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김종필은, 장도영 의장이 동향인 인천지구 첩보대장 출신인 金日煥(김일환) 예비역 대령을 정보부장으로 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며칠 뒤, 즉 5월 말 김종필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장도영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빨리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재촉했고, 자신이 직접 장 의장을 찾아가 설명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받아온 결재 서류를 들고 온 김종필은 최영택 등 창설 요원들과 앉아 주요 인사를 결정했다. 부장 자리엔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고 행정관리차장에 이영근, 기획운영차장에 서정순, 총무국장에 강창진, 해외 담당 제2국장에 석정선, 수사 담당 제3국장에 고제훈, 교육 담당 제5국장에 최영택, 통신실장에 김태진, 비서실장에 金奉成(김봉성), 고문에 신직수(법률담당)─장태화(정치담당)─김용태(경제담당)이었다. 완전히 김종필 인맥으로 구성된 중앙정보부는 군정 기간에 박정희 의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뢰를 받으면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여 정권을 안정시키고 군정 이후를 내다본 새로운 정부와 정당을 연구하고 조직하는 산파가 된다. 6월10일에 공포된 중앙정보부법은 全文(전문)이 9조로 된 아주 짧은 법안이었으나
엄청난 권한을 담고 있었다. 정보부의 기능은 ‘국가 안전 보장과 관계되는 국내외 정보 사항 및 범죄 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의 정보 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한다.’ 부장과 차장은 최고회의의 동의를 얻어 의장이 임명한다. 전국에 지부를 두며
직원은 부장이 임명한다. 정보부는 소관 업무에 관한 수사를 할 때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중앙정보부의 직원은 그 업무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 국가 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법안이 공포되기 전에 중앙정보부는 이미 기능을 시작한 상태였다. 최영택의 기억으로는 정보부에 최초로 보고해 온 곳은 치안국이었다고 한다. 치안국장은 육군 헌병감으로서 정군 운동을 주동한 김종필,
석정선을 강제 예편시킨 조흥만 준장이었다. 최영택이 김종필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흥만이는 자네 옷을 벗긴 사람이잖아. 왜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어?” “이봐, 과도기에는 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성이 더 중요해. 이런 사람이 충성은 더 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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