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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7) 金鍾泌 체포 계획

淸山에 2011. 4. 5. 14:11

 

 

 
 
金鍾泌 체포 계획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7)/ “김종필이가 모략하는 바람에 내가 오늘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억울한 책망을 들었다. 종필이가 권력을 남용하고 장난을 심하게 치는데 붙들어다가 혼을 내주어야겠어.”
趙甲濟   

 
 
 

 

 
 
국무부의 소동
 
 6월22일 정부는 白善鎭(백선진) 재무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金裕澤(김유택) 전 韓銀(한은) 총재, 박기석 건설부 장관 후임에 申泰煥(신태환) 서울대 교수를 임명했다. 혁명 성공 36일 만에 최초의 민간인 출신 장관이 탄생한 것이다. 정부는 또 22일자로 2군 사령관 최경록 중장과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朴炫洙(박현수) 소장을 예편시켰다고 발표했다. 두 사람은 대표적으로 발표된 경우이고 수십 명의 장성들이 反혁명, 부패, 무능 등의 혐의로 군복을 벗었다.
 
 바로 이날 미 국무부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대통령 직속 한국문제 긴급조치반의 책임자인 매카나기 차관보는 주한 미국 대사관과 주한 미군사령부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접수하곤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서울로부터 올라온 보고는 그린 대리대사가 최경록 장군과 나눈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에 비밀 분류에서 해제된 이날 회의 문서에 따르면 최경록 장군은 그린에게 ‘이번 쿠데타의 배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최 장군은 자신의 그런 확신이, 주체 세력 내 장교들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 주체 세력 안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얻은 정보, 그리고 주체 세력 장교들의 과거 기록을 조사한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즉, 1945~1949년 사이 공산당과 관련을 맺은 사람들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최경록은 박정희 장군이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을 대지 않고 네 명의 장성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했으며 3~4명의 대령들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매카나기 차관보는 서울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읽고는 단서를 달았다. 즉, 최 장군이 한때 그의 직속 부하였던 박정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미 CIA를 대표해서 이 회의에 참석한 피츠제럴드는 “쿠데타 멤버들의 신상 정보를 조사하고 정보원과 상담해본 결과 혁명 주체들은 장면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었지만 결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 걱정되는 것은 이들이 너무 순진하여
북한과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오판할까 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국무부 정보책임자 힐즈먼은 며칠 전 USIB(United States Intelligence Board) 사람들과 논의했는데 한국의 쿠데타 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나세르식의 방법, 즉 미국으로부터 벗어나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는 장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쪽으로
나갈 것 같지는 않다고 힐즈먼은 말했다.
 
 
 
 

 

 
 

 물론 북한이 정보수집 차원에서 주체 세력 안으로 간첩을 침투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인츠 해군 제독은 김종필 중령의 권력이 너무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김종필 중령이 1인 독재 체제의 무대 장치를 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매카나기는 최경록 장군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군사 정권이 취한 조치, 예컨대 깡패들을 붙들어 시가행진을 시킨 것과 같은 행동들을 보고 나서인 것 같다고 했다. 국제협력처(ICA)에서 나온 세퍼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관련 정보로는, 군사 정부의 경제 관료들과 회의를 해보니 사회주의적 경제관을 드러내 보였다는 정도이다”고 했다. 이 긴급회의는 “박정희의 쿠데타가 영리하기 짝이 없는 공산당 쿠데타는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2군 사령관이던 최경록 장군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로부터 다소 쌀쌀한 대우를 받았다. 박정희는 최경록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일 때 그 아래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있었다. 미군이 박정희를 전역시키라는 압력을 넣자 최경록은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 이때 2군 사령관이던 장도영이 나서서 박정희를 2군 부사령관으로 받아 주었다. 장도영이 그 뒤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자 최경록은 2군 사령관으로 전보되어 대구로 내려가 박정희와 또 만났다. 5·16 거사 당일 최경록은 미군을 지지하고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곡절을 거치면서
박정희는 최 장군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쿠데타가 성공한 며칠 뒤 박정희는 최경록을 최고회의 부의장실로 호출했다. 이석제 중령과 오치성 대령도 합석시켰다. 박정희는 “최 장군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나누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석제는 박정희가 왜 이런 자리에 자신을 불렀을까 하고 의아해하다가 곧 감을 잡았다. 최 장군을 군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악역을 맡으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석제는 최 장군을 향해서 입을 뗐다고 한다.
 
