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民정부는 양반정치문화로의 복귀 조선조의 양반은 보통인간과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명분론을 정치무기로 삼아 政敵제거 게임을 벌이는 데는 열정을 불태웠으나 자주국방이나 民草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은 약했다. 자주국방에 무관심하니 외교감각도 둔감했다. 망해가는 明에 충성하다가 신흥제국 淸에 두 번이나 국토가 유린당한 뒤에도 또 다시 국제정세를 오판하고 내부분열을 일으켜 韓日합병을 자초했다. 국방과 외교와 경제에 대한 무관심과 反비례한 내부권력투쟁의 격화라는 양반지배층의 본질은 일본에 나라를 내준 뒤에도 제대로 비판받지 않고 온존되었다. 해방 뒤에는 자유민주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국정치를 주도하다가 6·26남침을 당했으나 이번에도 외국의 힘을 빌어 겨우 國體를 보존했다. 반성이 없는 이 양반정치세력은 朴正熙 18년의 예외적 시대를 견뎌낸 뒤 全, 盧정권하의 과도기를 거쳐 金泳三시대에 와서 만개(滿開)하고 있다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었다. 文民이란 말은 먹물, 선비, 士, 또는 양반으로 통한다. 金泳三의 소위 문민정부에서 이뤄졌던 학자우대, 역사관논쟁, 옛 중앙청 철거, 군사 문화 비판, 국방·외교정책의 혼란, 더 극렬해진 정치판의 권력투쟁, 관념적 정치구호의 범람. 이런 것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한국의 통상적인 양반정치 文化에 알맞는 정상적 행태라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었다. 朴正熙는 유교적 관념론에 문제를 제기한 유교적 실용주의, 즉 실학의 실천자였다. 실학의 핵심은 士農工商의 신분제도에서 생산성이 약한 양반계급, 즉 士를 약화시키는 대신 商工을 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商工農士식의 계층서열을 주장하였다. 1962년 5·16기념식에서 그는 「농민, 노동자, 소상인, 기업인, 지식인, 학생」의 순번으로 호칭했다. 朴正熙는 생산계층을 키우면 양반계층이 자연스럽게 약화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소위 문민정부 시절 士를 대표하는 현대의 양반세력인 정치인, 검사, 기자들은 칼자루를 잡고 기업인과 군인들(공교롭게도 구속된 두 대통령은 工高출신이고 구속시킨 현직 대통령은 문리대 출신이다)을 벌벌 떨게 하였다. 한국사회의 생산양식을 주도하고 있는 商工農계층은 그 압도적인 덩치 값을 못하고 있다. 실제의 생산능력에 비해 과잉 대표되고 있는 士와 과소 대표되고 있는 商工계층의 불균형을 어떻게 정상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권력관계에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실용과 이념은 사이 좋게 지내야 朴正熙 이후 처음으로 李明博 대통령이 실용을 강조한다. 李 대통령의 실용은 안보, 法治를 중시하지 않는 경제제일주의이다. 朴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안보를 위한 도구로 보았다. 朴 대통령은 안보第一주의, 경제第二주의식 실용이었다. 안보중심의 실용주의는 필연적으로 自主的 실용주의로 발전한다. 안보외면의 실용주의는 필연적으로 이기적 타산주의로 전락한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이익은 이념보다 더 중요했다. 李明博 대통령은 이념을 낡은 것이라고 본다. 두 사람이 다 이념을 비판하고 실용을 강조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자주와 안보의 개념이 들어 있는 실용과 경제와 계산만 들어 있는 실용의 차이이다. 국가魂이 들어 있는 실용과 魂이 빠진 실용의 차이이다. 이념의 지도를 받지 않는 실용은 장돌뱅이의 타산이고, '실용 없는 이념'은 방법론이 없는 언어의 유희이다. 이념과 실용은 함께 가야 한다. 친구가 되어야 한다. 박정희는 국가이익을 세계적 主流 이념 위에 놓았다는 점에서 민족사상 위대한 이단자였다. ,,,,,,,,,,,,,,,,,,,,,,,,,,,,,,,,,,,,,,,,,,,,,,,,,,,,,,,,,,,,,,,,,,,, 박정희의 3단계 전략: 自助-自立-自主 박정희의 自主는 진짜이고 노무현의 自主는 가짜인 이유. 趙甲濟 근대화혁명가 朴正熙의 근대화 전략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세 단어는 自助, 自立, 自主이다. 1963년 8월30일의 轉役式에서 朴正熙는 자주적 주체의식과 자립성을 역설했다. 『우리는 국민 각자가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自立정신을 확립해야 하겠습니다. 「정치적 自主」와 「경제적 自立」을 성취하고야 말 우리의 목표를 향하여 犯국민적 혁명을 전개시켜야 할 것이며, 번영과 민주공화의 樂土를 기약하는 혁명과업은 국민 전체의 주체성과 자발적 정신자세로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1965년 5원2일 진해 제4비료공장 기공식에서 朴대통령은 自信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께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국민은 확실히 못사는 국민이다. 