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朴正熙 리더십 강좌 자료

淸山에 2011. 3. 29. 15:11
 

 

 
 
朴正熙 리더십 강좌 자료
 
國力을 조직화하여 능률을 극대화한 시스팀 운영의 鬼才(귀재).
 
趙甲濟
 
 
 

 

 
 

'시스템운영의 鬼才' 박정희식 일하기
 
 
  朴正熙 대통령이 사업을 추진할 때는 4단계를 밟았다. ①원리의 도출 ②원칙의 수립 ③시행계획 작성 ④집행 단계이다.
 趙甲濟
 
 
 
  吳源哲(전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 중화학기획단장)
 
 
 
  브리핑이 成敗 결정
 
  朴正熙 대통령이 사업을 추진할 때는 정해진 단계가 있다. ①원리의 도출 ②원칙의 수립 ③시행계획 작성 ④집행 단계이다.
  朴正熙 대통령 때는 「브리핑 행정시대」 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컸다. 브리핑 제도를 이해 못하고는, 朴대통령 시대의 행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브리핑을 할 때는 그 목적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내용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브리핑의 골자를 이룬다.
 
  ○ 「출발점」부터 「결론」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 줄거리는 一路 매진하는 식으로 나가야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 구분을 해 주어야 이해하기 쉽다. 구분에는 큰 구분과 작은 구분이 있다. 그리고 메시지 전달을 돕기 위해 도표를 많이 사용한다.
  ○ 브리핑 설명은 순식간에 납득이 가능하도록 간단명료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해하기 쉬운 말을 써야 하고, 거부감이나 혼선이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난해한 이론은 금물이다.
  ○ 강조해야 할 사항은, 되풀이 설명한다. 되풀이 설명하면 여러 사람이 머리에 남게 된다. 학술논문 발표와는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결론은 명확해야 한다. 이론 정연하고 실시 가능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청취자 전부가 동감을 하게 되고, 대통령은 결단을 내릴 수 있다.
 
  ① 원리(原理)의 도출
 
  원리라는 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생각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민생고 해결과 경제자립」은 우리나라 1960년대 초기의 「경제개발 원리」였다. 朴대통령은 이 원리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라는 정책을 수립해서 추진했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출제일주의 정책」으로 전환을 했다.
  수출을 하다 보니 「수출이야말로 국가 기본전략」 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 朴대통령은, 「수출제일주의」를 우리나라의 국시(國是) 즉, 「경제발전 원리」로 승격시켰다. 「국민생활향상」 「고용증대」 「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 「전산업의 수출화」 「국민의 과학화」 「남북한 경쟁에서의 승리」 「고도산업국가 건설과 선진국 진입」 등이 「경제원리」에 속하는 사항이다. 국가원수인 朴대통령이 직접 담당해야 할 과제인데, 청와대 비서진이 보좌하게 된다. 朴대통령은 임기 18년 동안, 도출된 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 국민도 믿고 따라간 것이다. 원리가 통하는 시대였다는 뜻이다.
  원리(原理)나 국시(國是)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다 보면, 정치 구호화(口號化)되기 쉽다. 어떤 정치가가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수출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 보았자, 이것은 정치구호의 역할밖에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피하려면 비전 형태로 제시해야 하는데, 비전이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그래서 비전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원수의 중요한 책임사항이 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수치화(數値化)하는 방식을 썼다. 수치로 표시하면, 국민들은 알아듣기 쉽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의 수준을, 현재와 비교할 수 있고, 진행 과정도 수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朴대통령은 「수출 제1주의시대(1964~1970년)」에는 10억 달러의 수출목표를 제시하면서, 연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요구했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보리밥을 먹을지언정 국민의 생활고(生活苦)는 해결된다고 했다. 경제자립의 기초가 마련된다고 했다. 「全산업의 수출화시대(1973~1980)」에는 100억 달러의 수출목표와, 년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지시했다. 이 목표달성으로 국민 1인당 GNP는 1,000달러가 돼서 국민의 의식주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고,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국가가 된다고 했다. 북한과의 경제전에서는 완승(完勝)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을 격려했다. 이것이 朴대통령의 국가경제건설 전략이었다. 그 결과 연간수출증가율은 1964~1970에는 41.9%, 1971~1979에는 39.8%를 달성했다. 16년간 평균 40%의 성장이라면, 기적과도 같은 성과이다. 朴대통령의 성품 즉, 신념, 집념 그리고 고집을 잘 나타내는 결과이다. 수출이 증대하다 보니, 그 효과는 全산업에 파급되고 고용도 급격히 늘어났다. 국민의 생계도 좋아졌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정신면에서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을 심어주기 위한, 산 교육장 역할도 했는데, 이 정신은 지금까지도 살아 남아서,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고 있다.
 
  ② 다음 단계는 원칙의 작성이다.
 
  행정면에서는 정책수립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각 담당부처에서 작성되는데 국가원수인 朴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확정된다. 이때, ‘브리핑’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이 자리에는 국무총리 이하 각부장관, 관계기관장 등이 배석하는데, ‘브리핑’은 해당과제에 대해서, 가장 지식이 많은 공무원이 담당한다. 보통은 국장급이 했지만, 과장급도 국가大事에 대해 정책을 수립해서, 대통령 이하 정부 최고 간부 앞에서 설명하고, 질문에 대해서 답변한다는 뜻이다. 실무에 밝은 朴正熙 대통령은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는데, 이때 장차관이 답변을 못하는 경우가 나오기 때문에 생겨난 제도이다. 국장이든 과장이든 간에,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실무공무원 즉, 테크노크라트가 우대받던 시대였던 것이다.
  두 부처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 두 부처간에 의견이 다를 때에는, 같은 장소에서 두 부처가 제각기 브리핑을 할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브리핑을 담당하는 두 부처의 공무원간에, 격론이 벌어질 때가 있는데, 朴대통령은 모든 의견을 다 듣고 최종결단을 내렸다. 이럴 때는 어느 쪽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 양 부처 장관은 사전에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책임이 있어, 대통령에게 송구하기 때문이다.
  장관이 최종결정을 못한 채 브리핑할 때가 있다. 즉 결론에서 A안과 B안을 내놓고, 서로간의 장단점만 설명할 때이다. 이럴 때 朴대통령은 「장관! 당신은 A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B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하고 호통을 친다. 장관은 책임행정을 하라는 뜻이다. 각 해당부처에서 작성하는 경제개발 계획은, 장관 이하 全공무원이 머리를 맞대고 합심해서 수립하는 것이지, 대통령의 눈치나 보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질책이기도 하다.
  각 부처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브리핑할 때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꼭 건의사항이 나온다. 보통은 「자금요구」 사항이 된다.
  요약 정리하면, 정책사업은 ① 각 부처의 국장이나 과장급에서 성안을 하고 ② 장관의 결재를 얻은 후 ③ 관계장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게 된다. ④ 이 회의에서 검토를 거친 후 사업이 확정되는데 ⑤ 소요예산도 이때 확보된다. 이런 절차에 따라 결정된 사업을 「대통령 관심사업」 이라 칭했다.
 
  ③ 세부계획 작성에 들어가는 단계이다
 
  세부 계획은 각 부처에서 수립하는데, 중요한 안건은 서류로 작성해서 대통령의 결재를 받기도 하지만, 장관 책임하에 확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결정된 계획은 장관 책임하에 집행하게 되는데, 성공하면 그 부처의 공이 되고, 실패하면 책임을 지게 된다. 전적으로 각 부처의 책임행정사항에 속한다.
  원리와 원칙이 제대로 확정되었다면, 세부계획 단계에서의 작업은 수월해진다. 또한 자유재량의 폭이 적어져서, 非理의 발생 소지가 줄어든다. 세부계획 작성 단계에서는 공장 설립과 관계가 많다.
  세부계획 작성 단계에서의 한 특별한 예를 든다. 국군 현대화 사업(율곡사업)의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이 사업의 추진과정에서, 무기의 선정은 무관(武官)에게 담당시키되, 이에 대한 검토는 문관(文官)에게 맡겼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무상원조(MAP)에서 유상원조(FMS)로 바뀌어지자 朴대통령은 외무부 직원 崔洸洙 국장(후에 청와대 수석 비서관, 외무부 장관 역임)을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임명했다. 현역군인이 아닌 문관(文官)출신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朴대통령의 의도는 명확했다. 율곡사업과 같은 국가 기밀사업일지라도, 일반예산과 똑같이 ① 경제기획원의 예산당국에서 검토를 해야 하고 ② 국회의 심의과정 같은 절차를 받아야 하고 ③ 청와대 비서실에서 검토 후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집행해야 하고 ④ 감사원과 같은 기구에서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고수하겠다는 朴대통령의 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④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큰 사업에 착수 할 때에는, 꼭 기공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통해 격려를 했다. 공사 중에도 현지 방문을 자주 함으로써 작업진도를 확인했는데, 주로 공장장이나 현장책임자로부터 기술적인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준공식에도 꼭 참석해서 노고를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했는데, 주로 기술자의 몫이었다.
  朴대통령은 행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에는 차량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수출품 제조 공장이나, 새마을 농촌 등 관심사업 몇 군데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때로는 통고 없이 갈 때도 있으니, 아무런 사전준비도 못한 상황이 되거나, 사장이 부재중일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어떤 작은 공장이나, 시골의 새마을 농촌에서도, 브리핑 차트는 준비되어 있었고, 웬만한 간부는 브리핑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朴대통령은 현장을 둘러보면서, 현장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떠나기에 앞서 “애로사항은 없느냐”고 물어본다. 새마을 농촌에서는 “숙원사업은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애로사항’이나 ‘숙원사업’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비서실장에게 지시해서 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이런 일들은 큰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에 「일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게 된다.
  한반도의 남단 여천에는 중화학공업건설(6개업종)의 하나인 화학공업 콤플렉스가 위치해 있다. 朴대통령은 이 공업지구를 건설함으로써, 북한의 공업을 완전히 압도하려고 했다.
  朴대통령은 여천을 수 차례 방문했다. 부두가 완성되자, 朴대통령은 이곳을 시찰했다. 그리고는 항만 관리소를 찾아가서, “여기는 외국선박이 자주 드나드니, 외국선원들도 많이 찾아올 것이다. 부두가 더러우면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미화(美化)작업도 하고, 늘 깨끗이 하시오.”라고 했다. 그 후 朴대통령은 또 한번 찾아갔다. 아마도 미화작업 확인차 들렀을 것이다. 부두는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각 공단에서는, 미화작업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화작업 우수업체 콘테스트」를 열고 표창도 했다.
  필자는 대통령 서거 후 10여 년 만에, 여천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때 옛날 생각이 나서 부둣가를 거닐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다. 경비원이 있기에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는“높은 사람이라곤 10여년간 한 사람도 찾아온 적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관심이나 갖겠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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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경영자 朴正熙 리더십의 바탕은 교양
 그는 역사의 原理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여기서 우러나오는 전략과 실천은 단순명쾌하게 정리된 것이었다. 말장난이나 현학적 관념론이 낄 틈이 없는 실용성과 합리성이 거기에 있었다.
 趙甲濟
 
  *지도력의 일관성과 입체성
 
  석유파동과 中東진출, 그리고 중화학공업 건설. 1970년대 한국경제의 3大 주제를 관리하였던 네 인물이 있다. 비서실장으로서 경제정책의 총사령탑 역할을 했던 金正濂, 재무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였던 南悳祐, 경제제1수석비서관과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金龍煥,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담당이었단 경제제2수석비서관 吳源哲.
  당시 金실장과 南장관은 50대, 吳 金씨는 40대였다. 이 네 사람은 20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과 강연활동을 통해서 朴대통령의 업적과 지도력을 전파하고 있다. 1970년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이 네 사람의 증언과 기록은 안심하고 인용할 수 있다.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모시면서 國政의 핵심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증언에서 드러나는 朴대통령의 국가경영술은 철학, 전략, 전술, 정책, 실천이 일관되게 흐르고, 입체적으로 짜인 아름다운 건축물 같다. 朴대통령의 국가 운영에서 발견되는 일관성과 입체성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는 골똘한 사색과 독서를 통해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다가 치밀한 설계와 신속한 실천, 그리고 철저한 확인으로써 속을 채워갔다. 겉으로는 엄정하고 경직되어 보이는 그의 국가경영술은 안으로 들어가보면 의외로 부드러웠다.
  그는 역사의 原理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여기서 우러나오는 전략과 실천은 단순명쾌하게 정리된 것이었다. 말장난이나 현학적 관념론이 낄 틈이 없는 실용성과 합리성이 거기에 있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5년, 만주군관학교 2년, 일본 陸士 2년, 한국 陸士 6개월, 미국 유학 1년, 陸大 1년 등 군대에서만 10여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한국, 미국, 일본식 군사 교육을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받았다. 그는 강한 주체성으로 외래 문물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독서를 좋아한 교양인이었다. 주체성이 확립된 교양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균형감각과 입체적 시각이 그의 리더십의 바탕이었다.
 
  * 朴正熙 리더십 12계명
 
  1. 화합형 정책 결정: 朴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이었다. 엉터리 보고라도 끝까지 들어주었다. 좀처럼 즉석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 뒤 主務장관이 다시 한번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주무장관이 發案한 정책이 채택되는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기고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남을 통해서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2. 민주적 정책 결정: 朴 대통령은 어떤 회의에서도 먼저 발언하지 않았다. 토론을 시켜 문제가 제기되고 贊反의견의 방향이 잡혀가면 그때 결론을 도출하고 필요한 보충지시를 내렸다. 당시의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은 민주적이었다.
 
  3. 생산적 회의: 朴 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무역진흥회의), 청와대 국무회의, 국가기본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를 정례화하였다. 이들 회의는 대통령이 國政을 종합적으로 규칙적으로 파악 점검하고 살아 있는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4. 철저한 확인과 일관된 실천: 朴 대통령은 계획수립에 20%, 실천과정의 확인에 80%의 시간을 썼다고 한다. 중앙부처 및 지방 순시 등 현장 시찰을 자주 한 것도 집행의 확인과 사람들의 士氣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계획의 수정이 필요할 때는 토론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했다.
 
  5. 국민의 각성과 참여: 朴 대통령은 국민들이 自助정신을 발휘하여 자발적으로 건설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인간과 조직의 정신력에 주목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인의 민족성처럼 되었던 패배의식과의 싸움에 이긴 사람이다. 그는 京釜고속도로 건설 같은 눈에 뜨이는 구체적 업적을 통해서 국민들의 체념과 自虐을 자신감으로 교체해갔다.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 도 작사 작곡했다.
 
  6. 정부는 맏형, 기업은 戰士: 朴 대통령은 경제관료와 기업인이 異見을 보이면 많은 경우 기업인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을 채택했으나 기업이 엔진이고, 경제전선의 戰士는 기업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기업 엘리트를 존중해주었고, 기업인들은 '대통령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7. 내각에 권한과 책임 위임: 청와대 비서실이 장관 위에 군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장관의 인사권을 존중했다.
 
  8. 관료엘리트 중시, 학자들은 자문역: 실천력을 중시하던 朴대통령은 집행기관장으로서는 학자를 거의 쓰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문역으로만 부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서강대학교 교수 출신인 南悳祐 부총리였다. 南부총리도 실무능력의 검증을 거친 다음에 重用되었다.
 
  9. 정치와 군대의 압력 차단: 그는 관료들이 國益과 효율성의 원칙하에서 소신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군인들과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차단하고 견제했다. 군대의 힘으로써 집권한 사람이 군대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예는 매우 드물 것이다.
 
  10. 경제발전 우선주의: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이 결국은 안보와 민주주의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先 경제발전, 後 민주화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 따른 비난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대응했다.
 
  11. 市場의 한 멤버로서의 정부: 朴 대통령은 정부가 시장의 규제자가 아니라 한 참여자라고 생각했다. 朴대통령 시절의 정부는 시장 지배자라기보다는 시장의 일원으로서 시장 기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부는 기업가, 은행가, 개혁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電力, 철강 등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公기업을 만들어서 맡아서 하되 경영은 민간기업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官治경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CEO로 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김용환)'
 
  12. 주요 전략 선택의 적중: 朴 대통령이 채택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 중점 투자전략, 先성장-後분배 전략, 과감한 외자유치 전략은 모두 성공했다. 朴 대통령은 정책과 전술은 수시로 변경했지만 철학과 전략은 18년 동안 그래도 밀고나갔다.  

 
 
 

 

 
 
 박정희의 정확한 언어감각 

 편집기자 수준의 직업적 언어감각. 언어감각이 높다는 것은 知的 수준이 뛰어나다는 뜻이고 일을 정확히 한다는 의미이다.
 趙甲濟
 
  1964년 8월3일에 있었던 국방대학원 졸업식 諭示(유시)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社會的 安全’이 先行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으리라고 확신해 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원래 아래에서 올린 연설문 草稿(초고)엔 ‘社會的 安全’이 ‘國內的 安全’으로 되어 있었다. 朴 대통령은 ‘國內的 安全’이란 말이 앞의 ‘국가의 안전’과 중복된다고 판단하여 ‘社會的 安全’으로 바꿈으로써 문장의 의미를 명료하게 한 것이다.
 
  초안: <국방과 시정전반에 걸쳐 일선에 나선 여러분들은 좀더 새로운 決意와 노력으로써 국민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며...>
  박정희의 교정: <국방과 시정전반에 결쳐 일선에 나선 여러분들은 좀더 새로운 視覺과 노력으로써 국민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며...>
  '결의와 노력'에서 '결의'를 '視覺'으로 바꾸니 의미가 확실해지고 중복이 없어진다. '새로운 결의와 노력'은 상투적이지만 '새로운 시각과 노력'은 연설자가 무엇을 주문하는지가 명확하다.
 
  朴 대통령의 정확한 언어감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정도의 언어감각은 편집기자 정도의 직업적 수준이다. 언어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은 知的 수준이 높다는 의미이고 이런 자세로 일을 하면 사고가 생기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정확하고 저급한 언어감각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말은 인격이다.
 