 “각하, 그동안 국방을 위해서 애 많이 쓰셨습니다. 이제 군사혁명도 성공했으니 후진을 위해서 길을 열어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최경록 장군이 “물러나겠다”는 확답을 하지 않고 설명을 좀 길게 하자 박정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을 잘랐다고 한다.
 
 “최 장군, 그래 언제 그만두시겠다는 말입니까.”
 
 박정희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고 예편당한 최경록 장군이 그린 대리대사를 만나 공산당 관련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당시 6만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끊임없이 떠도는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첩보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공개된 비밀 자료를 훑어보면 미국 정부에서는 그런 첩보를 매우 이성적으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한때 공산주의자였으나 확실히 전향했다’는 초기의 판단을 유지해 갔지만 정보 수집은 왕성하게 했다.
 
 이석제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 측 정보기관은 주체 세력 영관급 장교들에 대한 신상 정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미국 CIA는 평소 협조가 잘 되고 있던 영국 첩보기관에 부탁했다. 영국 첩보기관은 중공의 정보기관에 부탁했고, 중공은 평양에 있는 정보망을 동원하여 북한이 갖고 있는 남한 장교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 주었다고 한다. 혁명 정부의 각종 법률 제정 작업에 핵심적으로 관여하고 있던 이석제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CIA 요원으로부터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6월 초엔 미 버클리 대학의 스칼라피노 교수가 방한하여 이석제를 만났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그 1년 전 콜론협회에서 발표한 ‘콜론 보고서’를 통해서 ‘한국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만한 세력이 없다’고 예측하여 많은 청년 장교들을 흥분시켰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이석제와 만난 자리에서 다섯 시간 동안 신문하듯이 혁명 정부의 정책과 이념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이석제는 미국 측이 혁명 정부의 사상 문제에 대해서 깊은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학자까지 동원하여 탐색하러 나선 것으로 이해했다. 스칼리피노는 면담을 끝내면서 “지도층의 단결, 청렴성, 그리고 국가 근대화를
위한 획기적 프로그램이 성공의 조건이다”고 충고했다. 
 

 
 
 

 

 
 
 文在駿의 울분
 
 역사에 남을 만한 큰 사건도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인간관계와 감정 문제에서 최초의 단서가 열린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7월 초 혁명 주체 내의 숙청 사건도 그런 경우이다. 혁명 당일 6군단 포병단 병력 1500명을 이끌고 맨 처음 서울로 들어와서 육본을 점령했던 문재준 대령은 격정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5월21일 육군 헌병감으로 임명되자 문제가 많은 장교 45명을 강제 예편시켰다. 며칠 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교로 복직하여 정보부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알아보니 김종필 부장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어왔다. 문재준은 “이건 나를 모욕하는 처사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문재준의 두 번째 불만은 김종오 신임 육군참모총장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다.
 문재준이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김종오는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제3 CID 대장 김영우 중령과 제15 CID 대장 방자명 중령은 너무 까불고 정치적으로 노는 인물이니
교체하시오.”
 
 “저는 헌병은 처음이고 아직 실정을 잘 모르니 시간을 좀 주십시오.”
 
 문재준은 그 길로 인사참모부장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지금 CID 대장들이 전국의 밀수 사범 수사를 지휘하고 있으니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문재준은 그 뒤로는 김종오 총장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납득한 것으로 생각했다. 6월22일인지, 23일인지 김종오 총장이 문재준을 다시 부르더니 “인사참모를 만나면 알 것이다”고만 하는 것이었다. 인사참모는 문 헌병감에게
“총장님 지시사항인데, 헌병차감 金時珍(김시진) 대령, 김영우·방자명 중령,
그리고 황모 중령을 예편시켜라”고 했다. 문재준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헌병 인사는 헌병감에게 맡겨야 합니다. 더구나 김시진 대령은 박정희 부의장이 직접 부탁한 사람인데 이럴 수 있나요.”

