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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5) 조국 근대화를 꿈꾸던 혁명가 朴正熙와 기업인 李秉喆의 만남

淸山에 2011. 4. 2. 06:01

 

 

 
 
조국 근대화를 꿈꾸던 혁명가 朴正熙와 기업인 李秉喆의 만남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5)/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은 국가가 철저히 대기업을 통제하여 국가의 방향대로
몰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정경유착과 성격이 다르다
趙甲濟   

 
 
 

 

 
 
 朴正熙와 李秉喆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은 1961년 6월27일 박정희 부의장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는 부정 축재자 11명의 처벌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부정 축재 제1호로 지목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 것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 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부정 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戰時(전시) 비상사태하의 稅制(세제) 그대로입니다. 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박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이 지금 부정 축재자로 구속되어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 수만 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똑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들도 모두 11위 이내로 들려고 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기회가 없어서 11위 이내로 들지 못했을 뿐이고 결코 사양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선을 그어서 죄의 유무를
가려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윤을 올려 기업을 확장해 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하여 그것을 키워 온 사람은 부정 축재자로 처벌 대상이 되고 원조금이나 은행 융자를 배정받아서 그것을 낭비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기업의 자유경쟁이라는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 축재자 처벌에 어떠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박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용, 국민 교육, 도로 항만 시설 등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 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 위축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장 稅收(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박 부의장은 한동안 내 말을 감동 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국가의 大本(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미소를 띤 박 부의장은 다시 한 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호텔에서 연금 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찾아오더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정 축재자 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에 그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거절했다>(《호암자전》)
 
 박정희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를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 차렸을 텐데 풀어주지.”
 
 “안 됩니다. 아직 정신 못 차렸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될 것 아닌가. 우리가 이북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래도 드럼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 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 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이석제는 朴 부의장의 이 말에 반론을 펼 수 없었다. 다음날 이석제는 최고회의 회의실에 석방된 기업인들을 모아 놓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차고 있던 큼지막한 리볼버 권총을 뽑아들더니 책상 위에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박 부의장께서 내놓으라고 하니 내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원조 물자, 국가 예산으로 또 다시 장난치면 내 다음 세대, 내 후배 군인들 중에서 나 같은 놈들이 나와서 다 쏴죽일 겁니다.”
 
 6월29일 아침 이병철 사장이 묵고 있던 메트로호텔을 찾아온 이병희 정보부 분실장은 기업인들이 전원 석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병철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병철은 중앙공보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후 “국민을 빈곤으로부터 구하고 나라를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사흘 전에 일본에서 귀국했던 그는 “이런 의사를 작년 11월경에도 많은 친지들에게 전했으나 정부 당국에는 공식적으로 전달하지 않았으며 그 까닭은 부정부패가 이승만 정권 때보다 더 심해서 돈이 효과적으로 쓰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서 “군사혁명 이후 정부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진해서 전 재산을 혁명 정부에 바치겠다고 통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기업체에 불입한 재산의 총액은 약 150억 환이고 그 가운데 37~38%가 개인 재산이라고 했다. 이 돈을 “전부
국가에 바쳐 재건에 쓰도록 하겠다”고 한 그는 “해외에 재산을 도피시킨 것은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와 이병철의 만남은 조국 근대화를 꿈꾸던 한 혁명가가 기업인들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고 질박한 생활이 몸에 밴 박정희는 부자들에 대해서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졌으나 그의 실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그런 기업인들을 부려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그러나 대기업이 대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권력에 도전한다든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은 국가가 철저히 대기업을 통제하여 국가의 방향대로 몰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정경유착과 성격이 다르다.
 
 스코필드 박사
 
 6월8일 대법원 감독관으로 파견된 洪弼用(홍필용) 대령은 대법관 전원을 해임했다고 확인해 주었다. 洪 대령은 또한 근무지에 5년 이상 근무한 법원 서기에 대해서는 전국적인 인사교류를 하고 축첩자와 고령자에 대해서는 해임 등의 방법으로 인사의
신진대사를 기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6월10일 현재 내무부 산하에서만 축첩, 즉 첩을 둔 공무원 510명이 쫓겨났다. 이날 최고회의는 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농어촌 고리채법을 공포하고 국가재건 범국민운동본부장에 兪鎭午(유진오) 고려대 총장을 임명했다. 농어촌 고리채는 연 2할 이상을 의미하는데 채무자가 신고하면 채권자에게 7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규정했다. 인간관계가 고착된 농촌사회에서는 이 법의 취지대로 신고, 정리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6월12일 오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일곱 명의 상임위원장을 임명했다. 법제사법위원장에 이석제 중령, 내무위원장에 오치성 대령, 외무국방위원장에 유양수 소장, 재정경제위원장에 이주일 소장, 문교사회위원장에 송찬호 준장, 교통체신위원장에 김윤근 해병 준장, 운영기획위 원장에 김동하 해병 소장.