 
 
 
 박정희 리더십의 핵심인 그의 말과 글 연구
 
 
 조갑제 외
 
  *월간조선 7월호에서 가져옴
 
  위대한 CEO 朴正熙의 特命 육성․친필 문서철 발굴
 
 
  『뭉개고 앉아 있는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가능케 했던 鐵人의 이론과 실천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 : 『사물의 핵심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정확한 말과 글이 지도력의 본질이었다』
 
  [편집자 注] 1963년 12월 취임한 朴正熙 대통령은 1979년 10월 서거할 때까지 약 16년 동안 대통령 직을 수행했다. 물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통령 직무대행 기간까지 포함하면 약 18년이 된다. 이 기간 朴正熙 대통령은 수많은 지시를 장관과 관료에게 내리고 국가발전에 온 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대전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에는 朴正熙 대통령이 직접 口頭(구두), 또는 친필로 지시한 「依命指示」 문서가 보존되어 있다. 이 문서는 근대화의 騎手(기수) 朴正熙가 국정을 어떤 철학과 요령으로 이끌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인간적 배려
 
  6? 전쟁 때 재일동포 학생들이 미군의 주관으로 일본에서 훈련받은 뒤 한국 전선에 자원 참전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교포 학생들은 休戰(휴전) 10년이 지났는데도 歸日(귀일)치 못하고 모국인 한국에서 流浪(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朴대통령은 1964년 2월3일 외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재일교포학도의용군」이라는 공문에서 『미군의 周旋(주선)으로 일본에서 훈련, 미군기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의용학도들의 歸日 문제는 하나의 인도적 문제라 아니할 수 없으며 정부는 더욱 적극적인 외교로써 이들을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특히 朴대통령은 『이 문제가 美軍 당국도 응분의 책임이 있는 만큼 정부는 미국 측과 적극 협조하여 공동적 對日 외교 노력으로써 해결토록 할 것』을 지시했다.
  1964년 2월이면 朴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지 2개월여 되었을 때이다. 이 지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朴대통령이 인도적 조치와 미군의 책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전할 때는 미군에 포함돼 왔으나 休戰 후 일본과의 未修交(미수교)로 인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 하고 있는 교포학생들의 딱한 처지를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교포학생의 未歸(미귀)라는 구체적인 사태에 대한 美軍(미군)의 구체적인 책임을 지적하고 있다.
 
  관계부처의 정보 共有 강조
 
  1964년 1월29일 러스크 美 國務長官(국무장관)이 내한했을 때 「韓美 간 會議記錄(회의기록)이 한 달이나 늦어서 겨우 인쇄 배포된」 사실이 있었다. 또한 당시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추진 중에 있던 借款糧穀確保(차관양곡확보) 交涉(교섭)이 駐美大使에게 신속․정확하게 통보되지 않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시기를 다투어야 할 외교문서가 지연 처리되는 데 대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하며 韓美 간의 회담 기록을 작성 배포하여 정보를 공유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해 1964년 3월2일 朴대통령이 「韓美 간의 회담 기록 작성․배포」라는 제목으로 지시한 내용이다.
 
  <1. 同一步調(동일보조)를 取하고 일관성 있는 외교 노력을 保障(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側이 미국 측에 대하여 交涉(교섭)하고 있는 내용, 그 進陟(진척) 상황을 우리 측 관계자들이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이를 위해서는 미국 측과 交談(교담)한 한국 관리가 그 교담 내용을 한국 측 관계자들에게 정확히, 신속하게 상호 통보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지금까지의 사례를 보면 미국 측과 交談한 내용을 關係者(관계자)들에게 통보해 주는 노력이 극히 부족하며, 따라서 그 交談 內容은 자기만의 지식으로 그치고 말아 동일한 외교 목적을 위한 한국 측의 노력은 서로 손발이 맞지 않는 형편입니다.
  4. 앞으로 일체의 韓美회담, 개인접촉(公式 또는 非公式을 막론하고)에 있어서는 그 交談內容을 즉시 書面(서면)으로 외무부에 제출하여 보관케 하는 일방, 외무부는 즉시 이를 印刷(인쇄)하여 관계기관, 駐美大使(주미대사) 등에게 배포할 것을 엄격히 지시하는 바입니다.>
  중요한 정보를 관계부처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朴대통령이 在任 시절 내내 견지한 중요한 방침 가운데 하나이다.
 
  종합계획 수립을 늘 염두에 두고
 
  朴대통령은 일을 구상할 때 늘 종합계획 수립을 염두에 둘 것을 강조한다. 1964년 3월17일의 「제주도 시찰 소감 및 지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제주도 종합개발 계획
  설사 당장 착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제주도에 대한 종합적 개발 계획을 樹立(수립)해 두고 비록 小부분의 투자사업도 이 종합 계획의 한 부분으로 맞게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천연산물의 保護
  제주도의 천연산물(꿩, 蘭 등)이 무법적으로 亂獲(난획)되고 있는데, 도지사는 어떠한 규정을 만들어 이를 보호하고 또 그에 대한 換金化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예: 獲銃(획총) 入道(입도)에 대한 特定額 징수 등)>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 때문에
 
  朴正熙 대통령은 1964년 4월21일 국무총리 이하 全국무위원들에게 보내는 훈령을 통해서 당시 번지고 있던 韓日회담 반대 시위를 언급하면서 「일부 沒知覺(몰지각)한」 학생들과 이들을 선동한다고 그가 믿었던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朴대통령은 「일부 몰지각한」이란 말을 그 뒤 자주 사용하는데, 다수 학생은 선량하다는 전제를 깐 말이다. 반대 세력을 「일부」라고 축소, 고립시키려는 의도이다.
  〈민정에 들어 아직 일천한 때, 다시 지난 수주간의 연다른 학생 데모 사건들은 민심을 극히 불안케 하고 있을뿐더러, 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적 혼란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헌정의 기초를 확고히 하여야 할 民政 초기의 이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이 상태의 연속 방치는 무법과 방종의 고질적 병폐를 면치 못하게 할 것이며, 나아가 민주질서를 파괴하고, 기초의 대본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조차 금할 수 없습니다.
  정녕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단지 일부 학생들의 몰지각한 행동에만 돌릴 것이 아니라, 정부의 우유부단한 시책적 결함에 그 태반의 책임이 있다고 自省(자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시정의 일대쇄신을 기하지 못할진댄, 이 난국을 수습하고, 침체된 사회 양상을 匡正(광정)하기란 무망한 것이라 미리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諸침체와 혼돈의 요인이 되고 있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을 강조하오니, 각 국무위원은 혼연일체가 되어 그 문제의 시정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요망하는 바입니다.
 
  1. 대책과 태세의 완비
  정부의 소신과 신념은 항상 확고한 대책과 완비된 태세에서 우러나오는 것인 바, 정부는 항시 그 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예측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미리 강구하고, 何時라도 대응할 수 있는 임기응변의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全국무위원이 혼연일체가 된 擧閣的(거각적) 대책과 태세만 완비된다면 여하한 난국도 선처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을 굳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법질서의 유지
  강력한 정치가 국민의 여망인 바, 이 강력한 정치란, 만인이 법 앞에 공평하고, 또 법을 지키게 하는 질서의 유지에 그 요체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적 데모가 사회적 만성으로 고질화되고, 무법행동이 날뛰는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강력한 정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정부의 존재조차 의문시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정부는 더욱 비상한 각오로써 불법데모, 치안교란자들은 철저히 단속하여 사회안정과 법질서유지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문교방침의 재검토
  학원의 자유가 무제한 방종의 개념으로 착각하고, 또 학생이 스스로 헌법과 정부 위에 위치하는 양, 정부의 명령이나 교학자의 지시도 듣지 않는, 오늘의 학생 기풍은 확실히 국가장래를 위하여 극히 염려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학교가 학생을 선도하지 못할진댄, 학교의 존재가치는 무의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학원의 질서를 바로잡고, 학풍의 쇄신을 기하기 위하여 문교정책에 전반적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학교 책임자는 그 학생들의 불법데모 등 범법을 막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며, 그 노력을 다하지 못했을 때에는 학교당국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또 범법 학생은 퇴학처분 등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엄한 교칙으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학생들에 대한 조치를 게을리할 때에는 그 학교 책임자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등, 학교에 대한 정부감독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문교정책이 너무나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론에 기초를 두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언론대책
  자유와 책임을 그 어디보다도 강조해야 할 곳은 바로 언론기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정부가 언론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 주면서도, 그 책임의 강조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파행적 언론창달의 시책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이러한 상태의 방치는 건전한 민주주의의 성장을 크게 저해하게 될 것입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들에 대하여 냉엄히 그 책임을 추궁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는 정부에 부하된 임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5. 자금지원의 효율적 집중
  수출산업과 중소기업의 지원을 위한 대출자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쉬운 오늘, 많은 자금들이 비생산적 기관에 대출되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러운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 반환기간이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수에 노력하고 있지 않음은 금융기관장들의 생산위주의 정부시책에 대한 의식결여를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정부는 비생산기관에 대출한 지체금을 조속히 회수하여 생산대출 자금에 충당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외국 투자가들을 친절하게 대하라」
 
  〈시행연월일: 1964년 5월14일
  경유 수신 참조: 국무총리
  제목: 외자도입촉진(차관과 건설)
  발신: 依命
  (前略)
  아. 외국인(투자, 차관관계)들에 대한 공무원들의 성의 있는 태도의 촉구(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기대를 갖고 왔다가 공무원들의 불친절에 실망하고 돌아간 예 허다하다 함).>
  朴대통령의 지시문은 誤解의 소지가 없고 간단명료하다. 제발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공무원들이 친절하게 대하라는 당부는 요사이도 유효하다.
 
  정부가 기업인에게 신속히 협조할 것
 
  1964년 10월30일 朴正熙 대통령은 국무총리에게 「일부 未決 사항(和信)」이란 제목의 지시를 한다. 이 지시문에서도 그는 기업인들의 사업을 정부가 신속한 업무처리로 협조해 줄 것을 강조했다.
  <1. 화신산업이 신청한 사업들에 대하여, 정부는 내인가 또는 적극 추진해 오다가, 모두 미결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 이러한 미결상태의 지속은 신청사업자에게 지대한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 소모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내각은 곧 관계자 회의를 소집하여, 신청자의 충분한 설명을 청취한 후, 명확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미결상태의 이 이상 持續을 종결시켜야 할 것입니다.
  4. 본 지시에 대한 결과보고를 제출해 주기 바라며, 여타 미결사항에 대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처리 결정해 나가는, 미결사항 一掃의 일대 작업이 있기를 바랍니다.>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문은 1, 2, 3식으로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요점을 적는다. 군더더기가 없다. 위의 特命처럼 반드시 결과보고를 요구한다. 朴대통령은 장교 시절 『지시는 5%, 확인은 95%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고로 글을 쓸 때 1, 2, 3식으로 단락을 명확하게 해놓고 들어가면 구성에서 혼란이 빚어지지 않고 문장의 낭비가 적다. 朴대통령의 이런 지시문은 누구에게나 유용한 아주 효율적인 문장 작성법이다.
 
  처리 기일과 보고 시한 명시
 
  朴대통령 지시의 특징은 지시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시를 내릴 때 언제까지 처리하고 또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1965년 1월21일에 朴대통령이 내린 지시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제목 : 지시사항에 대한 미처리
  1. 會期中, 硏究中, 檢討中, 協調中 등을 핑계로 수많은 정책이 空轉되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심지어 대통령 지시사항이나 또 國務會議의 결정사항마저도 그 집행이 되고 있지 않은 사례가 많음은 더욱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3. 遲延되고 있는 미결 사항을 1월 중에 모두 처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 주기 바랍니다.>
 
  反共도 관광자원이다
 
  먹고 살기에도 힘에 부치던 때 朴대통령은 관광 산업에 대해 언급한다. 그 언급은 두 가지였는데 1965년 2월11일에 내려진 「춘천댐과 관광」, 그리고 「반공을 자원으로 한 관광」이었다. 그는 춘천 댐 준공식에 참석해 이런 구상을 가다듬는다.
  <제목 : 춘천댐과 觀光
  앞으로 많은 관광객, 특히 수학여행을 이 춘천댐으로 誘引시켜 우리의 기술을 자랑하고 또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업적들을 보도록 할 것을 당부합니다. 특히 공보부는 춘천댐에 대한 특별한 홍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목 : 반공을 자원으로 한 관광
  우리나라의 反共 業績은 훌륭한 관광자원이라고 생각하며, 또 이는 반공사상을 鼓吹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판문점, 휴전선, 평화선, 자유센터 등을 資源으로 하는 관광개발에 종합적 계획이 있기를 바라며, 특히 이 지점들에 적절한 시설(전망대, 休息所, 관광 코스와 버스 등)을 함으로써 훌륭한 관광지대가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극적 조치 있기 바랍니다.>
  이보다 앞서 1964년 10월26일에는 부산의 UN묘지를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
  <『UN묘지는 우리나라의 하나의 성지이며, 또 부수적으로는 관광자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UN묘지 周邊의 도시계획에 있어서는 상당한 국가적 配慮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근간 그 주변에 統制 없는 무허가 건축, 開墾(개간), 그리고 惡臭 있는 農事法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강력한 市행정력으로써 統制되어야 할 것입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판문점을 비롯해 휴전선, 임진각, 땅굴, 이제는 소원해졌지만 「평화의 댐」 등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반공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했다고 비난할 것이다. 당시 반공은 정권 유지의 수단이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의 길이었다. 그에게 反共은 돈벌이도 되고 교육도 되는 「자원」이었다.
 
  朴正熙 리더십 비결/중점주의
 
  朴正熙 대통령은 1965년 3월10일 그동안 지방시찰을 한 소감을 요약하여 관계 부처에 배포토록 했다. 여기서 그는 행정 운영 방식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피력한다. 특히 행정에 중점적 시책을 선정하여 역량과 자원을 집중하라는 강조는 그의 행동요령을 잘 보여 준다.
  그가 지도한 고속성장은 전략적 목표와 우선순위를 잘 선택하여 제한된 자원을 그곳에 집중적으로 투입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들에게 자원을 분산시키지 않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들을 선별하여 그 달성에 국력을 총동원한 것이 朴正熙 체제가 가진 효율성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지방시찰 종합 소감 및 지시
  연두 지방시찰을 끝내고 느낀 종합적 소감과 이에 따른 지시를 다음과 같이 시달하오니 그 시정 및 조치에 유감 없기를 바랍니다.
  1. 중점적 시책을 가져라.
  각 지방장관이 열성으로 市․道政에 임하고는 있으나, 무엇을 꼭 해보겠다는 중점시책들이 부각되어 있지 못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바른 시책의 방향과 중점을 갖지 못할 때에는 열성과 노력은 분산된 결과밖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각 지방 장관은 그 지방 행정의 특징을 이룰 만큼 확실한 중점시책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2. 각 지방 장관은 독자적 창의와 신념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한 지방의 행정 장관은 그 지방 행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독자적 창의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입니다. 뚜렷한 개성과 창의가 없는 지방 행정은 결국 앞에 말한 「중점 없는 행정」의 결과와 같습니다. 「○○도지사는 ○○에 유명하다」는 여론이 있을 만치 지방장관은 중점을 갖춘 독자적 창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앙의 지침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지침에 불과한 것이며, 그 지침에 너무 구애되어 독자적 창의를 갖지 못한다면 그 지방 행정은 「죽은 행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중앙의 지침과 더불어, 그 지방의 특수 사정에 알맞은 지방장관의 독자적 창의와 신념만이 지방행정을 빛낼 수 있는 것입니다.
  3. 중앙의 더욱 협조된 지침이 있어야 한다.
  어떤 시책의 지침(對지방)은 중앙에서 사전에 협조되고 종합되어 시기에 알맞게 지방에 하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범 읍면 단위 육성」에 대하여는 중앙의 관계 장관들은 「경제각료회의」와 같이 관계장관회의를 가져 종합적으로 그 지침을 작성하여 하달하고, 그 후에도 이를 계속 지원하는 시책들이 이 회의에서 뒷받침하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지방 행정의 중요 문제점들에 대하여는 「○○에 대한 정부지침」의 형식으로 각부 의견이 종합된 것으로 하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中略)
  상기 지시들에 대하여 본인은 그 실천상황을 관심을 갖고 주시할 것입니다. 특히 중앙의 지침. 계획은 물론, 각 지방 장관들은 그 지방의 독자적 추진계획이 성안되는 대로 본인에게 직접 보고할 것을 지시합니다.>
 
  朴대통령 특유의 인사 원칙 천명
 
  1965년 6월9일 朴正熙 대통령은 「국영기업체의 紀綱」이란 제목의 지시를 국무총리에게 내린다. 朴대통령 특유의 仁事觀과 인사원칙이 드러나 있다.
 
  〈1. 근간 들리는 바에 의하면, 국영기업체들 중에는 간부진에 있어서 서로 불화하여 수다한 잡음이 조성되고 있으며, 심지어 상위자를 축출하기 위한 下剋上(하극상)적 현상마저 있다 합니다.
  2. 기업의 운영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영인원들의 人和에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인화를 갖지 못한 기업체에 그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따라서 다음과 같이 그 방침을 천명 재확인하여, 기업체의 효율적 운영을 기할 것을 당부하는 바입니다.
  記
  가. 국영기업체의 이사 및 인원편성에 있어서는 그 長의 의견을 절대 존중할 것.
  나. 理事陣 내의 불화상태가 있을 때에는 그 長이 인사조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것.
  다. 불화로 인하여 부득이 그 長을 사임케 할 때에는, 불화에 책임 있는 全이사를 같이 사임케 할 것.
  라. 전반적으로, 各部 장관이 예하 기업체를 감독하는 노력과 책임이 부족함. 만일 기업체에 대한 잡음이 있을 때에는 그 책임 장관은 이를 방치함이 없이 조치하는 감독권을 즉시 행사하여야 할 것임.>
  朴대통령의 인사 방침은 조직의 長 이외의 非공식 실력자를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長을 임명했으면 그에게 부하 인사권을 주어야 하고 책임을 물을 때엔 長과 관련 이사들에게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을 어떤 원리로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金言이다.
 