뒤떨어져 있는 국민이다. 후진국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다른 선진국가에 못지 않게끔 우리도 自力으로써 自立해서 남과 같이 떳떳하게 잘 살 수 있는 그런 국민이 되겠다는 그러한 꿈과 우리의 자신과 그러한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든지 「남한테 원조 받아야 되고, 남한테 동냥을 해야 되고, 남한테 얻어 먹어야 산다」는 그런 「거지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우리는 또 해봐도 안된다 하는 이러한 용기와 자신이 없는 국민이라면, 영원히 우리는 자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63년 9월23일 중앙방송을 통한 政見發表에서 그의 自助와 自立 그리고 민족의식에 대한 생각은 좀더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도 이 연설에서 드러난다. 『…남들이 그렇게도 좋다는 민주주의, 또 우리가 가져보려고 그렇게도 애쓰던 자유 민주주의가 왜 이 나라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 것인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自主」와 「自立」을 지향한 민족적 이념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꽃피지 않는 법입니다.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自主와 自立의 민족의식을 가진 연후에야 올바른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지난 2년 동안 이 자유와 자립의 민족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무한히 애써왔습니다…. 이번 선거도 사상과 사상을 달리하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더욱 폭 넓게 사상과 사상을 달리하는 세대의 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의 대결입니다』 朴대통령은 1966년 6월8일 駐韓 외국 민간원조단체 연합회 제10차 연차대회에서 한국에 원조활동을 하는 외국인들에게 「도와주는 것은 고맙지만 自助와 自立의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自主 自立의 정신무장이며, 自助 갱생의 생활신조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자세와 생활 태도의 확립 없이는 결코 자립의 영광을 쟁취할 수 없으며, 언제나 남의 도움만을 받아야 하는 빈곤의 멍에를 영영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국민들에게 국민 개개인의 자주 자립정신이야말로 국가발전의 관건이며 의타심과 무기력과 나태심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따라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특히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그 숭고한 봉사원조사업도 우리 정부의 이러한 정책과 보조를 같이하여, 被救護者들로 하여금 여러분의 도움을 헛되이 함이 없이, 스스로 도와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自助·자립사업」으로 직결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국민들이 스스로를 돕는 自助정신이 있어야 自立경제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경제력의 뒷받침 속에서 自主국방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을 할 때 自助의 원칙을 정책 수단으로 이용했다. 마을이 스스로 개혁을 하고 나서 정부에 도움을 청할 때만 받아주었다. 요사이 노무현 대통령은 自主의 대상인 김정일에겐 사대굴종하면서 협력의 대상인 미국을 상대로 온갖 억지를 부리는 것을 가지고 自主라고 거짓말하여 국민들을 속이려 하고 있다. 박정희의 빛나는 自主를 도둑질해와서 쓰레기로 만든 셈이다. ,,,,,,,,,,,,,,,,,,,,,,,,,,,,,,,,,,,,,,,,,,,,,,,,,,,,,,,,,,,,,,,,,, "士兵은 발로, 將校는 머리로, 將軍은 배짱으로" 위대한 CEO 朴正熙式 일처리. 趙甲濟 1955년 박정희의 포병학교장 시절 교육처장이던 오정석 중령(육군준장 예편)이 지금도 기억하는 교장 훈시가 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위관장교는 발로, 영관은 머리로, 장군은 배짱으로 일하는 겁니다. 위관은 항상 사병들과 더불어 먹고 자고 발로 뛰면서 일해야 합니다. 