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띄운 편지 1961년 6월3일의 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에 대한 <매일신문(대구)> 정경원 기자의 인터뷰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기자=그런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을 장 정권이 몰랐단 말입니까. 박정희=천만에, 경찰은 이미 사건을 인지했지만 압력에 눌려 흐지부지해 버렸다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니오? 여북하면
미국에 가 있는 최경록 장군 같은 분은 재미 유학생들이 그곳에서 영주하려 한다고 전해 왔겠소? 기자=박 장군의 가정환경을 좀…. 박정희=신당동에 집 한 칸 있는데 처하고 열 살, 일곱 살 나는 기집애 둘, 네 살짜리 머슴애 하나뿐입니다. 재혼해서 모다 어리지요, 허(박 장군은 처음으로 웃었다). 기자=군사혁명 전후의 사정을 이야기해 줄 수 없습니까? 박정희=다 지나간 얘기인데 참가 부대는 다 알 거요. 알려 달라고? 30사단, 33사단, 공수전투대, 해병제1여단, 6군단 포병…. 서울서 행동한 주류 부대는 이 정도고 이밖에 대구, 부산, 광주, 논산훈련소, 청주(37사단) 등 후방부대와 일부 야전군 사단에서도
호응을 약속했습니다. 최초의 계획은 작년 12월부터지요. 그땐 영관급 장교들이 열렬했고 2군 참모장이던 이주일 장군의
협력도 많이 받았지요. 기자=도중에 정보가 새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박정희=일부 정보가 새어서 초조할 때도 있었지만 나 자신은 군사혁명을 결심했을 때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소. 물론 우리 동지들은 이번 거사에서 만일 배신한 자가 있으면 극형에 처하도록 서약했었소.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실패했더라도 후회는
안 했을 거요. 내 뒤를 이어 제2, 제3의 혁명은 당연히 豫期(예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기자=정보는 왜 새었습니까? 박정희=글쎄 한 놈이 배신했기 때문에 약간 당황했지만 미군 계통은 장도영 중장이 잘 커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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