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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4) 革命정부, 연일 개혁·숙정·개조작업

淸山에 2011. 3. 31. 16:40

 

 

 
 
革命정부, 연일 개혁·숙정·개조작업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4)/ 이병철, ‘사회 변혁이 있더라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赤化의 우려는 없을 것…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도리어 정국이 안정될지 모른다’
趙甲濟   
 

 

 
 
법령 정비 작업과 전기 3社 통합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제100조는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미군정 법령뿐 아니라 일제 법령과 舊韓末 법령까지도 依用(의용)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9월15일 법전 편찬위원회 직제를 공포하여 민사, 형사, 商事(상사)에 관한 기본법의 제정에 착수하였다. 1953년의 형법을 시작으로 형사소송법, 민법, 민사소송법, 상법의 순서로 기본법 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1951년 5월12일 대통령령 제499호로 법령정리 간행위원회를 설치하고 정부 수립 이전에 제정된 각종 舊(구)법령을 번역, 폐지, 개정, 제정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들 업무는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진행이 지지부진하여 1961년 5월16일 군인들이 집권할 때는 “이 나라가 아직도 영어와 일어로 쓰인 법령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다”는 분노를 자아낼 정도였다. 이석제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은 이 법령 정비도
군사작전식으로 밀어붙였다.
 
 혁명 정부는 1961년 7월15일 법률 제659호로 舊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1962년 1월20일까지 정리되지 않은 舊법령은 모두 실효시킨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기존의 법령정리위원회를 개편하여 내각수반 소속으로 두고 내각 사무처장을 위원장으로 했다. 정부는 6개월의 시한을 정해 두고 각 부처에서 만들어 올린 법령안을, 국회 기능을 대신하고 있던 최고회의에 올려 신속하게 통과시켰다. 5·16 전까지의 13년간 정리된 법률이 115건이었는데 혁명 정부가 6개월간 정비한 법률은 352건이나 되었다.
‘법제처 50년사’는 이 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구법령 정리 사업이 1962년 1월20일에 완료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독립된 법치 국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모든 법령이 헌법을
기본으로 하여 그 하위 법령으로서 법률, 대통령령 및 총리령,
部令(부령)이라는 법체계가 확립되었다>
 
 혁명 정부가 실시한 개혁 가운데 요사이 말로 하면 구조 조정에 해당하는 것이 전기 3社(사) 통합과 韓電(한전)의 탄생이다. 혁명 정부의 상공부 장관은 丁來赫(정래혁) 소장. 육본 군수참모차장을 거쳐 국방대학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던 중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일본 육사에서 박정희보다 한 기 후배로 공부한 그는 軍內(군내)에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이름나
있었다. 정 장관이 맡은 상공부는 공업입국을 표방하게 되는
혁명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부서였다.
 
 당시 많은 군인들은 공업화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정 장관은 국장 회의를 소집해 보고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국방대학원에 다닐 때 강사로 나왔던 咸仁英(함인영) 국장이 공업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씨는 일반적인 비관론과는 다른 아주 낙관적인 강연을 하여
정 장관은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나라를 공업화의 불모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물론, 일본과 대만에는 뒤지지만 공업화를 할 수 있는 싹이 있습니다. 원조자금으로 지은 한국유리, 동양시멘트, 충주 비료공장도 있습니다. 이런 시설들을 운영한 경험을 잘 살려서 우리도 한번 해볼 수 있습니다.” 
 

 
 

 

 
 
 丁來赫 장관은 간부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많은 계획을 세워서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둔 줄 압니다. 지금부터 그것들을 다 꺼내 햇빛을 보도록 합시다. 내가 밀어드리겠습니다.”
 
