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재건최고회의의 실세인 14명의 분과위원에는 육사 8기 출신이 다섯 명이었다. 행정 분과위원에 오치성 대령, 내무에 박원빈 중령, 법무에 이석제 중령(8특기), 보건사회 길재호 중령, 체신 옥창호 중령. 이석제 중령은 기능이 정지된 헌법을 대체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을 겸직하고 있는 장도영의
처리였다. 성격이 깔끔하면서도 단호한 면이 있는 이석제 중령은 장도영을 찾아가서 ‘계급을 초월한 담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의 고향도 신의주입니다. 각하도 고향을 버리고 월남했듯이 저도 부모를 고향에 놔둔 채 혼자만
빠져나왔습니다. 목숨 걸고 월남해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가 공산화를 막고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 보자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혁명은 어차피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박정희 장군이 총칼을 들고 나와 정권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까. 이 혁명은 각하가 주인공이 아니라
박정희 장군이 계획하고 실행한 겁니다. 저희들에게 협조하시면 각하의 위상에 어울리는 대접이 꼭 있을
것입니다. 각하 혼자서 네 가지 직책을 다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장도영은 “일개 육군 중령이 참모총장을 협박하는 건가” 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석제는 이렇게
말하고 나왔다고 한다. “혁명이 아이들 장난입니까. 우리가 계급 가지고 혁명한 줄 아십니까. 한강 다리를 넘어올 때
우리는 이미 계급의 위계질서를 벗어났습니다.” 이석제는 비상조치법안에 ‘최고회의 의장은 겸직할 수 없다’고 못을 박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안에는 상임위원회의 의장은
부의장, 즉 박정희가 맡는다고 써넣었다.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된 이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최고회의의 실권을 장악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장도영은 실권을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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