  우리의 현실을 무시한 外來제도의 형식적 移植을 반대함
 
  朴正熙 대통령은 1965년 11월11일 국회의장 앞으로 「지방의회 구성에 관한 답변서」를 이송한다. 方一弘 의원 외 21人이 보내온 지방의회 구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런 문장이 있다.
  〈정부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지방의회를 구성할 방침으로 있습니다만, 지방자치제가 국가사회의 민주적인 발전과 지방주민의 복지향상이라는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필요하고도 前提的인 바탕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이상만에 치우쳐 우리의 현실을 무시한 外來제도의 형식적 移植이 그 실효를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예산의 낭비, 부정부패의 조장 및 지방주민 간의 분열 등 많은 폐해만을 남겼던 것이 지난날의 우리 실정이었습니다.>
  朴正熙는 「우리의 현실을 무시한 外來제도의 형식적 移植(이식)」이란 비판을 민주주의를 향해서도 했다. 서구에서 발전한 민주주의를 그대로 후진국의 토양에 옮겨 심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확실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 外來 사상과 제도의 한국적․주체적 變用(변용)이야말로 그가 평생 추구했던(또는 도전했던) 명제였다. 그래서 그의 지시문에는 민주, 자유, 평등, 개혁, 진보 등 관념적 단어가 없다. 그의 18년치 지시문 전부를 읽어도 개혁이란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말을 쓰지 않고도 역사상 최대의 개혁과 진보를 이룩한 것이다. 선동적 말은 역사를 돌릴 수 없고 묵묵한 실천만이 역사를 진전시킬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신기술을 이용하는 순발력
 
  1966년 朴대통령의 친구인 釜山日報 최세경 사장은 일본을 방문해 일본인으로부터 한국의 소채류를 수입할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朴대통령에게 전한다. 朴대통령은 급속냉동건조식품공업을 통해 소채류를 급속냉동시켜 수송하며, 조리하기 위해 냉동된 소채를 다시 해동시키면 냉동 전과 똑같은 신선한 소채가 된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는 4월1일 농림부 장관에게 「소채류 對日 수출」이라는 지시를 내려 釜山日報 최세경 사장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청취하고 검토할 것을 지시한다.
  朴대통령은 『급속냉동건조식품 방식으로 소채류 수출의 길이 개척되면 앞으로 상당량의 소채를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급속냉동건조기법은 그 당시에는 신기술이었다. 朴대통령의 신기술에 대한 이해도와 그를 이용하는 순발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 유지
 
  눈길을 끄는 하나의 지시가 있다. 1966년 4월15일에 「행정간소화」라는 제목으로 하달된 지시인데, 그 내용 가운데 제 3항은 다음과 같다.
  <3. 대통령을 수행하는 비서관은 대통령과 상대방의 대화 내용을 속기하여 비서실에 돌아와서 즉시 속기록을 정리한 후 관계 부처장에게 배포하고 1부는 대통령에게 제출하고 1부는 보관한다는 것을 습성화할 것. 대통령을 수행 시, 이 기록 각서는 늦어도 24시간 이내에, 그 1부를 대통령에게 제출하는 것을 청와대 근무하는 비서관들의 하나의 관례로 삼을 것.
  4. 각 비서관들은 가급적이면 자기 손으로 직접 타자를 찍을 수 있도록 연습을 할 것.>
  흥미롭게도 이즈음부터 타자로 작성된 문서가 등장한다. 이 지시를 통해 朴대통령 자신이 보유한 정보도 관계 장관에게 알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월남전을 보는 朴正熙의 전략 감각
 
  1966년 5월25일 작성된 朴正熙 대통령과 헨리 캐봇 롯지 駐越 미국 대사 사이의 대화 기록(회의 覺書)을 소개한다. 월남전을 보는 朴대통령의 전략 감각을 알 수 있다.
 
  〈회의 각서(Lodge 駐越(주월) 미국 대사 접견)
  각하 : 인사말씀(작년보다 Lodge 대사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말씀)
  Lodge 대사 : 본인은 이번에 각하를 뵙고 1) 월남에 있어서 한국 군대가 큰 공헌을 하고 있는 데 대하여 높은 치하의 말씀을 올리고 동시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2) 존슨 대통령의 따뜻한 인사 말씀을 각하에게 전달하고 3) 아울러 월남 사태에 관하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각하에게 드리고자 함.
  한국은 미국에 대하여 가장 긴밀하고 또한 가장 완전무결한 동맹국가라고 본인은 느끼고 있음. 한국은 어떤 뜻에서는 오히려 미국보다도 더 월남과 긴밀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함. 그래서 각하는 월남 사태를 속속히 들여다보시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미국은 각하의 조언을 필요로 함.
  각하 : Johnson 대통령의 건강은 좋으신지?
  Lodge 대사 : 대단히 좋음. 각하께서 본인의 건강에 대해서도 말씀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함. 월남은 건강에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나 본인도 대단히 좋은 건강 상태에 있음.
  각하 : 신문보도를 보면 월남에서는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서 희생자가 나고 있다는데 월남 사태에 대한 대사의 설명을 듣고 싶음.
  Lodge 대사 : 그와 같은 사태는 다낭시에만 국한되어 있음. 다낭시는 월남 내에서 유일한 장소임. 가장 최근의 소식에 의하면 약간의 희생자가 있었다고 함. 정부군은 다낭 지방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다낭시의 중요한 부분을 대부분 정부가 장악하고 있음.
  종래 이곳은 전적으로 정부 장악 밖에 있었으나 키 首相이 다낭시의 장악을 선언한 후부터는 寺院만 제외하고 거의가 정부 장악하에 있음. 베트콩의 군사 행동은 감퇴되었는데 이것은 베트콩이 내부에 분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 따라서 전방에서는 對베트콩 작전도 완화되고 있고, 한국군․미군․호주군의 작전도 현상 유지하고 있는 형편임.
 
  월남에 분파주의 팽배
 
  각하 : 월남 사태에 대해서는 현지에 가 있는 사령관으로부터 작전에 관한 보고를 받고, 우리 대사로부터는 정치 정세에 관하여 보고를 받고, 가끔 브라운 대사로부터 말을 듣고 있음. 월남에 있어서는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은 몇 가지 방침만 세워서 나가면 수습될 전망이 보일 것으로 생각함.
  Lodge 대사 : 월남은 한국이나 미국과 대단히 다른 점이 있음. 그것은 전통적으로 강한 파벌주의를 말함. 열대지방 국가가 되어서 대단히 덥지만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몇 사람만 모여도 파벌이 형성됨. 이런 점에서 보면은 한국은 훨씬 더 통일된 국가임.
  월남에서는 불교도도 통합이 안 되어서 트리쾅을 중심으로 한 것 이외에 많은 분파가 있음. 그 외에 가톨릭 단체도 있고 중국 사람의 백만장자들도 있고, 같은 불교도들이지만, 캄보디아계도 있음. 불란서 통치하에서는 이와 같은 분파주의가 극도로 조장되었음.
  오늘날 베트콩은 이런 것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있음. 한국군과 미군은 군사적으로 잘 싸우고 있음. 과거에 불란서군은 지하에 있는 요새는 빼앗지 못하였으나, 지금 한국군이나 미군은 이것을 뺏고 있음. 월남은 중국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싫어하지만 이웃끼리 서로 싸우는 수도 있음.
  좌우간 이와 같은 파벌 현상은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음. 월남 사람들은 심지어는 敵을 눈앞에 두고도 서로 분파끼리 싸우는 현상을 볼 수 있음.
  옛날 미국 역사에 있어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13개 식민지가 서로 싸우니까 전부 교수대에 올려서 처형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는데, 월남의 경우가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음.
 
  『불복종 군지휘관은 처단해야』
 
  각하 : 군사작전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성과가 올랐고 호전되어 가고 있는데, 국내 정치 문제가 혼란해서 큰 문제임. 파벌이 강한 것은 중앙 정부가 약하기 때문임. 현재 키 수상보다 더 유능한 지도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기에는 키 수상을 강력히 지지하여 강한 중앙 정부를 만들어서 파벌을 없애는 방법이 강구되어야 함.
  샤프 제독에게도 말하였지만 월남은 군 내부의 숙청을 감행해서 중앙 정부에 반항하는 군벌이 없도록 하여야 된다고 생각함. 정부에 대해서 제일 강력히 반대하는 것이 불교도 단체인데 군대가 중앙 정부에 반항을 안 하면 불교도도 중앙 정부에 대해서 그렇게 반대는 안 하게 될 것임.
  키 수상의 정부는 물론 合憲정부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월남을 통치하고 있고, 또 이것을 대치할 만한 것도 없고 또한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도 없는 실정이니 키 정권을 지지해서 강력히 나가야 함. 키 수상은 민정 이양을 공약하였는데, 그 공약을 실천에 옮기고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지지가 있어야 함.
  군의 장성들이 종교 단체와 야합하여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버릇은 이 시기에 고쳐지지 않으면, 앞으로 민정이양 후에도 문제가 될 것임. 키 수상이 다낭에 있는 1군단에 대해서 중앙 정부군을 투입하여 탄압을 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강력한 조치를 하여서 1군단을 무장 해제시키든지 군법 회의에 회부하여 처단함으로써 뿌리를 뽑아야 함.
  다소 희생이 생기더라도 또는 일부에서 다소 반항이 있더라도 이 시기에 철저히 하여야 한다고 생각함. 미국 정부가 다소의 비난을 듣더라도 강력히 해 주기를 바람. 그 외에는 방법이 없는 실정이니 수습이 잘 되면 역시 그 방법이 좋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임. 총선거 문제는 월남의 현 치안 상태를 보아서 잘 될까 염려도 돼. 그러나 한 가지 좋은 방법도 있을 것 같음. 금년 가을의 총선거가 제헌 국회를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고, 그 제헌 국회에서 헌법을 만들어 이 헌법에 의해서 총 선거가 실시될 것임.
  금년 가을의 선거에서 親共 세력이 못 들어오게 하여 잘 하면 될 것임. 민정 이양 시기도 헌법에 명시하지 말고 헌법 제정 후 어느 시기가 되면 민정 이양을 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현 월남 정부는 신축성을 가질 수 있게 됨. 한국의 현행 헌법의 부칙을 보면 헌법 공포 후 1년 이내에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갖도록 되어 있음. 월남에서도 이 정도의 융통성이 있게 하면 그간 치안 상태 등도 고려해서 할 수 있을 것임.
 
  훌륭한 지도자가 없는 게 월남의 약점
 
  Lodge 대사 : 대단히 큰 참고가 되는 말씀임. 다음 몇 가지를 말씀 드리고자 함.
  1) 월남에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없음. 본인은 월남에서 5기 정권과 일하였지만, 아직까지 한 사람도 훌륭한 정치 지도자로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음. 이 점이 각하에게 특히 말씀드리고자 한 제1의 문제점임.
  2) 월남에는 강력한 정부를 가져본 전통이 없음. 월남에 있어서는 누가 통치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점에 중요한 제2의 문제점이 있음. 모든 일은 지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
  3) 월남에는 다음과 같은 5대 악이 있음. 즉 화재, 홍수, 기근, 도적 및 중앙정부임. 이런 모든 점을 논의하여 보면 자동적으로 키 수상을 지지하는 결론이 나오게 됨. 그는 민정에 경험은 없지만 과거 10개월간 많은 경험을 얻었음. 미국은 키 수상을 지지하는 데 있어서 아주 재치 있게 하여야 함. 그렇게 하여야 월남 국민도 키 수상 정권이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됨.
  4) 총 선거의 전망. 금년 가을에 총 선거를 실시하는 데 있어서는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 그러나 이미 결정은 내려졌음.
  비록 정세는 안정되지 못하였지만, 우리는 크게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임. 월남에는 48개 州와 5개 市가 있다. 1965년 지방 평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결과는 잘 되었음. 월남 인구 중 54%가 중앙 정부 통치하의 안전 구역에 거주. 24%가 베트콩 통치하에 있고, 나머지… 부동적임. 1965년 선거에서는 54% 이상이 투표하였음.
  투표함이 도시에 있기 때문에 위험 구역에 거주하는 농부들도 도시에 나와서 투표를 하였음. 지방 선거에 있어서도 이와 같았으니 더욱이나 이번에는 전 국가적인 일이기 때문에 좀더 잘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
  5) 3대 위험성.
  (1) 베트콩이 투표하는 날에 투표자를 협박할 수 있음.
  (2) 대의원들이 선출된 다음에 베트콩은 그 대의원들을 협박할 수 있음. 그리하여 북부 월맹과 협상하라는 발언을 하게끔 만들 수도 있을 것임. 본인이 보기에는 월남에 있어서의 테러 행위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음.
  예: 가. 다낭시에 미군 해병대가 있었는데 그 병력은 베트콩의 대병력을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 그런데 소위 투쟁위원회는 다낭 시민 하나하나씩 협박을 해서 市 전체를 점령하였음.
  나. 본인 사무실에서 3분만 걸어가면 그 지점에서는 $5.00만 주면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음.
  (3) 한 집단이 가령 51%의 표를 얻는 경우 소수파가 문제가 됨. 월남에서는 소수파에 대한 지지가 막대해서 소수파가 잘 따라오지 않을 것 같음.
  물론 미국의 식민 국가가 아니지만 키 수상은 이번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서 미국 측에 한마디도 상의가 없었음. 본인은 워싱턴에 있었고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호놀룰루에 가 있었음. 키 수상이 사전에 한마디도 본인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고, 또한 대단히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음. 그러나 이것은 키 수상이 능동적으로 일하고 있는 징후라고 보며, 그는 나라 전체의 질서를 재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음. 그래서 키 수상의 이번 조치는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음. 결과적으로 수수방관하는 것보다는 좋았음.
 
  軍閥을 없애야 한다
 
  각하 : 한국 속담에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음. 지금 당장에 딴 사람이 없으니 키 수상을 지원해서 잘 해나가야 함. 총 선거는 공약이니까 그대로 해야 하지만 구성된 국회가 베트콩 또는 親共 일색의 국회가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Lodge 대사 : 투표함이 도시에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투표하지 않고 이번 선거는 보이콧할 것으로 생각됨. 공산주의자들도 입후보는 할 수 있겠으나 지방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 우리는 또한 이 선거를 잘 감시할 것임. 지방에는 美 군사 고문관들이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감시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으며, 만약에 공산당이 무슨 일을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곧 알게 됨.
  브라운 대사 : 중앙 정부는 대부분의 입후보자를 알고 있는지?
  Lodge 대사 : 입후보자들은 대단히 잘 알려진 인물들로서 중앙 정부에 대해서 대단히 협조적인 사람들임.
  각하 : 나는 선거의 결과를 걱정하고 있음. 만약에 잘못되어서 外軍(외군)을 철수시키자는 문제가 국회에서 나오게 되면 골치 아픈 일이 됨. 그 외에 하노이와 협상하자는 이야기가 나와도 마찬가지임.
  Lodge 대사 : 그와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함. 공산주의자들은 절대로 이번 선거를 보이콧할 것이고 투표자는 결국 안전 구역에 거주하는 54%의 인구가 될 것이기 때문임. 이것이 바로 1년 전의 지방 선거에서 나타난 현상이었음. 1개월 전에 사이공에서의 회의에 참석한 60명의 지방 평의원을 만나보았는데, 전부 애국자들이었음. 투표시에 예상되는 협박 행위에 대해서는 군대가 이것을 적절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
  브라운 대사 : 지난번 사이공에 있어서의 시위에서 친공적인 징후가 전혀 없었다는 말씀을 하시기 바람. 朴대통령 각하께서는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심.
  Lodge 대사 : 월남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시위행위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음. 그런데 최근에 사이공市에서의 시위에서는 공산주의의 징후가 조금도 없었음. 물론 일부분 개개적으로는 反美 플래카드도 있기는 하였음. 그 외에는 후에市에서도 反美 방송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외는 별로 없었음. 불란서 치하에서는 불란서에 반항하는 월남 국민이 친공적 경향을 가졌으나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다르다고 봄. 만약에 약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협박에 못 이겨서 하는 것임.
  각하 : 월남에서는 군벌도 없애야 함. 蔣介石 총통이 그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음. 처음에는 지방 군벌도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결국은 그렇지 못해서 지방 군벌 때문에 통치를 못 하게 되었고 결국 후퇴하게 된 것임. 월남에 있어서도 군벌들이 영웅이 되어 있는데 이것을 없애야 함. 한국에서는 6? 동란 전에 이북에서 공산 게릴라가 내려와서 2~3년 동안 혼란하였고, 군부 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침투되어 혼란하였음. 그러나 결국 가혹한 처단을 하여 군부 내에서 좌익을 뿌리 뽑았음. 월남에 있어서도 지금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함.
  Lodge 대사 : 그들은 재판을 받고 처단되었는지?
  각하 : 처단되었음. 경우에 따라서는 법에 의해서 사형도 당했음. 키 수상은 중앙정부의 명령에 반항한 군단장을 해임했는데 이런 경우에는 해임 정도가 아니라 총살하여야 함. 이것은 카오 장군 이야기임.
 
  베트콩은 한국군만 보면 공포 느껴
 
  Lodge 대사 : 절대적으로 옳은 말씀임. 본인은 1929년에 중국에 갔는데 그 당시 중국에는 도처에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음. 그 당시 중국 군벌들은 군사적 권한과 행정적 권한을 다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음. 현재 월남의 4개 군단장은 당시 중국의 군벌과도 같은 존재임. 키 수상은 본인에게 티 장군을 해임하겠다고 말하기에 본인은 증거를 잡고 재판에 회부하라고 말하였음. 그 결과는 각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되었음. 본인은 朴대통령 각하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말씀 드렸음. 이와 같은 이야기는 다른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임. 한국은 월남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솔직히 드릴 수 있는 것임. 티 장군의 경우 그가 군단장으로서 월남 전체의 4분의 1이 되는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그는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間에 그 임명을 전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였음.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다른 데로 갈 데가 없기 때문에 티 장군에 매달리고 있음. 이것을 잘 이용한 것이 트리쾅임. 티 장군과 트리쾅 양자가 합하니까 이러한 일이 생김. 키 수상은 용감하고 애국적이고,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임. 나이가 불과 34세여서 경험 부족이 유일한 결점임.
  각하 : 대사의 말씀대로 미국이 키 수상을 지지하는 데 있어서 요령 있게 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미국이 키 수상을 강력히 민다는 인상을 주어야 함. 키 수상이 넘어가면 아무라도 올라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자연히 군단장들은 야심을 갖게 되는 것임.
  Lodge 대사 : 대단히 옳은 말씀입니다.
  각하: 한 사람을 넘어뜨리면 누가 올라서더라도 미국의 지지를 받는다는 인상을 군단장들에게나 군장성에게 주게 되면 언제나 그런 사태가 반복되는 것임.
  Lodge 대사 : 전적으로 각하 말씀에 동감임. 본인은 이번 워싱턴에서 7일간을 보냈는데, 존슨 대통령과 다섯 번 회의를 가졌음. 하루에 두 번 회의를 가진 때도 있었음. 그 외에 국무장관, 국방부 장관과도 회담하였음. 본인이 朴대통령 각하에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존슨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의 결심에는 추호도 의심할 바가 없다는 것임. 상하 양원의 의원들과도 만났지만 대다수는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하고 있음. 다만 몇몇의 소수인들이 떠들고 있지만,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것임.
  각하 :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을 맞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서 성공하시기를 바라고 있음.
  Lodge 대사 : 각하의 말씀에 깊은 사의를 표함. 월남 사정은 한국이나 미국에 비하여 판이하게 다르지만 두 나라에 대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나라임. 월남에 있어서 본인이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람의 존재임. 한국은 처음에는 의무 부대를 보냈고, 그 다음에는 훌륭한 전투 사단을 파견하였는데, 베트콩은 한국 군대만 보면 공포를 느끼고 있음. 또한 월남 사람들은 한국군을 볼 때에 『한국에서 모든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고 성공하고 온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음. 이러한 일들은 본인이 생각할 때마다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음.
  각하: 금년 여름에 증파될 1개 사단은 여러 가지로 준비를 예정대로 진행하고 있음.
  Lodge 대사 : 자유 세계 전체를 위하여 한국에 朴대통령 각하와 같이 강력하고도 사심 없는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음.〉
  朴대통령은 월남 군부에 軍閥(군벌)이 생겨 국가의 통합성을 저해하고 있는 데 대하여 책임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이 있더라고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는 1948년 여순14연대 반란사건 직후 있었던 한국군內 좌익숙청을 예로 들면서 그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신은 이 肅軍(숙군) 수사 때 체포되어 극형을 받기 직전에 수사지휘자 白善燁(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 구제해 주었던 경험이 있었다.
 
