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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2) “군사혁명을 결심했을 때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淸山에 2011. 3. 29. 14:35
 

 

 
 
“군사혁명을 결심했을 때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2)/ 朴正熙, 매일신문(대구)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실패했더라도
후회는 안 했을 거요. 내 뒤를 이어 제2, 제3의 혁명은 당연히 豫期할 수 있었으니까요.”
趙甲濟    
 

 
 

 

 
 
고향으로 띄운 편지
 
 1961년 6월3일의 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에 대한 <매일신문(대구)> 정경원 기자의 인터뷰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기자=그런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을 장 정권이 몰랐단 말입니까.
 
 박정희=천만에, 경찰은 이미 사건을 인지했지만 압력에 눌려 흐지부지해 버렸다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니오? 여북하면
미국에 가 있는 최경록 장군 같은 분은 재미 유학생들이 그곳에서 영주하려 한다고 전해 왔겠소?
 
 기자=박 장군의 가정환경을 좀….
 
 박정희=신당동에 집 한 칸 있는데 처하고 열 살, 일곱 살 나는 기집애 둘, 네 살짜리 머슴애 하나뿐입니다. 재혼해서 모다 어리지요, 허(박 장군은 처음으로 웃었다).
 
 기자=군사혁명 전후의 사정을 이야기해 줄 수 없습니까?
 
 박정희=다 지나간 얘기인데 참가 부대는 다 알 거요. 알려 달라고? 30사단, 33사단, 공수전투대, 해병제1여단, 6군단 포병…. 서울서 행동한 주류 부대는 이 정도고 이밖에 대구, 부산, 광주, 논산훈련소, 청주(37사단) 등 후방부대와 일부 야전군 사단에서도
호응을 약속했습니다. 최초의 계획은 작년 12월부터지요. 그땐 영관급 장교들이 열렬했고 2군 참모장이던 이주일 장군의
협력도 많이 받았지요.
 
 기자=도중에 정보가 새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박정희=일부 정보가 새어서 초조할 때도 있었지만 나 자신은 군사혁명을 결심했을 때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소. 물론 우리 동지들은 이번 거사에서 만일 배신한 자가 있으면 극형에 처하도록 서약했었소.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실패했더라도 후회는
안 했을 거요. 내 뒤를 이어 제2, 제3의 혁명은 당연히 豫期(예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기자=정보는 왜 새었습니까?
 
 박정희=글쎄 한 놈이 배신했기 때문에 약간 당황했지만 미군 계통은 장도영 중장이 잘 커버했지요. 
 

 
 

 

 
 
 기자=아슬아슬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박정희=12일의 거사 계획이 정보 누설로 실패하고 13일 全(전) 혁명군에 16일 오전 3시에 행동하도록 지시를 완료했소. 사실은 정보가 새었기 때문에 예정보다 1시간 늦었고 한강에서는 헌병들과 본의 아닌 교전까지 있었지요. 예정대로 됐다면 장면이도 장관들도 모조리 내 손으로 잡아넣는 건데…그때 지휘 위치가 어디냐고요? 6관구 사령부였소.
 
 기자=박 장군이 가진 신조는?
 
 박정희=나는 군인이니까 국가에 충실하게 봉사하겠다는 일념뿐이지요. 아무리 썩고 혼탁한 세상이지만 올바르게 살아보겠다는 신념은 굽히지 않았지요.
 
 기자=실례가 되면 양해해 주십시오. 항간에선 박 장군을 아주 냉혹한 군인으로 알고 있는데….
 
 박정희=허, 그건 너무한데요. 사귀어 보이소.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하기야 나는 5·16 전에 많은 사회단체와 사회인들과 접촉해 보았지만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거의 도둑질, 협박 같은 얘기에만 열심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되도록 그들과 絶緣(절연)하게 되었지요. 청탁, 부탁 같은 것을 이 사회에서 없애자는 게 내 신념이고, 인간 혁명이란 말도 있는데 요새도
나한테 부탁 오는 사람이 있으니 곤란합니다. 아직도 정신이 덜 난 모양이지요?
 
 기자=박 장군의 취미는?
 
 박정희=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색하거나 史書(사서) 읽는 걸 좋아합니다. 어떤 책을 좋아하냐고요? 각국의 혁명사를 좀 읽었는데 그것도 역사 서적에 들어가나요? 요즘은 경제 공부도 좀 합니다. <나의 투쟁>이란 영화(히틀러의 일대기를 다룬 기록영화)를 봤냐고요? 대구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지요.
 
 기자=양담배를 피워 본 적은?
 