 당시 상공부의 4대 현안은 전기 3사 통합 문제, 중소기업 금고 설치안, 석탄 증산, 그리고 공기업의 활성화였다. 혁명 정부는 대부분의 공기업 사장들을 장교들로 교체한 뒤 구조 조정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電力의 생산, 공급을 맡은 전기회사는 조선전기, 경성전기, 남선전기로 분리되어 인력과 시설의 중복과 낭비적 운영이 심했다. 정부도 이런 폐단을 일찍 인정하고 1951년 5월23일의 국무회의에서 3사 통합을 의결했지만
민간 주주들과 노조의 반대로 그 뒤 10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전 설비 용량에 대한 발전율은 광복 전엔 55% 이상이었으나 광복 후엔 한때 11.7%까지 떨어졌다. 송배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전력 손실률은 41.7%나 되어 선진국의 세 배였다. 1959년 말 현재 전기 3사의 누적 적자는 49억 환이나 되었다. 민주당 정권도 비능률의 화신처럼 된 전기 3사의 통합을 다시 추진하다가 군사혁명을 만났다. 정래혁 장관에 의한
통합작업도 군사작전처럼 진행되었다. 
 

 
 

 

 
 

  먼저 전기 3사의 사장들을 군인들로 교체했다. 조선전기 사장엔 황인성, 경성전기 사장엔 조인복, 남선전기 사장엔 김덕준을 임명했다. 이들은 6월8일까지 노조를 해산하고 종업원 1654명을 감축했으며 민간 주주들의 반발을 침묵시켰다. 6월21일까지 열 번의 회의를 통해서 통합에 따른 사무 처리를 마무리 짓고, 23일엔
최고회의가 한국전력주식회사 법안을 의결, 공포함으로써 전기 3사는 해산되었다.
 
韓電 사장엔 9사단장 朴英俊(박영준) 소장이 임명되었다. 민간 정부가 10년이 걸려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한 달 만에 치러냈다. 통합에 의해 능률적인 조직으로 재탄생한 韓電은 그 뒤 공업화의 동력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6월18일자 <조선일보>엔 ‘5·16 이후의 농촌’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사회부 睦四均(목사균) 기자의 경기도 용인 지역 르포 기사이다. 이 기사는 <초근목피로 연명해가던 보릿고개에서 군사혁명을 맞은 농군들은 ‘어려운 사람은 언제나 어렵게만 살아야 한다’는 지난날 자포자기했던 버릇을 버리려고
꾸준히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군복무 경험을 가진 농민들은 군인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어 지도만 잘하면 물불 안 가리고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도 했다.
 
 <농민들은 혁명 정부의 강력한 추진력에 감탄하고 있다. 게다가 40대까지의 농군들은 거개가 ‘한번 한다는 것은 끝내 실천하고야 만다’는 군부 본연의 생리를 알고 있으며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들은 군에서 명령에
복종해야 强軍(강군)이 된다는 것도 알았고 어떻게 해야 농민이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간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농군의 생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묵묵히 일하는
것만이 그들의 대표적인 생활 태도이다>
 
 
 
 

 

 
 
부정 축재 기업인 조사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연일 터트린 개혁, 숙정, 개조작업 중에서 부정 축재자 처리 문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5월28일 최고회의는 부정축재처리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위원장은 이주일 육군 소장이었고 6명의 위원을 두었다. 이 위원회는 기업인을 조사 대상으로 하는 제1조사단과 부정 공무원을 조사 대상으로 하는 제2조사단을 구성했다. 조사단 산하엔 12개 반,
각 반의 반장은 육군 소령, 중령들이었다. 반원은 감사원 직원, 형사,
세무 공무원으로 구성되었다.
 
 부정 축재 조사반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삼성물산의 이병철을 제외한 우리나라 10대 기업인들을 포함한 11명을 모조리 구속하고 수사를 시작
했다. 국세청의 전신인 司稅廳(사세청) 공무원으로서 이 조사단에
파견되었던 文炳恒(문병항)은 이렇게 회고했다.
 
 “부정축재처리법에는 6개 항목이 있었는데 제2항은 ‘부정한 방법으로 30만 달러 이상의 정부 또는 은행 보유 외환의 대부 또는 매수를 받은 행위’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원조 자금으로 들어온 외화를 둘러싼
부정을 말합니다. 은행을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압력을 행사하여 기업인들이
외화 대부를 받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자율은 低利(저리)였고 상환
기간도 장기였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연 30%이던 당시엔 이
돈만 빌면 가만히 있어도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이 돈은 떼먹어도 환수시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추적 조사 기법도 정착되어 있지 않았고 외환 관리라는 개념이 서 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기업을 조사해도 현금 출납이 장부에 제대로 적혀 있지 않으니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업이란 것이 꼭 구멍가게처럼 운영되고 있었으니까요.”
 