  정부가 책임지고 건설업체를 키우라
 
  1966년 현대건설은 한국 건설업계 최초로 태국에 진출하여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다. 그것은 한국 건설업계의 해외 진출을 알리는 서곡이었으나 그당시에 1970년대의 대대적인 해외진출을 전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입찰은 1965년 7월 초에 이루어졌는데 이를 보고받은 朴대통령은 7월12일 국무총리와 商工․建設․外務 장관에게 「국내 건설업 육성」이라는 지시를 내린다.
  <1. 한국의 건설업계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고 있으며 특히 최근 어떤 국내건설업자는 태국, 馬聯 등에 국제입찰에 진출하리만치 그 실력이 국제수준에 이르고 있다 합니다.
  2. 정부는 모든 힘을 다하여 이러한 건설업자의 국제진출을 지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3. 또 비료공장 등 국내 대 공장 건설에 있어서 비록 외국 건설업자가 그 請負(청부)를 맡았다 하더라도 그 외국업자가 시공 전부를 하는 것보다 성능보장 책임에 관계 없는 부문 공사는 한국의 국제수준에 있는 대 건설업자로 하여금 하청을 맡을 수 있도록 정부는 외국 건설상사와 美 원조당국 등과 적극적 교섭을 해야 할 것입니다.
  4. 국제수준의 실력을 구비한 국내 대 건설업자를 이러한 그 場의 건설에 참여시킴으로써 앞으로 우리 힘으로 工場을 건설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또 자립 경제의 捷徑(첩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5. 원조업자와 외국 건설상사에 대한 적극적 교섭을 지시하는 바입니다.(결과 보고 要)>
  朴대통령은 당시 걸음마 단계였던 국내 건설업계가 한국에 진출한 외국 건설업체의 한국內 공사를 다시 수주함으로써 경험과 실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한국을 원조했던 美 원조당국 및 외국 건설상사의 동의가 필요했다. 朴대통령은 방법을 가르쳐 준 뒤 이에 대해 교섭하고 그 결과를 보고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現代건설의 태국진출」이란 작은 사건이 가진 「큰 의미」를 포착하여 「건설업 육성」이란 정책을 설정한 것은 전형적인 「지도자의 先見力」이다.
 
  무역진흥확대회의는 문제해결의 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말을 朴대통령은 하지 않는다. 무엇을 지시하는지 몰라 장관이나 관료들이 허둥대는 내용은 전혀 없다. 다른 모든 지시들이 그렇지만 다음 지시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지시함으로써 장관이나 관료들이 그의 구상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지 알 수 있다. 1966년 5월26일 제6차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 朴대통령이 지시한 내용이다.
 
  <가. 해외 공관의 수출시장 개척 준비를 제2차 追更(추경)에 총액 10만불까지 증액 책정하되 이번보다 더욱 중점적으로 배정토록 할 것.
  나. 도자기 수출에 대하여 가일층의 노력이 필요하며 요업센터를 중심으로 도자기 수출에 관한 종합 계획을 수립하고 수립 실천토록 할 것.
  다. 요업센터에 필요한 외화는 차관에 의존하지 말고 한국은행 보유 외환을 대여해 주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며 그 상환은 도자기 수출로 획득한 외화로서 충당하도록 할 것.
  라. 대구의 공군 기지창에서 기술자들이 해외로 진출한 결과 기지창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는 바, 특수 중요기술자에 대한 출국 억제를 위하여 급료 인상 및 기타 필요한 조치를 연구토록 할 것임.
  마. 상공부 및 민간 경제단체에서는 중남미 아프리카 등 시장 개척의 여지가 큰 지역으로부터 통상 사절단 내지 민간 사업가를 초청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할 것.
  바. 외국 민간투자에 의한 관광호텔 건립을 추진토록 할 것.
  사.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회사에서 항로 개설을 희망하고 있다는데 그 가능성을 검토해 볼 것.
  아. 구로 등 수출산업 공단에 대하여 2,500만원의 보조금과 4,000만원의 산업은행 융자금을 다음 예산에 반영시키도록 할 것.>
  朴대통령은 이렇다 할 자원도 없고 사람만 많은 한국이 성장할 길은 수출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는 혁명 이후 꾸준히 수출우선정책을 폈고 그 결과 1964년 1억2090만 달러어치를 수출할 수 있었다. 1965년의 목표는 전년보다 40% 증가한 1억7000만 달러였다.
  朴대통령의 방법은 『기회가 있을 때 밀어붙여라』였다. 그는 한번 탄력을 받은 수출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1965년부터 관계 부처와 관계 업계를 망라한 수출확대회의를 매월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 붙인 제목은 월례무역진흥확대회의였는데, 일종의 수출전략회의이고 작전회의였다. 朴대통령은 만사를 제쳐 놓고 이 회의에 참석해 사령관의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회의에서는 항상 수출업자 쪽에 유리한 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이 수출업자 편을 들기 때문이었다. 연로한 기업인들이 『朴대통령 시절에는 기업할 맛이 났고 수출하기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나온 것 같다.
 
  실용정신에 입각한 균형감각
 
  朴正熙 대통령의 언행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특성은 균형감각이다.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실용정신을 기준으로 국정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의 지시에는 항상 현실을 감안한 中庸(중용)의 정신이 엿보인다. 따라서 과격한 용어가 의외로 적다. 예컨대 1966년 10월14일 경제과학심의회의에 대한 대통령 친필 지시문이 그런 경우이다. 문제점을 고치되 어떻게 하면 본질을 훼손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어 있다.
 
  <연구과제
  1. 교포재산 도입
  해외교포의 재산도입은 국가산업 건설에 크게 공헌하게 될 것인 바, 따라서 정부는 교포의 재산반입을 촉구하는 길을 마련하고, 여러 가지 특혜를 조치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일부 경제적 부작용을 難免하였고, 심지어 재산반입의 有害說마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 그렇다 하여 교포재산 반입을 막는다는 것은, 本末顚倒의 소아적 시책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다음 원칙하에 교포재산을 반입하는 구체적 시책방안을 연구 조속히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記
  1. 교포재산 반입을 적극 촉구한다.
  2. 기왕에 있었던, 재산반입의 폐단과 부작용을 배제하는 조치를 취한다.
  3. 필요한 법, 보안규정, 內法 등을 개정 강구한다.
  4. 재외 한국은행에 저금, 입금된 외화의 국내 송금 방안.
  5. 반입재산이란, 외화 물품을 통칭한다.>
 
  朴대통령의 지시문은 2, 3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200자 원고지로 4~7장 분량이 大宗(대종)이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쓸데없는 형용사, 총론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1966년 8월10일 경제과학심의회의에 대한 대통령 친필지시도 짧지만 핵심적이다.
 
  <다음 사항에 대한 연구 있기를 바랍니다.
  1. 부동산 특별과세
  독일을 비롯한 외국의 많은 나라들은, 토지를 買收하였다가, 후에 그 地價가 올라가서 팔게 될 때에는 原買入 가격과 賣渡 가격의 差額(차액)은 물가변동을 불구하고, 전액 특수과세(80~90%)의 대상이 되어, 토지 투자의 경향을 막는다 합니다. 우리 한국에 있어서도 이러한 稅制정책을 씀으로써, 비생산성 투자를 억제할 수 없을 것인가?
  2. 재정안정계획
  정부가 고수하여야 할 재정안정계획이 왕왕 계획대로 가고 있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각 경제위원들은, 본 계획 실시에 대하여, 是正 내지 주의하여야 할 사실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수시로 그 경고건의를 제출해 주기 바랍니다.>
  당시엔 아직 投機(투기)란 말이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여서 朴대통령은 投資(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朴대통령은 쉼표를 適所(적소)에 찍어 읽기를 돕는다. 원래 그는 쉬운 단어를 사용한다. 朴대통령의 지시문은 문장이 짧고, 언어 선택이 쉽고, 정확하다.
 
  절묘한 융통성
 
  <시행연월일 : 1966년 12월2일
  제목 : 수출용 원자재 損耗率(손모율)
  수신 : 상공 재무 법무 감사원 무역협회
 
  수출용 원자재의 로스에 대한 官의 지나친 査察(사찰), 取締(취체), 團束(단속) 등으로 수출업계가 크게 위축되어 있으며 나아가 수출자체의 저하마저 우려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부 방침을 명확히 하달하니, 관계관은 이 방침을 확실히 체득하여, 수출용 원자재의 로스 처리에 반영할 것을 지시하는 바입니다.
  記
  1. 수출 목표를 造成하고 非法的 방법에 의하지 않은 원자재의 로스(인정된 비율)는 그 업자의 기술적 소득으로 인정하고 이를 취체하지 않는다.
  단 수출 목표를 이행하지 않은 악덕업자들의 로스 발생 행위는 이를 철저히 단속한다.
  2. 수출업자에 의한 일체의 사찰, 取締(취체), 단속은 반드시 상공부 장관과 사전 협조하여야 하며 또 상공부 장관의 의견, 판정을 존중하여야 한다.
  본 공문 受領者는 이 방침을 그 麾下(휘하) 직원에게 확실히 인식시키고, 완전히 인식하였다는 旨의 보고를 12월15일까지 제출할 것.>
 
  이 지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시 원자재를 들여온 가공수출업자들은 이를 전량 가공해 수출해야 했다. 수출단가도 그리 높지 못해 수출업자들에게 많은 이윤이 남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원자재의 가공에는 損耗가 있다. 정부가 허용한 손모율이 10%라고 하지만 실제 손모율은 5%일 수 있다. 그렇다면 5%가 실제로는 손모되지 않고 남는데 朴대통령은 이것을 수출업자들이 국내에 유통시켜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경제 발전과 관련해 그가 취하는 절묘한 융통성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속도로를 이렇게 운영하라
 
  1968년 12월17일 朴正熙 대통령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있던 고속도로 관리 방향에 대해 국무총리에게 지시한다.
  <1. 京仁, 京水 간 고속도로가 곧 준공이 되는 바, 다음 몇 가지 고속도로를 갖게 되는 국민으로서의 제반 태세를 갖추지 못할진댄, 그 고속도로는 의의가 없는 「일반 도로」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 사항들과 더불어 고속도로 수용 태세를 빨리 갖출 것을 당부합니다.
  다음
  1. 고속도로상에 일체의 사람, 동물 등 교통 장애물이 없도록 할 것.
  고속도로는 그 속도에 생명이 있는 만큼, 사람이나 기타 장애물로 속도를 제대로 못 내게 되면 「고속도로」도 「일반도로」가 되고 말 것임.
  2. 고속도로 상에 사고 난 차의 긴급 제거 방법, 각종 서비스의 확보책 강구.
  3. 일반 국민, 특히 국민학교를 통한 고속도로에 대한 주의, 계몽 등 고속도로에 대한 철저한 개념 주입.>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결과를 확인한다
 
  朴대통령의 스타일은 지시한 것에 대한 결과 보고를 반드시 받는다는 것이다. 1970년 1월 9일 작성된 비서실 보고서를 보면 朴대통령이 1969년 한 해 동안 연두순시, 지방순시, 지방시찰, 수출진흥확대회의, 월간 경제동향 보고 등에서 지시한 321건에 대한 처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1. 완전 미결 사항은 한 건도 없으며
  2. 69년에 끝나지 않고 70년도에도 계속 추진될 사항 또는 일부분이 미결로 남아 있는 사항이 56건이며
  3. 나머지 265건은 완결되었음>
  또한 1970년 8월7일에 작성된 「각하 지시 55개 사항 추진 현황 보고」에는 이렇게 보고돼 있다.
  <각하께서 지시하신 55개 사항에 대하나 경제비서실 소관 41개 사항의 7월 말 현재 추진 현황을 보고 드립니다.
  1. 지시사항 추진내용 일람표
  2. 지시사항별 진행사항
  참고 : 71년도 예산과 관련된 내용은 예산 사정이 진행 중이므로, 포함시키지 않았음.>
 
  공짜는 없다
 
  朴正熙에게 공짜는 없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사람이라도 국가가 도와줄 때는 공짜로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나 단체는 꼭 무엇을 해야 했다. 朴대통령은 1970년 援護會(원호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원호 대상자들도 자조․자립정신, 즉 국가가 이만큼 도와주는데 자기도 노력해서 빨리 자립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언제까지나 정부에 의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자립․자활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많은 지원을 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되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원호 대상자는 매년 이런 정도의 재원은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관념이 있어 노력하지 않는다.>
  이 지시의 핵심은 국가가 응분의 보상을 하는데 잘하면 더 준다는 것이다. 그 요체는 自立(자립)을 전제로 한 지원이다.
 
  국가 이념의 성취를 위한 교육
 
  1971년 10월15일 朴대통령은 부총리․내무․국방․법무․문교 장관 등에게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衛戍令(위수령) 조치였는데 이것은 당시 교련 반대 등으로 촉발된 데모가 全대학가로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내용을 읽어 보면 당시의 朴대통령이 대학가에 요구하는 요체가 잘 드러나 있다.
 
  <신생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의 潑剌(발랄)한 意氣(의기)와 진취적 기상에 크게 기대되기 때문에 그동안 정부는 일부 대학가에서 벌어진 탈선 행동을 관용과 아량으로 다루어왔고 학원과 학생들 스스로의 자성과 자중을 촉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관대한 조치를 오히려 역이용한 일부 불순학생들 때문에 이제 와서는 학원 사회에 데모사태가 연중행사처럼 되어 버렸고 고질화되어 버린 것을 慨嘆(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昨今(작금) 또다시 대학가에서 술렁거리는 일부 불순학생들의 不學氣風(불학기풍)에 대하여 이를 念慮(염려)하는 많은 학생, 교수 및 학부모들은 학원이 진정 공부할 수 있는 환경과 질서를 되찾도록 해달라는 탄원을 정부에 매일같이 보내오고 있다.
  학원의 질서를 바로잡고 학원에 교수나 학생들이 안심하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차적으로는 학원 자체가 해야 할 일이고 학교 당국의 책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있어서 오늘의 학원은 학원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학원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따라서 정부는 이 이상 이 학원의 무질서를 방치할 수 없으며 일부 불순학생들의 횡포에 강점되고 있는 학원을 그들로부터 되찾아 공부하겠다는 대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겠다는 책임을 새삼 통감하게 되었다.
  국가의 안전과 공공의 安寧秩序(안녕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정부로서 모든 것에 앞서 제일의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이며 또한 권한이다. 따라서 학원의 질서를 회복하고 대다수의 선량한 학생들로 하여금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게 하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정부가 해야 할 고유의 業務(업무)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학원의 질서 확립을 위한 조치를 특명하니 관계 부처는 그 실천에 万遺漏(만유루) 없기를 기하라.
  특명 사항
  1. 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모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라.
  2. 앞으로 학생들의 여하한 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거부 및 수강방해 등 난동행위는 일체 용납할 수 없다. 이러한 행동을 주모한 학생은 전원 학적에서 제적케 하라.
  3. 제적된 자에 대하여는 즉일부터 학생신분상의 모든 특권을 否認하라.
  4. 학술목적을 제외한 각 대학의 모든 「서클」은 곧 해산케 할 것이며 학술 「서클」도 주임 교수가 그 지도와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라.
  5. 대학에서 정당히 인가한 이외의 여하한 신문, 잡지, 기타 간행물로 이를 발간할 수 없다.
  6. 학원의 자유, 자주, 자치는 이를 享有(향유)하기에 앞서 응분의 책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거부 및 수강방해 등으로 학원질서가 파괴된 대학에 대하여는 학원의 자유, 자주, 자치권을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 학교에 대하여는
  가. 모든 학생단체를 해산케 하고 학교당국이 직접 지도 감독케 하라.
  나. 경찰은 그 학원 내에 들어가서라도 조두학생을 색출하여 치안유지에 만전을 기하라.
  7. 군은 필요할 때에는 절차에 따라 문교부, 내무부 및 지방장관의 요청에 협조하라.
  8. 군사교련은 중단될 수 없으며 敎官團(교관단)은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충실한 교련강의에 임하라.
  9. 각 학교의 학칙을 더욱 엄격히 보강케 하여 학교 자체의 질서 확립과 교권 확립을 기하게 하라.>
 
  『자기 나라에 쓸모 없는 인간이 세계를 위해서 공헌했다는 기록은 동서고금을 통해 찾을 수 없다』
 
  朴대통령은 1972년 2월7일 年頭 지방순시 중 경북도청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처럼 큰 比重(비중)을 두고 힘을 기울이고 있는 교육의 기본목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유능하고 성실하며, 국가관과 책임이념이 透徹(투철)한 인간을 양성하는 데 있다』
  朴대통령의 말을 좀더 인용해 보자.
  『지난날 우리 교육은 선량한 민주시민을 양성한다는 막연한 목표를 내세웠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면서도 精神(정신)상태는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분간할 수 없고 국가이념조차 분명치 않은 인간이 되고 마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먼저 훌륭한 한국인이 된 다음에야 선량한 민주시민도 될 수 있고 인류사회에 貢獻(공헌)하는 세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나라에 쓸모없는 인간이 세계를 위해서 공헌했다는 기록은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볼 수 없다. 앞으로 우리 교육의 제일차적인 목표는 훌륭한 대한민국 국민을 길러내는 데 두어야 하겠고, 그것이 또한 우리 교육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하겠다』
  이날 지시에서 朴대통령은 「국가 목표에 맞는 교육」을 강조한다. 몇 부분을 발췌 요약한다.
 