 박정희=5·16 전에는 나도 양담배를 피웠지요. 혁명 후에는 딱 끊었소(이렇게 말하고는 피우다 남은 아리랑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면서 “담배는 하루에 이놈을 두 갑 피운다”고 픽 웃는다).
 
 기자=舊(구)정권 때의 국회의원에 대해서 옥석을 구분할 용의는?
 
 박정희=부패 부정한 정권과 이에 동조한 자는 다시는 출마를 못 하도록 법령으로 만들어놓고 군도 물러나야겠소. 이 문제는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옥석은 가려야겠지요.
 
 기자=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은 어디다 기준을 두고 있나요?
 
 박정희=어쨌든 앞으로 보다 깨끗하고 애국하는 젊은 세대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기자=항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인사가 어쩌면 너무 이북계에 치우친다는 오해도 있는 모양인데.
 
 박정희=우리에겐 그런 편협한 지역 관념은 없소. 사실 이번 혁명에는 以北 출신 동지들이 보다 많이 참가했으니까요. 
 

 
 

 

 
 
  기자=박 부의장이 부정의 온상이란 국회의사당에 들어온 첫 느낌은?
 
 박정희=이 방이 누구 방인지는 몰라도 처음 왔을 땐 확 불을 지르고 싶은 분노가 앞섰지만 국가 재산이 아까워서 참았소.
어쨌든 언론인 여러분 잘 부탁합니다>
 
 이 인터뷰 이틀 뒤 박정희 부의장이 구미면장 張月相(장월상) 앞으로 친필 私信(사신)을 전한다. 장월상은 박정희와 함께 구미보통학교를 다닌 동기생이기도 했다.
 
 <조국과 민족의 이 절박한 현실을 눈으로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一死奉公(일사봉공) 愛國至誠(애국지성)에 불타는 젊은 청년 장교들과 국군장병들의 구국 정신이 발화점에 도달하여 궐기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습니다. 5월12일 최후의 결심을 하고 상경하는 도중 금오산 상공을 통과하면서 그리운 고향산하와도 작별하고 지나갔으나 天佑(천우)와 神助(신조)가 우리를 버리지 않았고 삼천만 동포들의 염원이 무심치 않아서 금번 혁명대업이 성공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000년 역사를 통해서 누적된 積弊(적폐)와 舊惡(구악)들을 완전히 拔本(발본)하고 자손만대 행복과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조국 대한민국의 굳건한 토대를 닦아야
되겠다는 것이 우리들 혁명군 장병들의 일념입니다.
 
 이 민족적인 대과업은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안 될 것이며 군인들의 힘만으로써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全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이 거대한 민족적인 사명 완수에 총진군하는 길만이 성공의 유일한 첩경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생사를 초월하고 목숨을 걸고서 기어코 이 과업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고향에 계신 여러분, 우리들도 남과 같이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정신과 노력으로써 이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앞날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조국 건설을 위해서 우리들은 분발합시다. 우리들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당대는 희생을 하고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鮮于宗源
 
 박정희 부의장이 대구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장면 전 총리의 측근이던 반공 검사 출신 鮮于宗源 조폐공사 사장이 북한 간첩이었다고 말한 것은 다른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혁명 정부에선 곧 전모를 발표하겠다고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鮮于 씨를 反혁명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박정희는 수사기관으로부터 잘못 보고받은 것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조 당쟁 때는 상대 당파를 쓸어버리는 죄목으로서 주로 역모죄를 이용했다. 대한민국 시대의 정권 교체기엔 용공, 反혁명 같은 어마어마한 혐의가 많이 등장했다. 권력 기관이 親與(친여) 언론을 이용, 콩알만 한 사실을 집채만 한 것으로 선전함으로써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잔재주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우리 정치 풍토의 유구한 전통이기도 하다.
 
 鮮于宗源은 1952년 장면이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국무총리로 있을 때 그의 비서실장이었다. 이승만이 이해 여름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직선제로의 개헌을 감행하자 일본으로 밀항하여 8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가 4·19혁명 뒤 돌아왔었다. 그는 조폐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장면 총리의 가까운 정치 참모 역할을 했다.
 
 박정희 일파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총리에게 보고한 적도 있었다. 장 총리는 이 정보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넘겨 조사를 지시했다. 張都暎은 선우 씨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정보가 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려 주어야지”라고 항의한 뒤 “도대체 누가 제보자입니까. 나도 모르는 그런 정보를 알다니”라고 불평했다. 장도영은 5·16 쿠데타가 터지기 며칠 전에도 선우종원과 만나 식사를 같이 했다.
 
 5월16일 아침 혁명 방송을 들었을 때 선우종원은 장도영이란 이름이 혁명 지도자로 발표되는 것에 기가 막혔다.
 