영 관장교는 머리를 짜서 자기 분야에 전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상관에게 A안, B안을 제시한 다음 각각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저는 이런 이유에서 어느 안을 추천합니다'라고 건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관장 교는 전문가적 식견을 갖추어 참모로서 지휘관을 보필할 수 있어야 한다 는 말입니다. 장군은 참모로부터 추천받은 안을 선택하는 결심을 한 다 음 배짱으로 밀고나가는 겁니다. 장군은 관리자이지 기능인이 아닙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엔 교장실에서 참모 브리핑 시간이 있었다. 한 달 쯤 지나면서부터 참모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시간이 되었다. 박정희는 큰소리나 욕설 없이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컨대 油類현황을 참모가 보고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던 박정희는 이렇게 말 한다. "이봐, 지난 주엔 232드럼 남았다고 했는데 오늘은 추가적인 소모 가 없었는데 왜 212드럼이 됐어? 20드럼은 어떻게 된 거야?".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좋은 박정희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충 넘 어갈수가 없었다. 현황파악이 부실했다고 자인하든지 박정희의 머리를 뛰어넘는 거짓말을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되니 한 달 후부터는 모든 참 모들이 차트를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확인을 하고 기록을 하게 되었 다. 거의 모든 참모들이 이 시간엔 한번씩 수모를 당했지만 수모를 준 교장을 존경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나중에 조국근대화 작업의 행동철학이 되는 박정희식 일처리의 핵심 은 업무의 본질에 구체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포병학교는 논 산훈련소에서 4주간 훈련을 받은 신병들을 포병단 자원으로 받아 4주간 의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운전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운 전교육용 닛산 트럭 15대가 있었다. 어느 날 박교장은 오정석 교육처장 에게 물었다. "신병들이 여기서 교육받아 나가면 전방에 배치되자마자 포차를 끌어 야하는데 실제로 신병들이 운전교육 때 핸들을 잡는 시간은 얼마나 되오?" "알아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민간 교육장에서는 운전대 잡아보는 시간이 얼마나 되오?". 오중령은 '알 필요 없는 것까지 묻는다'고 생각했는데 곧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 질문임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보니 신병들이 운전대를 잡아보는 시간은 한 시간도 안되는데 민간인은 면허를 받을 때까지 대강 15시간 가량 운전실습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하자 박정희 교장 은 다시 지시했다. "그러면 민간 차원으로 교육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추가로 필요한 교 육기간, 차량, 유류 소모량, 그리고 예산이 얼마인지 산출해서 보고하시 오.". 오정석 중령은 추가소요를 작성하여 학교장에게 올렸고 박정희는 육 군본부 회의에 참석하여 이를 건의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광주포병학교장 박정희 준장은 1955년4월24일에는 학생대대 중대장 최충렬 대위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학생대장 홍종철(청와대 경호실장, 문공부 장관 역임) 중령이 박교장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졌다.박정희는 주 례사에서 "이북 출신인 최대위가 가정을 가짐으로써 외로움을 덜게 된것 을 축하하며 동료들은 이 가정을 도와주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최충렬 대위에 따르면 박정희 교장은 미군으로부터 받아오는 비상식량 시 레이 션으로 아침식사를 양식으로 만들어 장교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포병학교도 후생사업을 하고 있었다. 부대의 트럭들을 화순의 벌목업자에게 빌려주어 수입을 올렸다. 이 수입을 박정 희 교장은 공개적으로 아주 공정하게 나누었다고 한다. 계급에 따라 차 등이 있는 금액을 봉투에 집어넣어 참모들에게 직접 돌렸다고 한다. 트 럭 임대료를 장작으로 받기도 했다. 박교장은 이 장작을 연병장에 쌓아 놓고는 배분비율을 정해주고 장교들이 월동용으로 가져 가도록 했다. 박정희는 포병학교에서 그 뒤 25년간 동반자가 될 당번병 박환영 일 병과 운전병 이타관 상병을 만났다. 