 김종필 전 총리의 증언에 따르면 기업인들을 잡아 가두는 계획은 그의
구상엔 없었고 최고회의에서 추진한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나는 실업인들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도둑질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까. 한국일보
사장 張基榮(장기영) 씨를 만났는데 ‘지금 최고회의에서 실업인들을 잡아 가두려는 모양인데 이거
안 됩니다. 극동해운 南宮鍊(남궁련) 씨를 만나보세요’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밤에 남궁연 씨 집을 찾아갔습니다.”
 
 남궁연은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혁명은 잘 했습니다. 혁명이 잘 되려면 실업인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경제 활동은 경제인들 스스로 하도록 해야지 정부가 너무 관여하면
됩니다. 정치인들도 비록 부정 부패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의
지혜와 경험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종필은 최고회의가 실업인들을 구속한 다음날 박정희 부의장을 찾아가 남궁연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구속을 철회해 달라고 밤을 새워 가면서 설득했다는 것이다.
 
 “실업인들 말고 경제를 일으킬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경제에 대해
아는 사람을 모아 보았자 학자들뿐이지 않습니까.”
 
 박정희는 처음엔 “최고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한 건데 어쩌나”라고 하다가 “나도 사실은 구속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면서 “내일 처리하자”고 하더란 것이다. 김종필은 일본에 가 있던 이병철에게도 “안심하고 들어오라”는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일본 도쿄에서 쿠데타 소식을 접한
이병철은 이런 심경이었다고 한다.
 
 
 
 

 

 
 
 <사회 변혁이 있더라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赤化(적화)의 우려는 없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도리어 정국이 안정될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었다. 경제인 11명이 부정 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그중 한 사람이 “부정 축재의 제1호는 도쿄에 있는데 우리들 조무래기만 체포하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옥중에서 불평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빈곤 때문에 사회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그 빈곤 추방의 앞장을 서야 할 경제인들을 차제에 잘 활용해야 할 텐데 근본적인 해결책은 등한시하고 무슨
목적으로 구속한 것일까>
 
 (《湖巖自傳(호암자전)》에서 인용)
 
 일본 경시청은 李秉喆 사장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형사들을 붙여두고 있었다. 6월4일 재일거류민단의 權逸(권일) 단장이 이 사장을 찾아와서 최고회의의 말이라면서 귀국을 권하고 갔다. 며칠 뒤엔 혁명 정부가 파견했다는 청년 두 사람이 ‘즉시 귀국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삼성 도쿄지사에 연락하니 ‘본국에서는 사장님이 귀국하지 않아 모든 일이 수습되지 않고 구속된 경제인들도 귀국을 바라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그는 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이주일 소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호암자전》에 실려 있는 편지의 요지는 이러하다.
 
 <부정 축재자를 처벌한다는 혁명 정부의 방침 그 자체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들과, 변칙적이고 불합리한 세제 아래서도 국가 경제 재건에 기여하면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활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 운영을 뒷받침해온 기업인들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인을 처벌하여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 빈곤 추방에 역행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나는 전 재산을 헌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6월26일 밤에 항공편으로 도쿄에서 서울로 귀국한 이병철은 마중 나온 중앙정보부 차량을 타고 명동 메트로호텔로 갔다. 다음날 그는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 李秉禧(이병희)의 안내를 받고 박정희 부의장을 만나러 갔다. 박태준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넓은 방으로 들어가니 저쪽에서
검은 안경을 낀 박정희가 걸어왔다.
 
 <박 부의장의 첫인상은 아주 강직해 보였다. 지도자로서의 덕망은 어떨까 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검은 안경의 박 부의장은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안부 인사부터 했다.
의외로 너무나 부드러운 음성에 안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