 
 
 
 

 

 
 

 인사참모는 “내가 총장에게 다시 말씀드려 볼 테니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달랬다. 며칠 후 박정희는 문재준을 부르더니 “총장을 잘 모시고 일하라”고 타일렀다. 문재준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육사 5기 동기생인 공수단장 박치옥,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安用鶴(안용학), 내각수반 비서실장 李晦榮(이회영) 대령이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문재준은 이런 말을 했다.
 
 “김종오 총장이 나를 믿지 않고 내 수족을 자르려 하니 그러면 나도 손을 써야겠어. 김종오 장군은 원래 예편 대상자인데 살아난 것 아닌가. 나는 예편 심사위원인데 장군 심사가 있을 때 그를 예편 대상자로 넣어야겠어.”
 
 문재준은 헌병감으로 부임한 후 장군들의 非行(비행) 조사를 한 일이 있었다. 제3 CID 대장 김영우 중령이
과거 자유당, 민주당 시절에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 명단엔 金鐘五 총장도 포함되었다.
 
 문재준은 혁명 정부가 부정부패, 무능 등의 이유로 일반 공무원들을 무더기로 내보내고 있는데 군도 自淨(자정)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모범으로서 먼저 헌병대의 숙정 작업을 통해 45명을 퇴직시켰다는 것이다. 6월27일 최고회의 장성 예편 심사위원회가 열렸다. 문재준은 김종오 총장의 비행을 열거하고 그를
예편 대상자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사위원회의 부위원장인 이주일 소장은 난색을 보였다.
 
 “박정희 장군이 추천하여 총장이 된 분을 한 달도 안 돼 내보낼 수 있나.”
 
 그래도 문재준은 완강하게 예편을 주장하면서 심사위원들을 대상으로 표결에 부치자고 버티었다. 표결 결과 金鐘五 총장은 예편 대상자로 결정되었다. 다음날 박정희 부의장의 결재를 받으러 가는데 입장이 난처해진 李周一은 문재준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박정희는 김종오 총장의 예편 건의에 반대했다. 이 자리에서도 문재준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는 문 헌병감을 설득하다 말고 화를 냈다.
 
 “자네는 성미가 과격해서 큰일이야. 재심해 주어야겠어. 혁명은 너 혼자서 다 한 거야?”
 
 문재준이 물러서지 않자 박정희는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문재준은 울분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金鐘五 장군을 총장으로 민 사람은 김종필 정보부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朴 부의장이 그 김종필의 말만 믿고 저런다고 확신했다. 격정적인 그는 존경하는 박정희가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이 답답하여 사무실로 돌아와선
엉엉 울었다. 이때 김영우, 방자명 중령이 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문재준은 “김종필이 모략을 써서 박 장군이 나를 믿지 않게끔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방자명 중령은 “그건 김종필보다는 그 아래에 있는 權寧秀(권영수) 중령이 장난을 친 것이다”고 했다. 문재준은 이런 기분 속에서 동기생 박치옥 대령을 전화로 불렀다.
 
 “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12시에 최고회의로 와.”
 
 문재준, 박치옥 두 사람은 최고회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두 사람은 엄청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먼저 문재준이 대충 이런 취지의 말을 꺼냈다.
 
 “김종필이가 모략하는 바람에 내가 오늘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억울한 책망을 들었다. 종필이가 권력을 남용하고 장난을 심하게 치는데 붙들어다가 혼을 내주어야겠어.”
 
 박치옥도 일단 문재준의 反(반)김종필 발언에 동조했다. 그도 김종필 부장에 대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옥상에서 대충 이런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7월3일 새벽 2시에 헌병대 병력으로 잠든 김종필을 체포한다. 그를 헌병감실로 연행한다. 이 연락을 받으면 박치옥은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중앙정보부 건물을 포위한다. 그런 뒤에 출근하는 박정희 장군에게
사태를 보고한다>
 
 문재준은 또 박정희에게 후임 정보부장으로 김윤근 해병 준장을 추천하고 정보부의 수사권을 박탈하자는 건의를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공수단 김제민 중령이 올라와 대화에 합류했다고 한다(문재준의 군 검찰 앞 진술). 문재준은 박치옥과 헤어진 뒤 헌병감실로 돌아와 김영우,
방자명 중령을 불렀다.
 
 “제15 CID에서 20명, 제3 CID에서 30명을 차출하라. 김종필을 혼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