  <(1) 옛 중국 성인의 말에 군자는 時務(시무)를 명백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즉 그 시대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2) 우리 교육의 내용과 방향도 우리 시대의 시대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립되어야겠다. 국력의 배양과 민족의 번영, 그리고 조국의 통일이라는 우리 세대의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고 익혀야 할 기술과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 학교시설을 잘하고 여러 가지 교육기재나 실험․실습 기구를 갖추며 또는 교원의 처우를 개선하고 사기를 높이는 것도 모두 중요하겠지만 교육자들은 우선 자기의 사명을 확고히 인식하고 熱誠(열성)과 정력을 경주해야 하겠다.
  교육자들은 반드시 대학자나 기술가를 길러내는 것만이 훌륭한 교육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인식하고 생산과 직결되는 교육, 소득증대와 국가배양에 이바지하는 인재 교육에 더욱 주력해야 하겠다.
  다. 행동과 의지의 교육
  (1) 言行一致(언행일치)라는 말이 있지만, 배워서 행하는 학문이라야 산 학문이지 배워서 알고는 있으나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2) 교육에 있어서도 막연히 교육의 이념과 목표에 관한 구호나 붙여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이념을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
  (3) 자라나는 후세들을 국가에 필요한 인재로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정신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반드시 매듭을 짓고 끝을 내고야마는 强靭한 의지와 실천력을 길러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 우리 국민성의 큰 缺點(결점)을 들라면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는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뒤에 가서는 흐지부지 결말을 짓지 못하는 점이라고 하겠다.
  5. 국가목표와 일치되는 교육
  가. 愛國愛族(애국애족)하는 인간 창조
  (1) 북괴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굳건한 자주국방 자세의 확립이 요구되는 만큼 학생과 교육자들은 올바른 時局觀(시국관)과 투철한 안보의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2) 애국애족이란 어렵거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 앞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나 구두닦이 소년이 열심히 일하여 저축하는 일 등도 훌륭한 애국이다.
  (3)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향상을 위하여 학생들에게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예의범절을 잘 지키며 친절한 태도를 지니도록 가르칠 것.
  (4) 국가나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시민이 되도록 학생들에게 자조․자립․협동의 정신을 길러 주도록 하고 근면․정직․성실하고 책임감이 왕성하며 애국․애족하는 국민이 되도록 가르치고 지도토록 할 것.>
 
  職務精通
 
  朴대통령은 1972년 1월15일 국방부를 순시하는 자리에서 다음의 논평을 한다. 일부만을 발췌했다.
 
  <과거의 역사를 보더라도 전쟁이라는 것은 반드시 병력의 숫자나 물량이 많은 것만이 절대적인 전승의 요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전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희랍시대에 있었던 스파르타는 역사상 강한 민족이었고 그 나라의 전 국민이 그야말로 강한 전투요원이 되었던 나라였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어느 전사가 출정을 할 때 자기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떠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창이 너무나 짧다고 아마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가진 창이 적의 창보다도 짧다면 적과 싸울 때에는 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찌르면 될 것이 아니냐고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을 과거에 내가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군은 장병을 막론하고 자기가 맡은 임무에 대해서 100% 완수해야 된다는 정신적 자세를 확립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병은 평소부터 자동차에 대한 정비를 잘 하고 모든 기술을 익혀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100% 완수하여야 하며, 어느 부대 앞에 서 있는 보초는 자기가 근무하는 1시간 내지 2시간 동안에 자기가 수행해야 할 보초로서의 모든 임무, 수칙 이런 것을 완전히 알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즉각 보초로서의 자기 임무를 100% 완수할 수 있는 훌륭한 보초가 되어야 하며, 통신병도 통신장비를 100% 정비를 해 가지고 언제든 자기 임무를 100%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자기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1804년이라고 기억합니다만 그때 나폴레옹이 영국을 공격하려고 할 때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불란서 함대를 격파하고 막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영국 제독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넬슨이었는데 그 전투에서 전사를 했습니다. 그 제독이 죽을 때 자기 휘하 장병들에게 한 얘기가 『영국의 모든 해군들은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라』는 그런 말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완수하라. 모든 함대의 함장이나 기관수의 포를 쏘는 포수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면 반드시 이긴다. 트라팔가 해전이 있은 100년 이후 1904년에 소위 日露(일로) 전쟁 때인데 일본 해군과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동해안에서 싸웠는데 그때에도 일본의 연합함대 도고 사령관이 전투가 가장 치열한 순간에 기함에 기를 올려 꽂고 장병에게 격려한 말이 『일층 분려 노력하라』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분려 노력하라는 간단한 얘기였습니다.…>
 
  수치에 밝은 대통령
 
  朴대통령은 수치에 대단히 밝았다. 1972년 연두순시에서 행한 다음의 지시?
  <아직도 농가 소득의 70~80%는 쌀과 보리 등 농업 소득으로 구성되고 있으므로 경지의 제한을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생산성을 높여 쌀과 보리의 증산을 도모하고 소득을 증대해야 한다. 예를 들면 쌀의 畔(반)당 생산량이 전국 평균 325kg인데 벼 집단 재배 단지의 실례를 보면 반당 100kg 늘리는 것은 가능한 것 같다. 만일 100kg을 증수하게 되면 130만 ha에서 130m/t이 증수되어 쌀값을 가마당 7000원으로 계산해도 농가 호당 4만원 이상의 소득증대가 될 수 있으니 생산성 제고에 노력할 것>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朴대통령은 1972년 연두순시에서 노동청을 방문하고 이런 말을 한다. 다음은 속기록으로 작성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직공인데, 그렇다면 그게 상당히 조명시설이 잘 돼 있고, 그 아주 정밀하고도 작은 이런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시력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고, 가보면 저쪽 한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한 가지 간단한 예지만 그런 정도라도 거기에 기업주라든지 거기에 무슨 책임자가 다닐 때 여기는 이런 작업을 하는 어떤 사람한테는 좀더 전기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그 간단한 착안입니다.
  이것을 안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 가보면 직공들이 머리가 또 요즘 히피마냥 이만큼 길게 하고 있는데 「왜 자네 머리 안 깎느냐?」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늦게 일하고 가면 뭐 이발소 가고 할 시간이 없다, 그런 것은 기업주들이 조금만 더하면 그런 사람들한테는 하루에 시간 1시간쯤 정 못하면, 가서 이발하고 오라고 이런 정도로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이발사를 데리고 와서 할 수 있고, 조금 전에 기업주가 사용하는 종업원들이나 직공들이나 이런 사람을 자기 가족같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시켜야 능률이 오르고 생산이 늘고 이러지 그런 정신 안 가진 기업체는 나는 절대 성공 못 한다고 봐요.
  오늘의 기업가들, 기업윤리, 기업정신, 경영개선 등 여러 가지 구호는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도 역시 일은 사람이 하는 거고 종업원들이나 직공들이 하는 건데 그 사람들이 참 그건 자기를 사용하는 고용주가 인간적으로 대우를 해주고, 뭐 할 수 있는 데까지 어느 정도 기업주가 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도 있겠지.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해줄 수는 없겠지만 기업주의 형편으로서는 할 수도 있고 능력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해 주고 성의를 다한다, 이거로써 거기 있는 종업원들도 참 이 공장이 내 공장이다, 내 일이다, 그런 생각 밑에 능률이 오르고 하지 않겠나.
  요즈음 국가 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돼서 과격한 노동쟁의 같은 것은 규제한다, 혹 일부 기업가들은 노동쟁의가 나오기만 하면 정부가 눌러버린다며 문제없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물론 노동자들도 그 어떤 부당한 너무 억지 과격한 노동쟁의 같은 것은 정부가 앞으로 상당히 규제해야 되겠지만 기업주들도 이런 것을 빙자해 가지고 거기에 있는 종업원들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환경의 개선이라든지 또는 노동자 권익 이런 것을 무시한다든지 태만하다든지 이런 것 역시 정부로서는 더 우선해서 철저히 단속해야 될 줄 압니다>
 
  先공업화 後농촌 진흥
 
  1972년 연두순시에서 朴대통령은 공업정책과 농업정책이라는 국가종합발전계획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견지했던 근대화 전략의 큰 틀이 드러난다.
  <인구는 많고 국토는 狹小(협소)하고 천연자원을 많이 갖지 못할 뿐 아니라 농업은 그 규모가 零細(영세)한 우리나라의 여건으로 보아 우선 공업을 육성해서 거기서 생긴 저력과 힘을 가지고 농촌을 부흥시키고 농촌이 부흥해서 농민의 購買力(구매력)이 생기면 다시 이 구매력이 공업을 발전시킨다는 논리에 따라 공업화에 치중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농어촌의 경제력 향상을 위하여도 많은 예산을 농어촌에 투자해 왔으며 특히 금년부터 시작하는 3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는 농어촌에 그 투자의 중점을 두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朴대통령은 농어촌에 대한 투자가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서거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농어촌은 투자 순위에서 밀려났고, 정부는 농어촌 부흥이나 개발이 아니라 청사진이 없이 농어촌 부채를 탕감하는 데 그치고 만다.
 
  밤, 밤, 밤
 
  朴대통령은 有實樹(유실수) 심을 것을 틈날 때마다 지시했다. 그가 지목한 유실수들은 감, 밤, 대추, 호도, 잣 같은 것들로 이것은 오늘날에도 비싸고 쓰임이 많은 과일에 속한다. 1972년 연두순시에서 朴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밤나무를 심을 것을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수치에 밝은 그의 면모는 그대로 드러난다. 일부를 발췌했다.
  <앞으로 約 10年 計劃(계획)으로 가령 1萬 町步(정보)에다 밤나무를 심었을 境遇 5년 만에 밤을 따게 되는데 그 收益性은 大壇히 크다고 본다. 밤은 1헥타르에서 20섬이 나온다고 하는데 같은 面積(면적)의 논에서 생산되는 쌀의 所出과 맞먹는 양이 된다. 가령 밤을 10만 町步 심었을 경우 밤 한 섬을 4만원으로 계산하면 1년에 약 800億(억) 程度(정도)의 수익이 산에서 그것도 지금까지 그냥 놀고 있는 산에서 나오게 되겠다. 이렇게 되면 농민들도 밤나무를 많이 심게 되고 몇 년 안 가서 열리는 밤은 모두 돈이 되어 마을 공동 재산이 되고 농가소득도 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 전부가 산을 잘 관리하게 되고 監視(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가꾸게 되어 산림은 자연히 綠化(녹화)될 것이다.…
  밤이 過剩(과잉) 生産 되면 판매와 유통 면에서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걱정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사과는 貯藏(저장)도 어렵고 과다 생산 되면 販賣問題(판매문제)도 생긴다 그런 면에서 값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밤은 비교적 저장하기 쉽고 판매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으로 생각 한다. 밤이 대량 생산되면 大規模(대규모) 밤 가공 공장을 몇 군데 세워서 粉末(분말)을 만들어 밀가루로 만드는 과자를 질 좋은 밤 과자로 대치할 수도 있고 양식으로도 대용할 수 있어 食糧자급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수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밤 생산국은 우리나라와 이태리 등 몇 군데밖에 없고 일본은 밤이 나지만 잘 되지 않아 시장을 빼앗길 염려도 없다고 본다.…〉
 
  『뭉개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은 도울 수 없다』
 
  1970년 4월22일 旱害(한해) 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朴대통령은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새마을 운동이 탄생하는데, 초기에는 단순한 농가의 소득배가 운동이었지만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부터는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자조․자립․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 운동으로 발전한다.
  朴대통령은 1971년 한 해 동안 새마을 운동의 이념을 구상하고는 1972년 연두 지방순시 중 경북도청에서 발표하는데, 그가 말한 요체는 다음과 같다.
  『우리 농촌이 근대화하느냐 못하느냐의 열쇠는 오로지 농민 스스로의 정신자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농민들이 남보다 더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하고 보다 더 잘살아 보겠다는 자신과 意慾(의욕)을 발휘할 때에 비로소 우리 농촌은 근대화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농민들의 自助정신 自立정신․協同정신이야말로 농촌 근대화의 推進力(추진력)이라고 보고, 이러한 정신을 「새마을 정신」이라고 하겠으며 이 새마을 정신으로 농촌 개발에 헌신하고 있는 농민들의 새로운 노력을 새마을 운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늘 다음의 세 가지를 강조했다.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도 도와준다는 自助精神(자조정신), 스스로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신념으로 일어서는 自立精神(자립정신), 서로 도와 노력하는 協同精神.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민이 연중 5개월을 놀고 땅을 6개월씩이나 놀리면서 잘 살 수 없는 것이다. 언덕 아래 떨어져 있는 사람이 올라오려고 발버둥칠 때 위에서 손만 잡아 주면 올라 갈 수 있지만 뭉개고 주저앉아 있으면 위에서 아무리 끌어올리려 해도 끌어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 농촌에도 농민이 스스로 노력만 하면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으니 앞으로 정부는 농업 기반 조성, 농업기계화 지원, 4대江 개발 또는 농산물 유통 지원과 같은 측면에서의 지원에 중점을 둘 것. …
  정부가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농민은 스스로 무엇을 해야 잘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머리를 쓰는 의욕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 농어촌도 몇 년 안에 잘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정부는 일하는 사람만 돕는다
 
  이제 그는 농촌에도 공짜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같은 지시에서 朴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부분은 요약한 것이다.
  <작년에 전국 3만2000여 개 부락에 대하여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농어민의 奮發心(분발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지원을 해본 결과 좋은 성과를 거둔 부락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부락도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살려 앞으로는 일률적인 지원 방식을 지양하고 우선 금년은 그 대상을 절반으로 줄여 1만6000여 부락에 대하여서만 지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금년에는 작년에 성적이 나쁜 부락은 전부 낙제, 유급을 시키고 성적이 좋은 부락만 올려 이번 2차 년도에 계속 지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금년 1만 6000여 부락 중에서 잘하는 부락을 다시 가을쯤에 심사해서 우수한 부락에 대해서는 내년에 3학년생으로 진급을 시켜야겠습니다.
  그리고 낙제한 부락 중에서 작년에는 성적이 나빴지만 그동안에 분발을 해서 단결이 잘 되고 한번 해보자는 의욕이 왕성한 부락은 다시 선정을 해서 내년에는 2학년생으로 진급을 시켜 금년에 지원한 정도로 지원해 준다, 거기서 또 성적이 나쁘면 낙제를 시키고 좋은 부락은 3학년생으로 진급을 시킨다, 작년에 진급한 3학년생은 다시 심사하여 4학년생으로 진급시켜 대폭적으로 지원을 한다 하는 것이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부 지원의 기본 방침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농어촌을 일률적으로 지원해 본 결과 기대한 만큼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부지런하고 잘하는 부락은 우선적으로 도와주자, 이웃하여 있는 부락이라도 한 부락은 상당한 수준으로 소득이 증대되고 부락환경이 개선되어 살기 좋은 마을이 되는가 하면, 다른 부락은 아주 뒤떨어진 마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노름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고 게으른 그러한 頹廢的(퇴폐적)인 농어촌을, 부지런히 일해서 잘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런 농어촌과 꼭 같이 지원해 준다는 것은 오히려 공평한 처사라 할 수 없습니다. 계속 성장한 부락은 조금만 더 지원해 주면 그 다음에는 정부에서 손을 떼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뒤떨어진 부락들은 불평을 할 것입니다. 잘한 부락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게을러서 뒤떨어진 부락의 불평 소리는 크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평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농촌에도 경쟁 개념을 도입한, 냉정한 대통령으로서의 朴正熙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維新은 왜 했는가
 
  1973년도 지방 연두순시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국정의 방향에 대해서 이런 술회를 했다. 청와대가 그의 육성 지시를 정리한 「1973년 지방 연두순시 지시사항」의 공통사항 부분을 소개한다.
 
  <1. 10월 유신과업수행과 우리의 자세
  가. 10월 유신의 목표와 기본정신
  (1) 10월 유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또 여러 가지 각도로 설명할 수 있지만 10월 유신의 이념과 목표를 한마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가 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보다 더 열심히 일하여,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 나아가서는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데 있다.
  (2) 오늘날 이 지구상에 있는 나라들은 모두가 복지국가건설을 국가개발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나라 중에는 이 목표 달성에 앞선 나라도 있고, 가는 도중에 있는 나라도 있으며, 뒤떨어진 나라도 있다. 우리가 남보다 뒤지지 않고 앞서 나가려면, 남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으며,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배양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그 터전 위에서 평화통일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자는 것이 바로 10월 유신인 것이다.
  (3) 10월 유신은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본다면, 민족의 주체성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5? 혁명과 그 기조를 같이하고 있지만, 5? 혁명보다 그 차원을 한층 더 높여서, 민족주체성에 입각,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0월 유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4)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한다면 과거의 우리 역사, 오늘의 우리 현실과 처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나갈 진로를 올바로 알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알고 미래의 진로를 올바로 안다면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사명의식도 생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명과 과업을 남이 시켜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요, 또 남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깨닫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해 나가는, 즉 우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수행해 나가는 정신과 자세가 바로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인 것이다.
 