 “난 장도영 총장을 믿소. 그는 내게 생명을 바쳐 충성하겠다고 다짐까지 했소.”(장면)
 
 “도대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니요? 선우 형, 섭섭합니다.”(장도영)

 
 
 
 

 

 
 

 선우종원의 귀에는 張 총리의 확신에 찬 목소리와 張 총장의 항의하는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 왔다는 것이다. 5월17일 오후 선우종원은 장도영 총장의 공관을 찾아갔다. 부관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장도영은 선우종원을 보자마자 지휘봉과 모자를 집어던지고는 돌아앉아 큰 소리로 울더란 것이다(회고록 《격랑 80년》에서 인용). 울고 난 장도영은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건 민주당 정권이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 장교들이 박정희 장군을 내세워 구국일념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鮮于宗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면서 가장 궁금한 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박정희 장군은 빨갱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우린 그의 손에 죽어야 합니까?”
 
 “그건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나이도 젊고 청렴해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운 양심적인 군인입니다. 물론 사상도 건실하지요.”
 
 선우종원은 장도영의 견장을 툭 치면서 “장 장군은 세 가지를 잘못 한 것 같소”라고 한 뒤 욕을 퍼붓고는 “조심하시오”라고 충고한 뒤 나왔다. 그 며칠 뒤 동향 선배인 李龍雲 전 해군 참모총장이 선우종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장면 총리 측근들을 反혁명으로 몰아 잡아들이려는 모의가 진행 중이오. 빨리 피하시오.”
 
 5월24일 선우 씨는 헌병들에 의해서 연행되었다. “누구 명령인가”하고 물으니 헌병들은 “장도영 장군의 명령입니다”라고 하더란 것이다. 선우종원은 反혁명 사건으로 사형 구형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여기서 그는 또 다른 反혁명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장도영을 만났다.
 
 2년3개월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鮮于宗源은 박정희와 친해졌고 국회 사무총장이 되어 여의도 의사당의 신축을 지휘했다. 反轉(반전)과 逆轉(역전)이 일상화한 한국 현대사의 정치 무대. 反共(반공) 검사가 정치적으로 몰려 親共(친공)으로 둔갑한 선우종원의 사례는 그 모양을 달리하여 요사이도 되풀이되고 있는 권력 투쟁의 한 표본이 아닐까.

 
 
 
 

 

 
 
  
 5·16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좌익 혐의로 시달리고 있었던 박정희는 反共 검사의 대표격인 선우종원을 간첩으로 몰아 좌익 수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혼란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씌워진 의심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권력이 인간적 의리와 이념적 소신, 법치의 원칙을 파괴해 가는 현상은 민주화 시대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우종원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던 李龍雲(이용운)은 박정희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李龍文(이용문) 장군의 친형이었다. 이용운도 며칠 뒤 혁명 정부에 의해서 군부 숙청의 일환으로 구속되었다. 이용문 장군의 미망인 김 여사는 큰아들 李健介(이건개·당시 서울법대 재학 중)를 데리고 박정희 부의장을 찾아갔다. 두 사람이 부의장 방에 들어섰을 때 박정희는 전투복을 입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정희는 몸을 돌렸다. 이때 이건개는 깜짝 놀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분의 얼굴에서부터 무릎까지 掌風(장풍)과 같은 殺氣(살기)가 일종의 막처럼 덮여 있었어요. 나는 그때 중국 무협소설을 읽고 있었어요. 문득 ‘사람이 독한 마음을 먹고 정신을 집중하면 장풍이 생기는 모양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저에게 의자에 앉도록 권한 박 장군은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도중에도 살기의 막이 없어지지 않고 들락날락하더군요.”
 
 김 여사는 구속된 이용운 장군의 선처를 부탁했고 박정희는 혁명에 대한 여론과 학생들에 대한 반응을 물어보았다. 박정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군인들이 정치를 뭐 깊이 압니까. 단지 애국충정에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이용문 장군과 논의하던
대로 목숨을 걸고 혁명한 것입니다.”
 
 김 여사가 “건개 아버지 생존 시에 누차 강조하시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받았다. 박정희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는지 무서운 표정을 풀면서 웃었다. 그 순간 얼굴을 아지랑이처럼 가리고 있던 살기가 사라지더란 것이다.
 
 박정희는 “이번에 혁명을 주도한 장교들은 모두 이용문 장군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장군 생존 시에는 여러 번 구국의 방법에 대해서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잠시 추억에 젖었다. 박정희가 이때 살기를 느끼게 할 만큼 독한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여러 번 신세를 졌고 은혜를 입었으나 지금은 경쟁자가 되고 있는 장도영의 처리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