 며칠 뒤 송찬호 준장을 통해서 ‘박정희 장군이 이화룡 건을 들먹이면서 박치옥을 질책하더라’는 말이 들려 왔다. 박치옥은 이것은 김종필 부장이 자신에 대해서 나쁜 보고를 올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김제민 부단장에 따르면 당시 공수부대원 5명이 자원해서 정보부에 들어갔는데 이들이 이화룡 건에 대하여 박치옥에 관한 나쁜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라 한다.
 
 그즈음 박치옥은 아내로부터 밤에 누군가가 유리창을 플래시로 비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가 하면 자신의 전화가 도청당하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박치옥은 김종필 부장에게 항의하려고 전화를 세 번이나 걸었으나 이 상사라는 당번병은 “안 계신다”는 말만 하고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박치옥이 직접 김 부장을 찾아간 적도 있는데 역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런 일로 김종필 부장에게 유감이 많이 쌓여 있던 박치옥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문재준에 동조하는 식으로 사건에 휘말려든다. 7월1일 박치옥은 6관구 신임 참모장 羅熙弼(나희필) 대령에게 인사차 방문하여 장도영 내각수반의 비서실장 이회영 대령을 만났다. 박, 이 두 동기생은 돌아오는 길에 차중 밀담을 나누었다.
 
 이회영은 자신의 운전사를 박치옥 차에 태우고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차에 박치옥을 태웠다. 이회영은 “너희들은 괄괄한 성격을 이기지 못하여 큰일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회영은 장도영 의장이 주는 것이라면서 10만 환짜리 수표 다섯 장을 박치옥에게 주었다. 이 돈은 나중에 법정에서 장도영이 마치 박치옥의 김종필 제거 작전을 지원한 것처럼 꾸미는 데 증거로 이용되었다.
 
 김종필의 입장에서는 육사 5기생들인 문재준, 박치옥 대령이 장도영 내각수반 비서실장인 이회영 대령, 최고회의 의장(장도영) 비서실장 안용학 대령과 작당하여 장도영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김종필이 선제공격을 하게 된다.
 
 朴正熙─張都暎의 마지막 對坐
 
 6월28일 새뮤얼 D. 버거 신임 주한 미국 대사는 오후 2시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을 방문한 후 오후 4시엔 중앙청으로 장도영 내각수반을 찾아 환담했다. 이날 이 면담을 전하는 신문 기사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이란 호칭을 빼고 내각수반이라고만 썼다. 사실상 박정희를 1인자로 대우한 보도 태도였다.
 
 이 무렵 장도영은 ‘주체 세력 내의 갈등이 위험한 단계로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부의장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여 부관을 보내 중앙청의 총리실로 와 달라고 했다. 저녁 8시경 두 사람은 장도영의 집무실과 붙은 부속실에서 對坐(대좌)했다. 장도영이 먼저 입을 뗐다.
 
 “공수단 병력이 서울 시내에서 철수하고 중앙청 주변도 이제는 평온을 되찾아 좋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이제는 병력을 서울에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혁명세력 안에 틈이 생겨 알력이 점점 심해진다고 하는데 박 장군이 잘 장악해야 할 것이고, 박 장군을 중심으로 잘 단결해야 혁명 과업을 성취할 수 있을 거요.”
 
 “그 문제는 저도 많이 듣고 있는데 그 내용을 알고 보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이 과장해서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혁명 과업이 너무 광범위하고 과격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우리가 최초에 결정하기로는 이 비상 기간을 가급적 단축시키고, 그럼으로써 개혁 업무도 축소하여 명확한 성과를 거두자는 것이 아니었소?”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소위 혁명인데 손을 안 댈 수 없는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박 장군은 이 혁명 기간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지금 그런 것을 정해 놓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혁명 과업의 진척에 따라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군사 혁명을 애국적이고 명예롭게 성취하려면 기간도 짧아야 할 것이고 또 단시일 내에 할 수 있는 과업들을 잘 선택하여 명확한 성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해요.”
 
 “그럼 혁명 기간이 어느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으로는 6개월 정도가 어떨까 하나 만일 질서를 바로잡기에 너무 짧다면 1년 정도에 종결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현재 혁명 주체라는 사람들은 일선에 나가서 사단장이나 연대장을 잘 해주어야 할 사람들인데 그들이 이 나라의 최고 권좌에서 1년 이상이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면 나중에 비록 그들이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들의 식견으로 봐서도 장기간 집권하여 정치를 잘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이 대목에서 박정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고 한다(장도영 회고록).
 
 “1년 안에 무슨 혁명을 합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것은 이 나라를 바로잡고 청신한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상으로는 그렇게 빨리 개혁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장도영도 정색을 하고 따졌다고 한다.
 
 “그럼 여태껏 우리가 결정하고 추진해온 기본 방침인 조기 민정 복귀는 어떻게 되는 것이고, 박 장군 자신이 언명한 행동 부대의 조속한 복귀와 조기 선거는 虛言(허언)이었단 말이오.”
 
 박정희는 말문을 닫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장도영이 이 침묵을 깼다.
 
 “한 2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소?”
 
 “5년이고 10년이고 일을 시작했으니 끝을 내야지 도중에 중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참 있다가 장도영이 말했다.
 
 

 

 
 

 “나는 5·16 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비상 사태 수습에 전력을 다했고 6월6일로서 나의 임무도 사실상 끝났으니 나는 이제 뒤로 물러나겠소.”
 
 “이제부터는 행정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더 많이 해 주셔야 할 단계에서 자꾸만 물러나신다는 말씀을 하시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킬 수 없어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로써 끝났다. 장도영의 기억에 따르면 대화의 시작은 부드러웠는데 나중엔 의견이 상충된 가운데 냉랭하게 헤어졌다고 한다. 밤 10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작은 방에서 얼굴을 맞댄 채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이 군사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기본 방침, 그리고 과업 수행에 있어서 나와 박 장군의 상이점은 너무도 많았고 또 컸다>
 
 마지막이 된 박정희·장도영 두 사람의 대화가 있었던 날은 6월30일이었다. 7월2일 저녁 무렵 내각수반실이 있는 중앙청 주변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각수반 비서실장 이회영 대령은 김종필 부장을 붙들어 가서 혼내 주려던 헌병감 문재준과 공수단장 박치옥의 계획이 탄로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중앙청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계산을 해보았다.
 
 ‘나는 신분이 내각수반 비서실장이고 문, 박 대령을 말렸으니 붙들려 가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인데 李熙永(이희영)은 곤란할걸.’
 
 이회영과는 육사 5기 동기생인 전 육군방첩대 서울지구대장 이희영은 5월 15일 밤 박정희를 감시, 미행하도록 지시했던 인물이다. 이회영은 신문지를 찢어 ‘오늘밤은 집에서 자지 말게’라고 쓴 다음 그것을 또르르 말아 운전병을 시켜 이희영의 집으로 보냈다. 이 쪽지를 받은 이희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무슨 사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피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희영은 내각수반실로 나가보았다. 아직 장도영은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장도영, 이회영, 이희영 세 사람은 수반실에서 두 시간 가량 얘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