  유신과 새마을 정신은 통한다
 
  (5) 10월 유신의 정신은 새마을 정신과 통하는 것이며 새마을 정신은 곧 10월 유신의 기본정신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특히 우리 농민들이 즐겨 부르는 새마을 노래의 가사 중에는 『서로 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이 한 구절에 10월 유신의 정신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서로 도와서」라는 말은 협동이요, 단결이다. 「땀 흘려서 일하고」라는 말은 農家에는 소득 증대요 국가적으로는 생산하고 增産하고 수출해서 저축하여 국가의 소득을 증대한다는 뜻이다.
  「부자마을 만드세」라는 말은 우리 농촌의 마을이 전부 부자마을이 되면, 국가는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
  「살기 좋은 내 나라」는 바로 복지국가요, 복지사회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10월 유신은 곧 새마을 운동이며 새마을 운동은 바로 10월 유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와 그 창조적 발전도 우리 실정에 맞는 생산적인 민주제도를 가꾸어 나가자는 기본정신에서 그와 일치하는 것이다.
  나. 자발적 참여와 솔선수범의 자세
  (1) 지금 우리는 새마을 운동을 한 사람의 방관자나 낙오자도 없이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데 10월 유신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 국민 모두가 범국민적으로 나서서 한 사람도 방관자나 낙오자가 있어서는 안 되겠으며, 모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해야 하겠다.
  (2) 모든 국민들은 보다 더 근면하고, 보다 더 왕성한 自助정신을 발휘하고 보다 더 협동단결하여 과거의 비능률적이고, 비생산적이며 낭비적인 요인들을 제거하여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조직화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몇 사람만 애써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국민들이 일대분발 하여 유신 과업 수행에 적극 참여하고 협력해 나가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3) 특히 나는 민족의 死活과도 직결된 10월 유신과업은 일차적으로 공직을 맡은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에 그 성패가 달렸다고 보고 이제부터 모든 공직자는 막중한 책임과 숭고한 사명을 더욱 절감하고 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가다듬고 유신대열에 앞장서서 솔선수범의 자세를 견지해 나가야 하겠다는 것을 강조해 두는 바이다.>
 
  『불국사 변소 뒤편에 벚꽃나무를 심어라』
 
  朴대통령이 1973년 7월3일 경주 불국사 복원 준공식에 참석해 내린 지시를 보자.
  <6. 경주 불국사 주변 미화 및 정리에 대하여
  가. 불국사 주차장의 1~2호 변소 뒤편에 벚꽃나무를 植栽(식재)하여 미화할 것.
  나. 불국사 신 택지조성지구의 상가점포 신축공사는 기간 내(8월15일까지)에 완공하도록 할 것.
  다. 불국사 경내의 오동나무 열매를 가을에 채취하여 보내도록 할 것.
  7. 불국사로 가는 길 양측에 「입산금지」 간판이 서 있는데 그와 같은 것을, 포항제철에서 경상남도 道界(도계)까지 適所에 더 많이 세우도록 할 것.
  8. 화랑의 집 뒤편 남산에 자생하고 있는 꼬불꼬불하고 클 수 없는 잡목은 제거하고 적합한 樹種으로 대체하도록 할 것.>
  이 대목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대통령이 나무 심는 것까지 간섭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가 전체를 보며 동시에 대단히 세심한 부분까지 본다는 사실이다. 화장실 뒤편에 벚꽃나무를 심으라고 지시한 까닭은 4월에 관광객이 들기 시작하고 4월에 벚꽃이 피기 시작하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상가점포의 완공을 8월15일까지 하라는 것, 「입산금지」 간판을 세우라는 것도 아주 구체적이고 섬세한 지시이다. 8월15일은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니 그 날 개점을 하면 여러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오동나무 열매를 왜 보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다.
 
  옛날 이야기가 아닌 이유
 
  1961년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필리핀 국민소득 1인당 170여 달러, 태국 220여 달러 등. 한국은 76달러이었다. 한국 밑에는 인도만 있었다.
  朴正熙는 그때 등장했다. 그는 쉽고 짧고 간결하고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시를 내리면서, 또한 분명한 이념과 그에 수반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관료들을 독려했고 국민을 이끌었다. 그리고 잘 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朴正熙 대통령 시대에 한국인들은 한마음으로 단결했다.
  나아가야 할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 시대의 한국은 이념과 목표,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보다 더 나아야 할 지금 한국은 서로의 독단과 상충하는 이해 관계들이 충돌하면서 여러 갈래로 찢어져 이념과 방법을 모두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
  이것이,여기에 소개된 朴正熙의 말과 글이 옛날 이야기가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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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리더십 비결/중점주의
 
 
 조갑제
 
 
  ·朴正熙 대통령은 1965년3월10일 그동안 지방시찰을 한 소감을 요약하여 관계 부처에 배포토록 했다. 여기서 그는 행정 운영 방식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피력한다. 특히 행정에 중점적 시책을 선정하여 역량과 자원을 집중하라는 강조는 그의 행동요령을 잘 보여준다. 그가 지도한 고속성장은 전략적 목표와 우선순위를 잘 선택하여 제한된 자원을 그곳에 집중적으로 투입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들에게 자원을 분산시키지 않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들을 선별하여 그 달성에 국력을 총동원한 것이 朴正熙 체제가 가진 효율성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지방시찰종합 소감 및 지시
 
  연두 지방시찰을 끝내고 느낀 종합적 소감과 이에 따른 지시를 다음과 같이 시달하오니 그 시정 및 조치에 유감 없기를 바랍니다.
 
  1. 중점적 시책을 가져라.
  각 지방장관이 열성으로 市·道政에 임하고는 있으나, 무엇을 꼭 해보겠다는 중점시책들이 부각되어 있지 못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바른 시책의 방향과 중점을 갖지 못할 때에는 열성과 노력은 분산된 결과밖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각 지방 장관은 그 지방 행정의 특징을 이룰 만큼 확실한 중점시책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2. 각 지방 장관은 독자적 창의와 신념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한 지방의 행정 장관은 그 지방 행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독자적 창의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입니다. 뚜렷한 개성과 창의가 없는 지방 행정은 결국 앞에 말한 「중점 없는 행정」의 결과와 같습니다.
  「○○ 도지사는 ××에 유명하다」는 여론이 있을 만치 지방장관은 중점을 갖춘 독자적 창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앙의 지침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지침에 불과한 것이며, 그 지침에 너무 구애되어 독자적 창의를 갖지 못한다면 그 지방 행정은 「죽은 행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중앙의 지침과 더불어, 그 지방의 특수 사정에 알 맞는 지방장관의 독자적 창의와 신념만이 지방행정을 빛낼 수 있는 것입니다.
 
  3. 중앙의 더욱 협조된 지침이 있어야 한다.
  어떤 시책의 지침(對지방)은 중앙에서 사전에 협조되고 종합되어 시기에 알맞게 지방에 하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를 들면 「모범 읍면 단위 육성」에 대하여는 중앙의 관계 장관들은 「경제각료회의」와 같이 관계장관회의를 가져 종합적으로 그 지침을 작성하여 하달하고, 그 후에도 이를 계속 지원하는 시책들이 이 회의에서 뒷받침하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지방 행정의 중요 문제점들에 대하여는 「○○에 대한 정부지침」의 형식으로 각부 의견이 종합된 것으로 하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4. 특히 다음 시책들은 각 지방공통의 중요시책들로서, 중앙의 종합적인 일반 지침과 그리고 지방장관의 독자적 창의 발휘로 강력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 主産地 조성
  이미 지시한 바도 있으나 이 사업은 금년도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아 강력히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중앙(농림부 주관)에서 일반적 지침을 작성 하달하고, 각 지방 장관은 그 지방에 알맞은 구체적 계획을 成案하여, 예산, 인력 등의 집중 투입으로서 성과를 올리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모범 邑面 단위 육성
  里洞 단위보다는 읍면 단위로 모범 농촌을 육성해야 하겠다는 것을 지시한 바 있으나 아직 그 추진이 부진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上記 가)항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앙, 지방의 지침, 계획이 필요합니다. 경북도의 육성안을 참고로 하여 강력한 추진 있기를 바랍니다.
 
  다) 중소기업육성
  각 지방장관들이 공통적으로 중소기업 문제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과거 상공부의 지나친 중앙집권적 시책에서 파생한 지방장관들의 만성적 무관심의 탓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번 지방 행정기구의 개편과 상공부의 업무이관 등을 계기로 하여 각 지방장관들은 그 지방의 중소기업 육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집중하기 바랍니다.
 
  라) 저축
  재정안정계획의 성패는 이 저축에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인식해 주기 바랍니다.
  중앙에서는 금년도 전국 저축 목표를 設定하고 이를 지역별, 기능별로 그 책임량을 제시할 것이며, 각 지방장관은 창의, 창안을 다 하여 책임목표액의 달성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중앙, 지방 공히 계획 작성이 긴요)
 
  마) 한일회담 계몽
  한일회담을 왜 추진 중에 있으며, 성공했을 때는 무슨 이익이 있는가를 국민에 대하여 계몽 시키는데 노력이 부족합니다. 일부 반대여론이 있을수록 이 PR 노력은 더욱 중요합니다. 중앙의 종합적 계획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 지방장관들은 그 지방에 대한 계몽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상기 지시들에 대하여 본인은 그 실천상황을 관심을 갖고 주시할 것입니다. 특히 중앙의 지침, 계획은 물론, 각 지방 장관들은 그 지방의 독자적 추진계획이 성안되는 대로 본인에게 직접 보고할 것을 지시합니다.
 

 
 

 

 
 
성공적인 군사 리더십, 실패적인 민간 리더십
 
 
 조갑제
 
  실패해가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리더십을 보면서 생각한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대통령은 군인으로서 익힌 시스템적 리더십을 적용했던 사람들이다. 군인적 리더십의 핵심은 목표 관리이다.
  조직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조직에 지시한다. 지휘관은 이 계획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를 확인, 점검하는 일에 시간을 주로 보낸다. 박정희는 '지시는 그 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조직을 개편하고 계획을 변경하되 목표는 좀처럼 수정하지 않는다. 일단 임무를 완료한 다음은 반성하는 기회를 삼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훈련, 교육, 반복함으로써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조직의 방향과 각인의 임무를 알고 있다. 이런 시스템적 일 처리 방식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데 좋다. 그래서 기업과 행정에서 많이 배워갔다.
  한국에서 민간의 리더십은 무엇을 해내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인격과 아는 것, 쓰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고매한 인격, 결백한 성품, 문장이 기가 막히다, 말을 잘한다 등등이 엘리트의 자격이자 지도력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런 유교적 지도자관과 리더십관은 투쟁하고, 견제하며 비판하고 파괴하며 권력을 잡는 데는 쓰임새가 있으나 무엇을 만들어내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에는 없던 군인적 리더십으로 근대화를 이룩했다면 여기서 장점과 교훈을 찾아야 하며 민간 리더십이 집권한 다음 실패하고 있다면 여기서도 단점과 보완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 시절의 옛말에 '쇠 중에 좋은 쇠는 못으로 만들면 안되고 사람중에 잘 난 사람은 군대로 보내면 안된다'는 말이 있었다. 군대를 천시하고 군복무를 게을리한 탓에 조선이 쇠망하여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을 투철하게 반성한다면 군사문화의 긍정적인 면을 우리 사회가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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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였던 이승만, 박정희
 
 
  두 아들의 추억
 趙甲濟
 
  <아버님은 자연을 몹시도 사랑하셨다. 오후에는 뒤뜰에 나가셔서 화초에 물을 주시고 가꾸시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가꾸시는 솜씨가 전문가 이상으로 능숙하시고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며칠 돌보지 않았더니 시든 잎이 생겼어’ 하시며 몇 개의 화초를 가리키시고 ‘이것들은 우리나라에 없는 화초야. 우리가 갈 때 가져가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일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나는 어른께서 타고 나신 재주가 범상치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때는 아버님을 뫼시고 한국에 돌아갈 계획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어서 저녁때 나는 어머님께 저 화초들을 정말 가져갈 수 있는지를 여쭈어보았다. 그러니까 어머님은 ‘아버님은 좋은 것은 다 한국에 가져간다고 하시는 어른이야’ 하고 웃어넘기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게으른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에 깨달은바 있어 정원의 낙엽과 쓰레기를 치우기는 일 등 내가 할 수 있는 집안의 일들을 열심히 찾아서 하였다.>(李承晩의 양자 이인수 증언)
 
  몇년 전 故朴正熙 대통령의 아들 志晩씨를 만났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생명을 사랑하신 분이셨어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 나무 꽃 강아지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쪽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글이 없더군요"
 
  그 말을 듣고보니 朴正熙 일기가 생각났다. 그의 일기엔 낙엽, 꽃, 나무, 구름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아주 많다.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 같은 것이다. 그의 일기는 권력자의 日記가 아니라 소학생의 日記처럼 순수하다. 너무 꾸밈이 없어 "대통령이란 분의 일기에 깊은 맛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당시 朴대통령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보니 절대적 권력을 잡고도 소학생과 같은 순수한 정신을 유지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순진한 것은 모를 때 이야기이고 순수한 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알고 겪고 나서도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 淸濁을 다 들여마시되 맑은 魂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李 대통령이 쓴 漢詩에도 자연에 대한 묘사가 많다. 건국, 근대화 대통령 두 분은 조국의 풀 한 포기까지 사랑한 사람이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연장선상에서 두 사람은 民族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신약 성경 갈라디아서 5장14절엔 "모든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민족주의자 이승만, 박정희의 생명사랑-민족사랑-나라사랑과 민족사 最惡의 학살자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명말살이 대조된다. 그런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이승만, 박정희를 미워하는 인간들이 죄값을 받지 않는다면 正義가 없다.
 
  朴대통령이 나무에 대해서 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1975년 8월 27일.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기자실에 들렀다. 그곳에 있던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집에 별 일 없지요”라고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은 산림녹화 사업에 관한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전에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산들이 모두 기계충에 걸린 것처럼 흙이 많이 보여서 마음이 삭막했었는데, 요즈음은 모두 푸르게 변해 마음도 시원해요.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입산 금지시키는 것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삼성의 이병철 씨가 용인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입산 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철 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이병철 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산림에 관한 일을 한 총독부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시험해 보니 그게 진리더라고 이병철 씨가 나에게 얘기했어요. 그 후 그 교수를 찾아가서 사의를 표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나에게 지금은 장작을 때지 않으니까 산을 자연 그대로 두고 해충약이나 뿌려 주고 비료를 주면 우리 나라도 산림대국이 될 수 있다고 권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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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식 실용과 이명박식 실용
 
 
  자주적 실용과 타산적 실용의 차이
 趙甲濟
 
  대통령 연설이 現代史를 이끈 말
 
  한국의 現代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1급 文書는 가장 재미없는 문서이기도 하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펴내는 역대 대통령 연설문집이 그것이다. 대통령중심제下에서 대통령의 주요 정책과 결정, 비상조치 같은 것들은 전부가 연설문으로 발표되었다. 이 연설문들은 대체로 딱딱한 형식의 무미건조한 문체로 돼 있으나 대통령의 철학과 인간됨이 직접적으로 담겨 있는 1차 자료이다.
  이 연설문들을 녹음테이프를 통해 직접 들어보면 역대 대통령들의 경륜과 비전뿐 아니라 감정의 기복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의 육성에는 활자가 담을 수 없는 복합적이고 多元的인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이다. 격식이 별로 없는 인터뷰나 선거유세의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면 대통령들의 숨결과 맥박까지도 들리는 듯, 역사 속의 인간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朴正熙의 경우 1960년대의 연설은 패기에 넘치고 도전적인데 1972년 10월17일 유신선포 이후의 연설은 守勢的이며 변명이 많아지고 힘이 빠진 느낌을 준다.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조국근대화, 민족중흥, 공업화, 수출입국, 자주국방, 自立·自主·自助, 민주화, 정의구현, 단임 실천, 신한국건설, 개혁과 司正 같은 말들의 産室은 바로 대통령들의 육성연설이었다.
 
  朴正熙의 정확한 용어선택
 
  기자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복사해온 朴正熙의 연설녹음 테이프를 많이 들었다. 최고회의 의장 시절의 朴正熙 육성 연설이 특히 재미있다. 1961∼63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조국근대화의 여명기이자 경제개발의 시동이 걸린 시기이다(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것이 1962년이다). 44세의 朴正熙소장이 해병대와 공수단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와 정권을 잡은 직후의 목소리답게 격정과 열정을 담은 패기 넘치는 연설이다. 그의 개발전략이 어떤 인간관과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는지를 알려면 이 시기의 연설을 분석해야 한다.
 
  ● 朴正熙의 말은 과장과 수식이 최소화되고 용어 선택이 아주 정확하다. 1963년 10월7일 5代대통령 선거 진주유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게 목발을 두드리던 불우한 농촌청년들이 끌려 나와 나라를 지켰습니다…그들은 그 후 싸우다가 죽어 지금은 저 동작동 국군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유세장 같은 들뜬 분위기에선 그냥 『그들은 지금 저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굳이 「싸우다가 죽어」라고 하여 「농촌청년들 중 전사한 사람들」이 동작동에 묻혀 있다고 정확을 기하고 있다.
  얼렁뚱땅 적당하게 넘어가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정리·정돈된 모습을 좋아했던 그의 면모는 이런 話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그는 연두순시 때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탁자 위에 종이와 볼펜이 직선이나 직각으로 놓여져 있지 않으면 꼭 스스로 바로잡아놓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 3일간 朴正熙의 최고회의 의장 시절 육성연설을 다 듣고 나니 한 마디가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맹글라야 하겠습니다」란 경상도 사투리. 이것은 즉석연설, 선거유세, 기자회견 같이 격식이 덜한 원고 없는 연설·대화에서 등장한다. 기공식, 개통식, 입주식, 준공식 같은 건설현장에서 한 연설이 많고 朴正熙가 국가건설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강조하며 돌아다니던 때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 그의 연설에는 통계수치가 많이 등장한다. 5·16 후 행정에 군대의 기획제도가 도입되면서 심사·분석업무가 정착되고 조직운영이 효율적으로 되어가고 있던 「계획의 시대」였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병출신인 朴正熙는 수치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 연설 내용도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다. 1962년 5월1일 연설 「농민에게 드리는 부탁의 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실질적인 농촌 발전은 환경정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뜰 안이나 집 앞에 습관적으로 버려둔 쓰레기나 우물들은 깨끗이 치워야 할 것이며 짚이나 나뭇가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울타리」와 「담」은 흙과 돌로써 아담하게 새로 쌓아야 할 것이며 마을 앞을 흐르는 계천(溪川)은 양쪽 제방을 돌로 쌓고 잔디를 입히고 나무를 심고…>
 
  국민을 질책한 최후의 대통령
 
  ● 그림을 잘 그렸던 朴正熙는 연설 때 시각적 묘사를 잘 한다. 1963년 10월7일 진주유세 연설에서 6·25 때 정찰기를 타고 국민학교 상공을 날면서 관찰을 하던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는 플라타너스의 모습과 지붕의 색깔까지도 6·25 당시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10월9일 부산 유세에서는 『맑고 푸른 가을하늘, 키 큰 코스모스, 코스모스보다 낮은 주막집, 두 농부, 막걸리…』라고 가을 풍경을 詩的으로 표현했다
  朴正熙는 독도법(讀圖法)에 능통했고 헬기를 타고 국토를 내려다보면서 대사업을 구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지방시찰을 다녀와서는 『꼭 내가 그린 작품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한 적도 있다 朴正熙는 일종의 시각적 기억력(Photo memory)을 같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능력이 그의 장대한 비전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 朴正熙 연설에서는 요즈음의 대중 정치인들로부터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국민들에 대한 요구와 질책이 자주 나온다. 1961년 12월10일 공영주택 입주식 치사에서 그는 주민들에게 『우리가 집을 지었으니 길을 넓히고 포장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주어야 하겠다. 그런 것까지 정부가 해줄 수는 없다』고 自助노력을 요구했다. 1962년 연두사에서도 그는 이렇게 요구했다.
  <하나의 민족이란 영원한 生命體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理想이 있어야 하고 희망과 꿈이 있어야 하며, 시대적인 사회환경(社會環境)을 극복하고 生成發展 해 나갈 생명의 약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타의적(依他的)인 인습과 숙명론적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은 민족의 발육을 장해(障害)하고, 진취 활달한 민족적인 氣象을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1963년 5월2일 황지(黃池)본선철도 개통식에 참석한 朴正熙는 청중들이 국기의례와 애국가 봉창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데 대해 단단히 질책을 한 뒤 『다시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는 대중정치가들처럼 국민을 영합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민중운동가처럼 숭배의 대상으로도 보지 않았으며 교도(敎導)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2년여만에 그만둔 朴正熙는 평생 교사였다.
 