 
 
 

 

 
 
   
 최고 권력 기구인 최고회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상임위원장으로 해병대 장성이 두 사람 발탁된 것은 5·16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이 인정된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부는 이날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송요찬 전 육군참모총장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송 장군은 4·19 혁명 직후 박정희·김종필이 주동한 整軍(정군)운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나 渡美(도미)했었다. 그는 5·16 거사 소식을 듣자마자 혁명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외신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었다. 혁명의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때 태도를 분명히 한 그에 대해서 혁명 주체들은 상당한 평가를 했던 것이다.
 
  6월14일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1960년도 대외 원조액은 45억 달러인데 인도가 가장 많은 원조 수혜국이고 한국은 2억4000여만 달러로 2위였다. 이날 렘니처 미 합참의장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미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가운데 “60만 한국군과 함께 근무하는 6만5000명의 주한 미군은 1인당 7000달러를 쓰고 있다”면서 한국에 대한
軍援(군원)의 계속을 옹호했다.
 
 이 날짜 영자신문 <코리언 리퍼블릭>에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의 기고문이 실려 화제가 되었다.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는 일제시대에 한국에 살면서 3·1 운동 때 우리 편을 들어 ‘34인 중 한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다. 특히 일제에 의한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을 조사하여 이를 해외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다. 그는 4·19 혁명도
지지했었다. 박사는 <코리언 리퍼블릭>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서 한국인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주었다.
 
 <한 나라가 건강해지려면 그 국민들이 정직해야 한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날 피동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군대의 기강이 국민의 마음속에 침투되어 그들의 마음속에 자발적인 도의정신으로
 확립되는 날 한국에서 비로소 민주주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정실 인사, 휘발유 빼먹기, 깡패, 탈세, 병역 기피, 졸업장 위조 같은 부패를 숙청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군인들이 계속하여 국민에게 정직과 검소와 기강의 모범을 보여주고 공정하고 올바른 행정을
하고 정실을 배격하고 만민을 균등하게 대우한다면 이 비극의 땅은 명랑하고 즐거운 땅이 될 것이다>
 
 
 

 

 
 

 당시 72세이던 스코필드 박사는 군사혁명이 무자비한 독재로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全澤鳧(전택부·YMCA 명예총무)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한다.
 
 “박 장군은 농민의 아들이고 정직합니다. 그는 부정부패 몰라요. 그리고 아주 강합니다. 한국의 마지막 희망이 여기에 있어요.”
 
 전택부는 일제의 탄압과 이승만 독재에 반대한 이 노인이 왜 박정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몰랐지만 일단 그의 박정희觀(관)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전택부는 YMCA 재건 작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코필드 박사가 그를 부르더니 5달러를 쥐어주었다. 전택부가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하자 스코필드는 “윤보선 대통령은 그동안 얼마나 지원해 주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돈을 주신 적은 없지요.”
 
 “그럼 이승만 박사는?”
 
 “그분도 돈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
 
 “오, 안 돼요. 돈 없는 사랑, 사랑이 아니오.”
 
 박정희는 전택부에게 150만 환을 보태 주었다고 한다. 反骨(반골) 노인 스코필드 박사는 그 뒤에도 박정희를 지지하면서 충고하는 한편 舊(구)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6월15일 정부는 농업은행과 농협을 통합하라고 농림부에 지시했다. 신용과 사업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야 농촌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6일 정부는 주미 대사에 정일권 전 육군 참모총장, 외무차관에 육군 대령 출신의 외교관 李壽榮(이수영)을 임명했다.
 
 17일 오후 혁명 정부는 영장 없이 연행했던 3000명 이상의 容共(용공) 혐의자 가운데 우선 혐의가 벗겨진 664명을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수사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육군 방첩부대장 김재춘 대령을 수사본부장으로 하고 검찰과 경찰,
그리고 육본 법무감실을 참여시킨 중앙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6월17일 현재 지난 한 달 사이 혁명 정부에 의하여 정리된 공무원들은 약 2만 명에 달했다. 이날 내무부는 공무원 정리 요강 13개항을 발표했는데 정실 채용, 불성실이란 사유 이외에도 ‘50세 이상의 고령자’가 정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5·16만큼 광범위한 세대교체는 일찍이 없었다. 19일 혁명 정부는 병역 미필자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의 특별조치법을 의결했다.
 
 이날 정부가 발표한 1960년 12월1일 현재의 國勢(국세) 조사 결과 실업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16%인 23만 명으로 나타났다. 혁명 정부는 실업자 직업 능력 신고를 받도록 했는데 8만6000명밖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런 낮은 신고율은 당시에 ‘실업자들을 모아 농번기의 농촌에 노력 봉사 인원으로 투입한다’는 뜬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6월21일 혁명 정부는 법원과 검찰에 대한 숙정을 확대하여 지방법원장급 이상 전 판사와 검사장급 전 검찰간부들로 하여금 사표를 제출하도록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