박일병을 뽑아올린 것은행정처 이낙 선(국세청장, 상공부 장관 역임·작고) 소령이었다. 박환영은 '말을 건 네기가 힘들 정도로 무섭게 보이던' 박정희가 알고보니 그렇게 자상하고 따뜻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는 처음 두달 가량 은 "박 병사"라고 부르더니 그 뒤로는 "환영아!"라고 했다. 박정희가 고 향을 물어 "옥천입니다"라고 했더니 "옥천이면 내 장인 알겠네"라고 했 다. 박정희는 "잘 만났다"면서 퇴근 길에 박환영 일병을 데리고 관사로 갔다. 관사는 넓고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다. 응접실과 욕실까지 있 으니 서울 고사북동 시절보다는 한결 좋아진 셈이었다. 육영수와 근혜는 당번병 박환영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뜰에는 서너 그루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래엔 탁구대가 있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일요일엔 탁구를 즐겼다. 박정희는 당번병을 결코 하인처럼 대하지 않았다. 식구처럼 대했다. 최근까지도 신당동의 박정희 사저관리인이었던 박환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아무리 잘못해도 처음 한두 번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세번 째쯤 실수하면 그때는 납득할 만큼 따끔하게 나무라시지요. 저에게는 평 생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그때 '공작'담배를 즐겨 피웠고 커피를 좋아했다. 항상 책 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박환영에 이어 운전병으로 뽑혀 왔다가 10·26 사건 때까지 박정희를 모신 이타관 상병(작고)은 두 사람이 오랫 동안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인간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고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술을 마시러 갈 때도 무작정 기 다리게 하지 않고 '몇 시까지 다시 오라'고 배려해주었다. 이타관, 박환 영 두 사람은 관사의 한 방에서 같이 기거하며 육영수가 해주는 식사를 했다. (박정희 傳記에서) ,,,,,,,,,,,,,,,,,,,,,,,,,,,,,,,,,,,,,,,,,,,,,,,,,,,,,,,,,,,,,,,,, 역사를 바꾼 朴正熙 의장의 결정적 질문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 趙甲濟 1970년대 초 과잉생산으로 시멘트가 남아 돌았다. 業界의 호소를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내무장관에게 남은 시멘트와 철근을 인수, 농촌 마을에 나눠주도록 지시하였다. 1년 뒤 그 시멘트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조사하고 보고하는 회의가 열렸다. 어떤 마을은 全주민들이 나눠 가지고 말았다. 어떤 마을은 주민들의 宿願 사업이던 다리를 놓고 우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이런 저런 보고를 다 들은 朴 대통령은 딱 한 마디 논평을 하였다. "앞으로 잘 하는 마을만 지원하라. 못하는 마을은 自助心이 생길 때까지 지원하지 말라." 이 말이 새마을 운동의 성공을 가져온 지침이 되었다. 잘하는 마을만 지원하니 못하는 마을은 더 분발하였다. 전국의 3만 이상 마을들이 경쟁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軍政시절이던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보고하였다. 다 듣고 나서 朴 의장이 질문하였다. "그런데 기술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적 측면만 고려하였던 관료들은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한다. 송정범 차관은 "기술수급계획은 별도로 작성하여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의 과학기술 개발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과학자나 경제관료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점을 지적한 朴正熙의 말 한 마디는 그가 평소에 지녔던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문제의식은 매사를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항상 의문을 갖는 태도이다. "과연 저렇게 될까?" "저렇게 하는 수밖에 없을까?"라는 話頭가 해결책을 만들어낸다. 권력자의 문제의식이 역사를 바꾼다. 李明博 대통령은 南北관계-法治문제에 대하여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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