 
  그때는 재미없던 연설이…
 
  ● 朴正熙의 연설은 재미가 적다. 기자는 高2년 재학시절이던1963년 10월9일 부산유세(부산공설운동장)의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朴正熙 대통령 후보의 연설은 한 마디로 「잠 오는 것」이었다. 소년시절 더러 보았던 이른바 舊정치인(민주당·자유당 정객들)의 웃기고 울리던 대중연설에 비하면 더욱 그러했다. 녹음테이프들을 들어보니 그 재미없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선전·선동·과장·우스개의 재주가 없는 朴正熙는 너무 성실하게, 너무 단정하게, 너무 딱딱하게, 너무 선생님처럼 청중들을 가르치려 들고 시키려 들고 따지려 들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너무 진지한 것이다. 진지한 연설에 무슨 재미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들어보니 그때는 못 느꼈던 감동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 진지한 자세가 국가근대화의 집념으로 승화되어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한국을 GNP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그 실적의 증명이 있기 때문이리라. 기차소리 들리는 삭막한 式場에서 그가 절규하다시피 말했던 조국의 미래상은 예언 이상으로 구현되었다. 이는 그가 「무장한 예언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무장한 예언가의 비전은 말장난으로 끝나지만 銃口에서 나온 권력의 뒷받침을 받은 朴正熙의 권력은 국가근대화라는 거대한 비전을 실현하도록 한 유일무이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朴正熙의 육성연설에서는 頂上에 도달한 권력자의 여유나 오만이 느껴지지 않는다. 챔피언의 느긋한 자세라기보다는 도전자의 오기·분노·정의감 같은 것이 스며있는 말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돌파매질을 하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봉건적 잔재, 李朝, 양반, 한민당, 구정치인 尹潽善…. 이 시기 朴正熙의 연설테이프와 1963년 가을에 나온 朴正熙 著 「국가와 혁명과 나」를 함께 읽고 들으면 그의 내면 속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다. 근대화혁명가로서 朴正熙가 가졌던 열정과 꿈을 담고 있는 「국가와 혁명과 나」는 朴相吉씨(前 청와대 대변인·水協 회장)가 대필한 것이지만 朴正熙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한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朴相吉씨는「나와 제3공화국」이란 회고록에서 1963년 가까이서 지켜 본 朴正熙를 이렇게 묘사했다.
 
  悲壯感 속의 憂愁
 
  <1963년 1월 중순 어느 날 최고회의 의장께서 만나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안내하는 대로 지정된 곳까지 따라갔다. 장소는 한남동 중턱의 어느 外人주택이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들어섰다. 朴正熙 의장을 선두로 당시의 실력자 몇 분이 뒤따르고 있었다. 단 둘이 되자 박 의장이 말했다.
  『도무지 틈이 나야지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이것저것 번거로운 말이나 완곡한 표현은 전혀 없고 간결, 소박한 딱 한 마디였다. 얼굴을 쳐다보니 眼光은 바위를 뚫을 듯한데 어딘가 피곤하고 우수가 스쳐 가는 비장감 같은 게 엿보였다. 나는 별로 말을 안 했고 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완전히 믿고 마음 한 구석에 점쳐 있던 어떤 초점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통고해 버리는 식 같기도 했다. 나로서는 바로 내 앞에 국가가 서 있고, 무서운 운명의 주체가 서 있는 듯한 엄숙감과 절대자의 번쩍하는 결심과 단심(丹心)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었다. 며칠 후 박 의장은 밤 열시가 넘어 나 혼자만을 은밀히 불렀다. 이 날 비로소 본론이 나왔다.
  『혁명인가 뭔가 했는데 국민들도 그렇고, 심지어 다리(漢江)를 같이 넘은 자들까지도 정확하게 내 심정을 몰라주니 미국X들도 그렇고…. 접장인가 교수라는 자들도 무얼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만 하고…가슴 속에 있는 생각을 시원하게 정확하게 털어놓을 방법이 없을까요?』
  『…』
  『정치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이놈 말 다르고 저놈 말 다르고 앞으로 그때그때 요긴한 대목에…의견을 좀 말해 주십시오』
  『…』
  『혁명이라고 하지만 헤이따이(兵隊)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도대체 구정치인들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이때 가난을 벗고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벗지 못하면 언제 기회가 있겠느냐?』고도 했고, 『특권층의 당쟁, 세도가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해방이 되고 민주세상이 되었다는 마당에 또 특권층이 설치니 원… 이 나라 백성들은 언제 햇빛을 봅니까?』라고도 하면서 怒氣 띤 안광에 슬픔이 가득 차 있기도 했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입을 꽉 다물면서 지그시 결심했다. 이분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리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이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쇄(忙殺)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같은 담론은 성질상 단 두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였으며 그 같은 기회는 미리 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시로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 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쓴 前後 6개월 이상을 그 분이 마련해 주겠다는 워커힐의 호화로운 별채를 마다하고 남산 밑의 3류 여관인 회현 여관의 6첩 다다미방에서 지냈다. 50장에서 100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 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곤 하였는데 바로 이 前後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처럼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難題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 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이런 중에서 어느 사이 내 스스로도 그분의 일부 의논상대가 되어 버리기는 하였으나, 무엇보다도 그분의 책을 저술함에 있어 최대한 정확을 기하는 데에 기본적인 도움이 되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 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 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민족주의 위에 세워야 할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朴正熙의 主敵은 李朝의 지배계급, 즉 양반이며 그 정치문화를 이어받은 한민당 계열의 舊정치인이요 그들의 당파성이다. 李朝, 李朝의 殘影, 그리고 李朝的인 것을 통틀어 그는 봉건적 잔재라느니 前근대적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제시한 조국근대화 혁명의 핵심은 李朝的인 것, 즉 양반정치 문화의 청산이었다. 朴正熙는 양반정치 문화의 전통이 한민당·자유당·민주당 계열 舊정치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고 규정하고 이들을 가식적·사대적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즉, 양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서 권력쟁취를 위해서 편의상 자유민주주의라는 大義名分을 들고 나왔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박정희가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지적한 양반정치 문화의 병폐는 분열성, 사대성, 부패·무능·독선으로 요약된다.「언(言)으로는 수(首)를 가고 행(行)으로는 말(末)을 차지하면서, 거기다가 시비와 패거리라면 창자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던 이 악유전(惡遺傳)을 우리는 이제 거부할 때도 되지 않았던가」
  朴正熙는 1963년 9월23일 5代 大選 방송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는 법입니다.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강압이다」「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라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인 것입니다. 본인이 가진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그 자세와 조건이 다릅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건전한 민족주의의 바탕 위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朴正熙는 저서와 연설에서 「건전한 민족주의」의 各論을 전개하고 있다. 自立경제, 自助的 태도, 自主정신이 그것인데 自立경제 건설을 이 모든 것의 제1 가는 기본으로 삼고 있다. 즉 국가예산의 52%를 미국원조에 의존하는 나라는 독립국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우선 自立경제를 건설해야 그 뒤에 自主정신도 생기고 자주국방, 복지국가건설, 최종적으로 통일도 가능해진다는 논리이다. 朴正熙가 저서와 연설에서 제시한 이런 우선 순위의 국가발전 전략은 그 뒤 30여 년간 한국에서 실천되었고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 朴正熙는 국가근대화는 정치안정 속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선거유세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李朝的 당파싸움 체질을 강화시킨 인맥 중심의 붕당(朋黨)을 대체할 이념중심의 公黨이 생겨야 정치안정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고 그는 보았다.
 
  봉건과 싸워 戰死
 
  그러나 朴正熙가 조직한 그 公黨은 19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JP 對 反JP 세력으로 분열했다. 동시에 야당은 다시 舊정치인의 朋黨으로 돌아가 朴正熙가 말살하려 했던 양반정치 문화는 되살아났다. 1963년 초의 연설에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그의 좌절과 분노가 처절하게 스며 있다. 자신의 民政불참을 선언한 2·27선서식에서 朴正熙는 『본인은 오늘 혁명 정부가 당초 기도했던 「세대의 교체」라는 정치목표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음을 솔직히 自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고백하면서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서둘러 연설을 끝내고 있다.
  朴正熙가 그 뒤 3·16선언으로 2·27선언에서 약속한 민정불참 약속을 파기한 뒤 자신을 「불행한 군인」으로 부르면서 군복을 벗고 5代 대통령에 뛰어든 번의와 번의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표차 15만6000이라는 힘겨운 승리를 거머쥐었다. 軍政 2년6개월의 업적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朴正熙로서는 15만6000표차의 승리는 섭섭한 것이었다. 그는 前근대적 양반정치 문화의 벽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두터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朴正熙는 尹潽善 후보에 대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사대적으로 맹종하는 가식적 민주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大義명분이 돼 있었고 「한국적 민주주의」니 「민족적 민주주의」니 하는 ‘自主的 변용’을 이단으로 몰아버릴 수 있는 힘을 쌓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한민당-민주당-민정당으로 이어진 야당의 주류는 朴正熙에 의하여 양반 정치 문화의 잔재로 비판받긴 했지만 민주화 정통세력이란 명분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朴正熙가 물리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에도 정치와 언론, 그리고 지식인 사회에서 그는 챔피언이 될 수 없었고 기껏해야 도전자였다. 야당, 또는 양반정치 문화 세력은 항상 强者였고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한국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한반도의 좌익세력도 반(反)朴正熙 전선에 동참했다.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식 민주주의, 당파성과 위선적 명분론에 뿌리내린 전통적 정치문화, 여기에다가 증오의 과학이자 기만과 선동의 기술인 공산주의 이념까지 뒤섞여 비빔밥이 되긴 했지만 바깥으로 발사되는 구호는 민주화로 통일되었다.
  10·26 그날 밤 朴正熙 가슴이 관통당하는 총격을 받고도 『난 괜찮아』라고 했을 때 그는 三面楚歌 상태였다. 그는 북한, 미국, 국내의 민주화 요구 세력으로부터 3面의 포위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 출신인 다나카 메이(田中明)교수(日本拓殖대학)는 『그는 한국의 봉건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말했다.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정치분야에서 勝者는 양반(민주화세력)이고 敗者는 朴正熙였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는 1992년 大選 직전에 쓴 「예외(例外)시대의 종언」이란 논문(「한국정치를 투시한다」란 책에 수록. 吉安社 발행, 1995년)에서 주목할 만한 분석들을 제시했다.
 
  朴正熙 시대는 한국 역사의 예외적 시기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언급해 온 바 있지만, 1961년 朴正熙 장군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와, 그로 말미암아 성립된 군인정권은 한반도의 정치·문화사상 참으로 稀貴한 존재였다. 한국의 역사상에서 군인정권의 전례를 찾아본다면, 700년 전의 고려시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로부터 조선시대 600년 동안 文民우위·武人멸시의 풍조로 일관해 온 것이 한국사회였다. 따라서, 朴正熙 장군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군인이라는 「人種」이 집권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65년, 즉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년 후에, 해방 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나는 당시 일류 지식인으로부터 참으로 놀라운(나로서는) 고백을 들었다.
  「우리들은 군사혁명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정부를 넘어뜨릴 수 있는 무장집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우리들의 시야에 있었던 것은 학생이나 노동자들뿐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사정에 어둡고, 역사적으로 武人정권에 익숙해 있었던 일본인들은 朴正熙 정권이 예외라는 것을 모르고 「통상(通常)의 한국」이라고만 착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눈부신 경제건설을 이룩함으로써 일본인의 착각을 한층 더 북돋웠다. 그만큼 성과를 올린 정권이니 기필코 한국의 체질에 맞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지, 예외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通常」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회에 있어서 「통상」이란, 그 사회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때문에 그 사회의 토양에 가장 알맞은 인간의 존재양식일 것이다. 한국 정치에 있어서 「통상」이란 보수유산층(保守有産層)의 인사들이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면서 벌여 온 권력쟁탈전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연면히 명맥을 유지해 온 한국의 정당은, 공산세력의 진출에 위기감을 느낀 지주·사업가·관료들에 의해서 조직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계열로서, 김영삼씨다 김대중씨도 이 계열 속에서 정치가로서의 기량을 연마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부정하고 도전해 온 공산세력이 모험주의로 치달아, 미군정의 탄압으로 이북으로 도망하고 난 후부터는 부전승자(不戰勝者)로서 한국정치를 독점해 왔다.
  이들은 거의가 왕조시대의 지배층·양반의 가문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며, 으레 전통적인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이 양반이라는 것은 중국의 학예를 습득하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도덕(修己)과 정치(治人)를 두 기둥으로 하는 유교의 학습자였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백성을 敎化하고 지배하는 有자격자라고 굳게 믿어마지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春秋의 筆法을 구사하여 대의명분(이데올로기)을 논함에 있어서는 능하나, 대개의 경우 실용적인 학문에는 어두워 육체를 쓰는 武藝나 노동을 천시했다.
  그들이 풍기는 태연자약한 大人의 풍모에는 동양인의 정신적인 고향을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지만, 그러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과제를 어쩔 수 없이 수행해 나가야만 하는 근대국가의 경영자로서는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조선시대 말기, 일부 志士들이 그런 중세적인 사상 풍속으로부터 벗어나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亡國의 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을 때이며 탈피의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는 조선인에게 근대정치의 훈련장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해방한국의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전통사회로부터 양반들의 작풍과 그 정치감각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양반정치인들은 늘 强者였다
 
  <그들(朴正熙와 그 부하들)을 구시대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가」감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반정치가들의 「나라」와 압도적인 농촌출신자들이 많은 군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교들(박정희 장군을 비롯해서 貧農출신이 많다)의 「나라」와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 양반정치가들은 「나라」라는 것은 인민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자기들의 관장물이라고 생각해온 조상의 피를 이어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자에 대해서는 격렬한 저항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라」를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지도·지배를 받는 일반 백성들은 「나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소유자」인 양반은 하층의 백성들보다 훨씬 애국자(오늘날의 의미에서)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유교라는 초국경적(超國境的)인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이며 모화사상(慕華思想)에 흠뻑 젖어있던 양반의「나라」는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국가보다도 훨씬 상대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韓末의 의병투쟁 때 조상의 忌日이 다가오면 戰場에서 이탈, 황망히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선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현대에서는 60년대의 말엽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유명인사들의 자제가 징병을 기피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던 정부가, 그러한 젊은이들과 부친의 이름을 나란히 해서 신문에 광고 형식으로 발표한 것을 본 적도 있다.
  서양에서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즉 귀족의 의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朴정권은 그러한 종래의 「나라」를 농민들도 「내 나라」라고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근대국민국가로 재편성하려고 했다. 박정희씨는 군인이었지만, 군사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함이 없이 오로지 경제건설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국민에게 안정된 사회를 보장한다. 그렇게만 하면 거기서 얻어지는 안정감이 이번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 상호간의 유대(紐帶)를 형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한국정치를 더듬어 보면, 어떤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전통에 반역해서 「예외」를 지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때까지 야당이나 학생 등 反정부운동 그룹들은 독재자의 가혹한 탄압으로 자기들이 얼마나 학대를 받아왔는가를 정력적으로 호소해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한 정부·여당, 약한 야당’이라는 통념을 구축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체포하고 투옥하는 권력측은 한없이 강해 보인다. 하지만 선거에서 나타나는 정치력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야당도 결코 약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국민들은 「예외」의 정부가 쌓은 성장의 과실은 향수(享受)하면서도, 한국의 토양에 알맞는 야당인들의 언설·행동에는 심정적으로 공명하고 야당에 한 표를 던져왔던 것이다.
  朴정권 성립 이래 실시된 9회의 총선거 중 야당 전체의 득표율이 여당의 득표율보다 밑돈 것은 불과 세 번뿐이었다. 더구나 그 중 두 번은 4.3%, 0.7%라는 미세한 차였다. 따라서 「예외」의 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서 정신없이 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권이 그나마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명사 정당의 고질(痼疾)로서 야당이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과, 「예외」측에 박정희라는 카리스마가 있어서 가까스로 열세를 부축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죽은 뒤엔 어쩔 수 없이 쇠퇴의 길로 들어갔으며, 90년대에는 여당이 김영삼씨를 영입함으로써 政界는 舊야당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게 되었다. 「예외」의 시대는 완전히 끝장이 난 것이다.
  여기서 또 착각이 생겼다. 군인정권이 퇴장하고 「예외」로부터 「통상」으로 추이(推移)하는 과정을 민주 저항의 승리, 즉 민주화의 진전이라고 보는 착각이다. 야당 세력이 민주화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권력에 항의하고 저항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화를 부르짖은 사람이 곧 민주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朴正熙 대통령이 암살 된 후의 서울의 봄(80년)이라고 불린 시기나, 1987년 말의 대통령 선거, 혹은 이듬해 봄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 때―각종 규제가 소멸되고, 민주화 열기로 전국이 들떠 있던 시기―에 어떤 광경이 벌어졌는가를 알고 있다.
  지난날 권력의 폭력을 규탄하고 민주화를 절규하고 있었던 兩金氏의 지지자들이 각목을 휘두르면서 난장판을 벌인다든가, 돌이나 화염병으로 반대파 후보의 연설을 방해하는 등, 폭력 광경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政界 일부의 현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에 「민주세력이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 언어 모순적인 현상을 빚었으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 언론의 자유마저 위협을 받는다는 사태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정치가 「예외」의 시대를 매장해 버리는 「통상」으로 복귀한 것은, 「예외」라는 것을 참아가면서 새나라 건설을 추진해 온 견인차 격인 지도자가 없고, 「통상」과의 갈등에 견디어낼 만한 에너지가 체제측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에너지가 없어지면 한국의 정치토양에 알맞는 「통상」이 부활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다>
 
  朴正熙 18년은 한국 역사상 예외(例外)의 시대
 
  다나카 교수는 全·盧정권을 예외의 시대, 즉 무인(武人)시대로 보지 않고 있다. 이 두 군인출신 지도자는 朴正熙와 같은 논리와 배짱을 갖지 못하고 양반정치 文化에 굴복해 갔기 때문이란 평가이다. 金泳三대통령의 이른바 文民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쓴 이 논문에서 그는 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예외에서 통상으로 복귀했을 때, 즉 한국인의 기질에 알맞는 文民정치가 되돌아오려 할 때 금방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기체질에 맞지 않는 예외의 시대에 건설과 성장이 이루어지고 체질에 맞는 정치가 부활하려 할 때 막다른 골목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다나카씨가 지적한 양반정치, 즉 통상적 한국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는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한일합병의 예를 들어 양반정치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조의 지배엘리트는 임진왜란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국가위기관리에서 똑같은 실수를 그 뒤 세 차례나 되풀이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가져왔다.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통신사의 正使 황윤길(黃允吉)의 전쟁임박론에 대해 副使 金誠一이 전쟁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것은 다분히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의 운명과 관계된 문제에 대한 판단에서도 당파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사람이 어떻게 존경받는 학자로 지금껏 추앙될 수 있는가―이런 분위기가 바로 국가나 국민에 대한 애정 없이 오직 권력투쟁만 해온 양반文化의 전통이 아니겠는가―라고 다나카 교수는 지적했다.
  다나카 교수는 또 金誠一을 옹호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들어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지식인의 풍토를 비판한다.
  <요컨대 선생(김성일)은 군자인(君子人)이고 소인편(小人便)은 아니다. 일본 수신사로서는 적격자이지마는 탐정군(探偵軍)으로는 대부당(大不當)한 것이다. 참으로 왜군이 쳐나올 것을 몰랐다면 탐정군으로서의 자격은 없었던 것이지만 王命을 존봉(尊奉)해서 굴욕은 당하지를 않았으니 수신사로서의 임무는 다하시었던 것이다. 수신사는 최고의 인물을 선견(先遣)하는 것이나 탐정군은 최하의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최고의 인격만이 할 수신사의 임무는 수행하였는데 최하의 인간만이 할 탐정군의 자격은 없다고 해서 충신을 간신으로 폄하(貶下)시키는 자는 탐정군의 편(便)이고, 수신사의 편(便)은 아닌 것이니 그러면 그는 최고의 인물이 아니라 최하의 인물이 아닐까(柳正基,『國譯 학봉전집(鶴峰全集)』해설에서>

 
 
 

 

 
 
文民정부는 양반정치문화로의 복귀
 
  조선조의 양반은 보통인간과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명분론을 정치무기로 삼아 政敵제거 게임을 벌이는 데는 열정을 불태웠으나 자주국방이나 民草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은 약했다. 자주국방에 무관심하니 외교감각도 둔감했다. 망해가는 明에 충성하다가 신흥제국 淸에 두 번이나 국토가 유린당한 뒤에도 또 다시 국제정세를 오판하고 내부분열을 일으켜 韓日합병을 자초했다. 국방과 외교와 경제에 대한 무관심과 反비례한 내부권력투쟁의 격화라는 양반지배층의 본질은 일본에 나라를 내준 뒤에도 제대로 비판받지 않고 온존되었다.
  해방 뒤에는 자유민주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국정치를 주도하다가 6·26남침을 당했으나 이번에도 외국의 힘을 빌어 겨우 國體를 보존했다. 반성이 없는 이 양반정치세력은 朴正熙 18년의 예외적 시대를 견뎌낸 뒤 全, 盧정권하의 과도기를 거쳐 金泳三시대에 와서 만개(滿開)하고 있다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었다.
  文民이란 말은 먹물, 선비, 士, 또는 양반으로 통한다. 金泳三의 소위 문민정부에서 이뤄졌던 학자우대, 역사관논쟁, 옛 중앙청 철거, 군사 문화 비판, 국방·외교정책의 혼란, 더 극렬해진 정치판의 권력투쟁, 관념적 정치구호의 범람. 이런 것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한국의 통상적인 양반정치 文化에 알맞는 정상적 행태라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었다.
  朴正熙는 유교적 관념론에 문제를 제기한 유교적 실용주의, 즉 실학의 실천자였다. 실학의 핵심은 士農工商의 신분제도에서 생산성이 약한 양반계급, 즉 士를 약화시키는 대신 商工을 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商工農士식의 계층서열을 주장하였다. 1962년 5·16기념식에서 그는 「농민, 노동자, 소상인, 기업인, 지식인, 학생」의 순번으로 호칭했다. 朴正熙는 생산계층을 키우면 양반계층이 자연스럽게 약화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소위 문민정부 시절 士를 대표하는 현대의 양반세력인 정치인, 검사, 기자들은 칼자루를 잡고 기업인과 군인들(공교롭게도 구속된 두 대통령은 工高출신이고 구속시킨 현직 대통령은 문리대 출신이다)을 벌벌 떨게 하였다. 한국사회의 생산양식을 주도하고 있는 商工農계층은 그 압도적인 덩치 값을 못하고 있다. 실제의 생산능력에 비해 과잉 대표되고 있는 士와 과소 대표되고 있는 商工계층의 불균형을 어떻게 정상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권력관계에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실용과 이념은 사이 좋게 지내야
 
  朴正熙 이후 처음으로 李明博 대통령이 실용을 강조한다. 李 대통령의 실용은 안보, 法治를 중시하지 않는 경제제일주의이다. 朴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안보를 위한 도구로 보았다. 朴 대통령은 안보第一주의, 경제第二주의식 실용이었다.
  안보중심의 실용주의는 필연적으로 自主的 실용주의로 발전한다. 안보외면의 실용주의는 필연적으로 이기적 타산주의로 전락한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이익은 이념보다 더 중요했다. 李明博 대통령은 이념을 낡은 것이라고 본다. 두 사람이 다 이념을 비판하고 실용을 강조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자주와 안보의 개념이 들어 있는 실용과 경제와 계산만 들어 있는 실용의 차이이다. 국가魂이 들어 있는 실용과 魂이 빠진 실용의 차이이다.
  이념의 지도를 받지 않는 실용은 장돌뱅이의 타산이고, '실용 없는 이념'은 방법론이 없는 언어의 유희이다. 이념과 실용은 함께 가야 한다. 친구가 되어야 한다. 박정희는 국가이익을 세계적 主流 이념 위에 놓았다는 점에서 민족사상 위대한 이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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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3단계 전략: 自助-自立-自主
 박정희의 自主는 진짜이고 노무현의 自主는 가짜인 이유.
 趙甲濟
 
  근대화혁명가 朴正熙의 근대화 전략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세 단어는 自助, 自立, 自主이다.
 
  1963년 8월30일의 轉役式에서 朴正熙는 자주적 주체의식과 자립성을 역설했다.
  『우리는 국민 각자가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自立정신을 확립해야 하겠습니다. 「정치적 自主」와 「경제적 自立」을 성취하고야 말 우리의 목표를 향하여 犯국민적 혁명을 전개시켜야 할 것이며, 번영과 민주공화의 樂土를 기약하는 혁명과업은 국민 전체의 주체성과 자발적 정신자세로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1965년 5원2일 진해 제4비료공장 기공식에서 朴대통령은 自信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께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국민은 확실히 못사는 국민이다. 뒤떨어져 있는 국민이다. 후진국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다른 선진국가에 못지 않게끔 우리도 自力으로써 自立해서 남과 같이 떳떳하게 잘 살 수 있는 그런 국민이 되겠다는 그러한 꿈과 우리의 자신과 그러한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든지 「남한테 원조 받아야 되고, 남한테 동냥을 해야 되고, 남한테 얻어 먹어야 산다」는 그런 「거지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우리는 또 해봐도 안된다 하는 이러한 용기와 자신이 없는 국민이라면, 영원히 우리는 자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63년 9월23일 중앙방송을 통한 政見發表에서 그의 自助와 自立 그리고 민족의식에 대한 생각은 좀더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도 이 연설에서 드러난다.
  『…남들이 그렇게도 좋다는 민주주의, 또 우리가 가져보려고 그렇게도 애쓰던 자유 민주주의가 왜 이 나라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 것인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自主」와 「自立」을 지향한 민족적 이념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꽃피지 않는 법입니다.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自主와 自立의 민족의식을 가진 연후에야 올바른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지난 2년 동안 이 자유와 자립의 민족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무한히 애써왔습니다…. 이번 선거도 사상과 사상을 달리하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더욱 폭 넓게 사상과 사상을 달리하는 세대의 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의 대결입니다』
 
  朴대통령은 1966년 6월8일 駐韓 외국 민간원조단체 연합회 제10차 연차대회에서 한국에 원조활동을 하는 외국인들에게 「도와주는 것은 고맙지만 自助와 自立의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自主 自立의 정신무장이며, 自助 갱생의 생활신조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자세와 생활 태도의 확립 없이는 결코 자립의 영광을 쟁취할 수 없으며, 언제나 남의 도움만을 받아야 하는 빈곤의 멍에를 영영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국민들에게 국민 개개인의 자주 자립정신이야말로 국가발전의 관건이며 의타심과 무기력과 나태심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따라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특히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그 숭고한 봉사원조사업도 우리 정부의 이러한 정책과 보조를 같이하여, 被救護者들로 하여금 여러분의 도움을 헛되이 함이 없이, 스스로 도와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自助·자립사업」으로 직결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국민들이 스스로를 돕는 自助정신이 있어야 自立경제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경제력의 뒷받침 속에서 自主국방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을 할 때 自助의 원칙을 정책 수단으로 이용했다. 마을이 스스로 개혁을 하고 나서 정부에 도움을 청할 때만 받아주었다.
 
  요사이 노무현 대통령은 自主의 대상인 김정일에겐 사대굴종하면서 협력의 대상인 미국을 상대로 온갖 억지를 부리는 것을 가지고 自主라고 거짓말하여 국민들을 속이려 하고 있다. 박정희의 빛나는 自主를 도둑질해와서 쓰레기로 만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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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士兵은 발로, 將校는 머리로, 將軍은 배짱으로"
 
 
  위대한 CEO 朴正熙式 일처리.
 趙甲濟
 
  1955년 박정희의 포병학교장 시절 교육처장이던 오정석 중령(육군준장 예편)이 지금도 기억하는 교장 훈시가 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위관장교는 발로, 영관은 머리로, 장군은 배짱으로 일하는 겁니다. 위관은 항상 사병들과 더불어 먹고 자고 발로 뛰면서 일해야 합니다. 영 관장교는 머리를 짜서 자기 분야에 전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상관에게 A안, B안을 제시한 다음 각각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저는 이런 이유에서 어느 안을 추천합니다'라고 건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관장 교는 전문가적 식견을 갖추어 참모로서 지휘관을 보필할 수 있어야 한다 는 말입니다. 장군은 참모로부터 추천받은 안을 선택하는 결심을 한 다 음 배짱으로 밀고나가는 겁니다. 장군은 관리자이지 기능인이 아닙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엔 교장실에서 참모 브리핑 시간이 있었다. 한 달 쯤 지나면서부터 참모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시간이 되었다. 박정희는 큰소리나 욕설 없이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컨대 油類현황을 참모가 보고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던 박정희는 이렇게 말 한다.
 
  "이봐, 지난 주엔 232드럼 남았다고 했는데 오늘은 추가적인 소모 가 없었는데 왜 212드럼이 됐어? 20드럼은 어떻게 된 거야?".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좋은 박정희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충 넘 어갈수가 없었다. 현황파악이 부실했다고 자인하든지 박정희의 머리를 뛰어넘는 거짓말을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되니 한 달 후부터는 모든 참 모들이 차트를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확인을 하고 기록을 하게 되었 다. 거의 모든 참모들이 이 시간엔 한번씩 수모를 당했지만 수모를 준 교장을 존경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나중에 조국근대화 작업의 행동철학이 되는 박정희식 일처리의 핵심 은 업무의 본질에 구체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포병학교는 논 산훈련소에서 4주간 훈련을 받은 신병들을 포병단 자원으로 받아 4주간 의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운전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운 전교육용 닛산 트럭 15대가 있었다. 어느 날 박교장은 오정석 교육처장 에게 물었다.
 
  "신병들이 여기서 교육받아 나가면 전방에 배치되자마자 포차를 끌어 야하는데 실제로 신병들이 운전교육 때 핸들을 잡는 시간은 얼마나 되오?" "알아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민간 교육장에서는 운전대 잡아보는 시간이 얼마나 되오?".
 
  오중령은 '알 필요 없는 것까지 묻는다'고 생각했는데 곧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 질문임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보니 신병들이 운전대를 잡아보는 시간은 한 시간도 안되는데 민간인은 면허를 받을 때까지 대강 15시간 가량 운전실습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하자 박정희 교장 은 다시 지시했다.
 
  "그러면 민간 차원으로 교육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추가로 필요한 교 육기간, 차량, 유류 소모량, 그리고 예산이 얼마인지 산출해서 보고하시 오.".
 
  오정석 중령은 추가소요를 작성하여 학교장에게 올렸고 박정희는 육 군본부 회의에 참석하여 이를 건의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광주포병학교장 박정희 준장은 1955년4월24일에는 학생대대 중대장 최충렬 대위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학생대장 홍종철(청와대 경호실장, 문공부 장관 역임) 중령이 박교장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졌다.박정희는 주 례사에서 "이북 출신인 최대위가 가정을 가짐으로써 외로움을 덜게 된것 을 축하하며 동료들은 이 가정을 도와주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최충렬 대위에 따르면 박정희 교장은 미군으로부터 받아오는 비상식량 시 레이 션으로 아침식사를 양식으로 만들어 장교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포병학교도 후생사업을 하고 있었다. 부대의 트럭들을 화순의 벌목업자에게 빌려주어 수입을 올렸다. 이 수입을 박정 희 교장은 공개적으로 아주 공정하게 나누었다고 한다. 계급에 따라 차 등이 있는 금액을 봉투에 집어넣어 참모들에게 직접 돌렸다고 한다. 트 럭 임대료를 장작으로 받기도 했다. 박교장은 이 장작을 연병장에 쌓아 놓고는 배분비율을 정해주고 장교들이 월동용으로 가져 가도록 했다.
 
  박정희는 포병학교에서 그 뒤 25년간 동반자가 될 당번병 박환영 일 병과 운전병 이타관 상병을 만났다. 박일병을 뽑아올린 것은행정처 이낙 선(국세청장, 상공부 장관 역임·작고) 소령이었다. 박환영은 '말을 건 네기가 힘들 정도로 무섭게 보이던' 박정희가 알고보니 그렇게 자상하고 따뜻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는 처음 두달 가량 은 "박 병사"라고 부르더니 그 뒤로는 "환영아!"라고 했다. 박정희가 고 향을 물어 "옥천입니다"라고 했더니 "옥천이면 내 장인 알겠네"라고 했 다. 박정희는 "잘 만났다"면서 퇴근 길에 박환영 일병을 데리고 관사로 갔다. 관사는 넓고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다. 응접실과 욕실까지 있 으니 서울 고사북동 시절보다는 한결 좋아진 셈이었다.
 
  육영수와 근혜는 당번병 박환영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뜰에는 서너 그루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래엔 탁구대가 있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일요일엔 탁구를 즐겼다.
 
  박정희는 당번병을 결코 하인처럼 대하지 않았다. 식구처럼 대했다. 최근까지도 신당동의 박정희 사저관리인이었던 박환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아무리 잘못해도 처음 한두 번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세번 째쯤 실수하면 그때는 납득할 만큼 따끔하게 나무라시지요. 저에게는 평 생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그때 '공작'담배를 즐겨 피웠고 커피를 좋아했다. 항상 책 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박환영에 이어 운전병으로 뽑혀 왔다가 10·26 사건 때까지 박정희를 모신 이타관 상병(작고)은 두 사람이 오랫 동안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인간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고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술을 마시러 갈 때도 무작정 기 다리게 하지 않고 '몇 시까지 다시 오라'고 배려해주었다. 이타관, 박환 영 두 사람은 관사의 한 방에서 같이 기거하며 육영수가 해주는 식사를 했다.
  (박정희 傳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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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꾼 朴正熙 의장의 결정적 질문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
 趙甲濟
 
  1970년대 초 과잉생산으로 시멘트가 남아 돌았다. 業界의 호소를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내무장관에게 남은 시멘트와 철근을 인수, 농촌 마을에 나눠주도록 지시하였다. 1년 뒤 그 시멘트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조사하고 보고하는 회의가 열렸다.
 
  어떤 마을은 全주민들이 나눠 가지고 말았다. 어떤 마을은 주민들의 宿願 사업이던 다리를 놓고 우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이런 저런 보고를 다 들은 朴 대통령은 딱 한 마디 논평을 하였다.
 
  "앞으로 잘 하는 마을만 지원하라. 못하는 마을은 自助心이 생길 때까지 지원하지 말라."
 
  이 말이 새마을 운동의 성공을 가져온 지침이 되었다. 잘하는 마을만 지원하니 못하는 마을은 더 분발하였다. 전국의 3만 이상 마을들이 경쟁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軍政시절이던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보고하였다. 다 듣고 나서 朴 의장이 질문하였다.
 
  "그런데 기술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적 측면만 고려하였던 관료들은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한다.
  송정범 차관은 "기술수급계획은 별도로 작성하여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의 과학기술 개발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과학자나 경제관료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점을 지적한 朴正熙의 말 한 마디는 그가 평소에 지녔던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문제의식은 매사를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항상 의문을 갖는 태도이다. "과연 저렇게 될까?" "저렇게 하는 수밖에 없을까?"라는 話頭가 해결책을 만들어낸다. 권력자의 문제의식이 역사를 바꾼다. 李明博 대통령은 南北관계-法治문제에 대하여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